오징어 국 끊인다고 아침에 칼질을 했다.
무우를 대충 듬성 듬성 썰어 놓고 보니 모양이 다 제각각이다.
정갈하지 못한 모양 때문에 웃음이 좀 나왔다.
" 그래! 다양성을 이해시키려면 이런데서부터 다양하게 실천되어야 해" 라며 위안을 해 보았다.
오징어를 썰다가 잠시 다른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앗" 순간 나도 놀라 왼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손톱이랑 살이 찢겨지고 오징어 위에 찢겨나간 조직이 보였다.
칼질할 때는 정신 차리고 했어야 했는데, 정신이 현재에 있지 않고 삼천포에 가 있으니
이런 실수가
손끝에서 열이나고 통증이 밀려온다.
밴드를 붙이고 손가락 끝 옆면을 눌러서 지혈을 한다.
그리고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살 조각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또 얼얼한 손 끝에서 회복을 시작하고 있는 세포들, 백혈구들 등등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참 애쓰며 살았고 현재 살고 있고 미래에 숨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 살 것이다.
가끔은 세포들에게는 어떤 기억과 감정이 있을지 그것을 내가 인식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공상을 해본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보면 나는 '나'에 대해서 언어로 규정되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설명할 수도 없고
납득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더불어 언어가 나를 다 담을 수 없어서 답답하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오늘 하루도 나를 떠난 수 많은 나의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의 노고에 대해서 감사하지도 가슴 아파하지 않으면, 나는 가끔 외부에 있는 이별들에, 거절들에, 배제에 대해서
무척이나 긴장하고 예민하게 군다.
종종 그런 상대에게 분노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요즈음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누군가와 지나온 내 삶을 정리해 보고 싶었고 미래를 조망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수 많은 삶의 이야기들을 쏟아 놓다 보면, 그 시절로 돌아가서인지 잊어버렸던
그 시절의 이소라 노래가 흥얼거려 진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던 그래서 늘 뜨거울 수 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나는 참 융통성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기준에 들기 위해서 고군분투를 하는 사람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융통성이 없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미래의 목표를 위해서 나는 늘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야 비로서 나와 형제들 그리고 부모들이 생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희망이 되어야 해 하고 말이다.
친구사이 나와서 참 많이 변했다.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내 성격이 나오기도 하고, 직장과 친구사이가 분간이 안 될 때도 종종 있다.
무엇보다 내가 믿고 있고 나를 믿는 사람들과 삶을 나누는 이 모든 순간이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봄이 오려는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힘든 이야기, 세상 때문에 힘든 이야기, 이별로 가슴 아픈 이야기, 사람들과 갈등으로
혼자서 속 앓이 하는 사람들 이야기 등등
딱히 해결책도 없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들이 쏟아지니 때로는 미안하고 때로는 안타깝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 함께 가보자" 라는 말 밖에 딱히 없다.
내일은 직장 때문에 면접을 보러간다.
면접 보면서 드는 인상은 전반적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살아 남지 못하면 정말 실패자가 되고 낙오자가 되는 것일까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고, 사람을 '자본' 이라는 시스템안에서 움직이는,
그러면서 너의 고통과 분노는 저리 미루어 둔 채, 자본이 원하는 노동을 제공하라는 요구가 무척이나
불편하다.
내가 내 자신을 환대 하듯이 타인을 환대 하며 살 수 있는 삶은 정말 없을까?
내 자신을 환대 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정말 타인을 환대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중년이 되어버린 내 삶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늘 괜찮을 거라고 위안을 다짐했던 인위적인 결심은 이제 불필요해졌다.
괜찮지 않았고 앞으로도 괜찮지 않을 것 같지만
그 사실을 알았고 또 알아갈 것이라는 기대만으로도 삶은 이미 자유롭고 충만한 것이다.
누군가가 괜찮지 않은 이야기를 나에게 할 때 그래서 어쩌면 더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 속에서 너와 내가 마주하고 있는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 수만 있다면 말이다.
곧 목련이 필 것이다.
그리고 그 해 봄처럼 나는 늘 청초할 것이다.
간만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