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쟁이 강도로 스크린 컴백 앞두고 타이 레스토랑 오픈. 인생 제2막이 시작됐어요”
광고 문구처럼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한다. 1등이란 수식어 뒤에는 영광과 환희가 따라온다. 하지만 때에 따라 1등은 고통이나 불행과 짝을 이루기도 한다. 한때 커밍아웃 국내 1호라는 수식어 때문에 문밖 출입도 자유롭지 못했던 홍석천이 외식 사업가로 변신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통 태국 요리로 여의도를 중독시키려구요”
홍석천을 만나기 위해 그가 최근 여의도에 새롭게 오픈한 태국 레스토랑을 찾았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지만 인사를 건네기가 미안할 만큼 홍석천은 바쁘게 주문을 받으며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지 않았을 뿐 사장이라기보다는 종업원에 가까운 모습의 그는 손님이 한바탕 지나가고 난 뒤에야 빈 테이블에 앉았다. “사업수완이 좋다”고 하자 그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다 보니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주는 있다”고 한다.
홍석천이 태국 레스토랑을 오픈한 계기는 간단하다. 바로 태국 음식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저는 처음 외식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제가 맛있게 먹고 즐거울 수 있는 아이템을 정했어요. 이번 사업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태국 음식뿐 아니라 태국이란 나라를 너무 좋아해요. 태국은 98년에 처음 갔는데, 첫 느낌이 좋더라구요. 특히 섬 구석구석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맛보는 태국 음식이 너무 맛있었어요. 지난해부터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생각하다가 한국인 입맛에도 맞고 한번 맛들이면 중독되고 마는 정통 태국 레스토랑을 하자고 마음먹었죠.”
음식 장사를 해본 사람은 안다. 음식 맛은 물론 종업원의 서비스까지, 아침 첫 손님부터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취향이 같은 손님은 한 명도 없다. 때문에 음식 사업은 하나부터 열까지 손님들의 기호를 파악하는 게 관건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도 사업 초기에는 고생이 많았다. 자금도 넉넉지 못했고 경험도 전무했기 때문. 특히 다양한 사람들의 기호를 맞추는 게 힘들었다. 하지만 커밍아웃 선언을 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전전긍긍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돌파하는 그의 사고방식은 사업에서도 그대로 통했다. 그는 “음식점은 맛있고, 값싸고, 친절하면 손님이 자연스럽게 몰려온다”는 한 가지 원칙만 세워놓고, 다양한 사람들의 입맛을 따라가기보다는 정통 본토 요리를 선보였다.
“제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두 곳인데 하나는 이태원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에요. 원래 그 나라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조금 낯설 수 있어요. 요즘은 퓨전 요리가 인기지만 무조건 외국 음식에 한국식 취향을 섞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요. 외국 음식은 그 나라 특유의 맛에 어느 정도 길들여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그런 면에서 자리를 잡았으니까 이제는 정통 태국 요리로 손님들을 중독시키려고 노력중이에요.”
“힘들었지만 커밍아웃한 것 후회하지 않습니다”
홍석천이 외식 사업에 뛰어든 것은 커밍아웃 선언 이후 방송활동을 하지 못하면서부터다. 커밍아웃을 선언하자 전속 계약을 맺었던 방송사에서 모두 ‘해고’를 통보해왔고, 팬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까지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런데도 그는 “몇 년은 버틸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무명 시절 연극 무대에 오를 때 1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한 달을 살았던 그에게 생활고 따위는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믿었던 지인마저 자신의 전화를 피할 때는 태우지 않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아팠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적군과 아군이 명확하게 가려진 점이었다.
“커밍아웃 이후 한동안 아무도 제 전화를 받지 않더라구요. 게다가 내 이름이 난 기사에는 온갖 욕설이 달렸죠. 아시다시피 제가 한창 방송 활동을 할 때 근육질 몸매는 아니었잖아요. 언제 누가 나를 불러줄지 모르는데, 망가진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쉬는 동안 헬스클럽을 열심히 다녔죠. 그때 제 생각에는 한 2년 정도만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제가 없어질 줄 알았어요.”
홍석천은 외롭고 힘든 시간을 이기기 위해 혼자서 무거운 운동기구를 들어올리며 때를 기다렸다. 하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고, 오래 갔다. 길어야 2년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은 어느새 3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사실 제가 범죄자는 아니었잖아요. 마약이나 음주운전 같은 죄를 지은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복귀하는데, 저는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불러주지도 않더라구요. 더구나 게이 친구나 선배들은 방송 인터뷰에서 제가 눈물을 흘린 모습 때문에 ‘차라리 당당하게 말하지, 왜 울어’라며 따지듯 묻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 ‘만약 당시 당신들이 내 입장이라면 눈물을 흘리지 않았겠냐’고 되묻고 싶었어요.”
당시 홍석천이 당당하지 못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원망해서 방송 인터뷰 중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다. 긴 시간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그는 “내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왜 사람들이 이 난리인가”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인터뷰가 끝날 때 진행을 맡았던 이의정이 “오빠 앞으로 방송 생활도 못하고 그렇게 좋아하던 뽀뽀뽀도 할 수 없을 텐데 앞으로 계획은 뭐냐?”고 묻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 때문에 앞으로 힘든 일을 겪을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총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홍석천이 눈물을 흘린 시간은 마지막 1~2분 정도였지만 방송에서는 그 부분만 부각됐다.
사실 홍석천이 커밍아웃을 선언한 이후 많은 동성애자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표했다. 그들 나름대로 고통과 아픔이 있었겠지만 홍석천이 당했던 고통에 비하면 무임승차가 아니었을까? 그에게 “다른 사람이 커밍아웃을 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보지 그랬냐”고 하자 그는 손을 가로저었다.
“당시 저보다 잘나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가진 게 너무 많아 선뜻 나서지 못했어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화목한 가정도 이루고 있지만 저녁에는 게이 바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죠. 서른 살이 되던 해 ‘30년 동안 보이지 않는 벽에서 숨어 지냈다면 남은 날은 단 하루를 살아도 떳떳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서른 살이란 나이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다시 새 출발이 가능할 것 같았거든요.”
“나를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자신과 다른 취향을 인정하지 못했던 사회는 오랜 시간 그를 울타리 안에 가뒀다. 하지만 고통은 사람을 성장하게 만들었다.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많은 고민을 했던 지난 7년 동안 홍석천은 사회를 보는 시각은 물론 그동안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마음의 키가 훌쩍 커버린 덕분에 떠났던 사람들도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오히려 전에는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과도 가까워졌다. 그는 그 이유를 “밑바닥까지 모두 보여줘서 더는 숨길 게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홍석천은 남여 불문하고 모든 사람과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장점으로 꼽았다. 그중에서도 홍석천이 가장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젊은 대학생들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가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연기다. 다행히 홍석천은 올해 그렇게도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충무로에 컴백했다. 올가을쯤 문성근, 주진모와 함께 욕쟁이 강도 역으로 열연한 영화 ‘퍼즐’을 통해 다시 대중 앞에 선다. 그가 지난해 겨울부터 수염을 기른 이유도 영화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서다.
“제가 욕쟁이 강도 역할을 맡았다고 하니까 다들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어요. 저도 그럴 것 같았는데, 하다 보니까 어울리더라구요.”
커밍아웃 전에는 자신의 캐릭터에 맞는 역할을 고를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는 역할을 주겠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주어진 일에 무조건 열심히 하게 됐다고.
낮에는 여의도에서 직장인들에게 다양한 태국 요리를 선보이고, 밤에는 다시 이태원으로 달려가 손님에게 분위기 있는 와인을 권하는 남자. 그러면서도 짬짬이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연기 활동을 하며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홍석천. 한때 더 잃을 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바닥까지 떨어졌던 그가 다시금 비상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안진영
* 차돌바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10-20 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