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2학년때.
그 해 겨울에 담임 선생님께서 루돌프사슴코라는 캐롤송을 가르쳐주셨는데,
재미있는 이야기 솜씨로 동화도 함께 들려주셨던 기억이 난다.
왜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도 난 루돌프보다 산타할아버지에
대한 동경심이 컸던것 같다.
어쩌면, 산타할아버지가 내게도 소원 같은 것을 들어주시지는 않을까하는.
그 어린나이에도 인생의 반전을 꿈꿨던 것 같다...
1. 1의 무리 : 루돌프
① 상대적 소수 또는 상대적 약자의 다른 이름. 비주류.
② 흑인, 노인, 아이,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범법자, 소수민족, 노처녀, 노총각... 들을 대변하는 것이거나, 이런 뉘앙스를 갖게 하는 그 대상들. (여성을 이 집단에 포함한 이유는 아직은 이 사회가 여성을 주류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③ 특별하거나, 특이한 사람. 바로 나 또는 이 글을 읽는 당신.
2. 2의 무리 : 다른 모든 사슴들.
① 상대적 다수이며, 상대적 강자 또는 그 무리에 편승하려고 하는 사람, 주류, 갖은 자, 있는 자 등의 뉘앙스를 풍기는 사람.
② 자신의 무리 속에서, 자신과는 다른 이를 또는 다른 무리를 이해하지 않고 일관된 편견으로 1을 바라보는 사람들이거나, 그러한 모습이 싫다고 하더라도, 분위기상 침묵하거나, 또는 그런 분위기를 따르는 사람.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말하는 사람. 기득권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
③ 대부분의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 용기 없는 사람들. 바로 나이거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3. 3의 무리 : 산타.
① 객관적인 사람, 능동적이며 합리적인 사람, 긍정적인 사람, 친절한 사람, 용기 있는 사람, 신념이 분명한 사람, 편견이 없는 사람,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 2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사람.
② 이런 사람 별로 없다.
*여기서 잠깐... 1과 2에서 밝혔듯이, 우리 모두는 1에 속할 수도, 2에도 속할 수도 있다. 언뜻 이것은 모순처럼 들려질지 모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 것은, 우리는 살아오면서 자연발생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생겨난 인간 관계들에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백인인 A는 2급 장애인이며, 컴퓨터 회사의 간부이며, 여성이다.’ 만약, A가 흑인에 대한 차별적 생각을 지녔다면, 그는 2에 스스로 2에 속하는 것이되고, 만약, A가 여성과 장애인이라는 무시하는 환경에서 근무한다면 그는 그곳에선 1에 속한 사람이 된다. 이처럼 A는 각각의 집단 내에서 1, 2 어디에도 속할 수 있으며, 또 그 자신도 가치관에 따라 1, 2 어디에도 속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 또는 내가 1과 2라는 상반된 집단에 동시에 속할 수 있다는 말은 모순이 될 수 없다.
*1과 2는 은 눈으로 보이는 것을 구분한 것이고,
2와 3은 가치관에 의한 구분이다.
4. 조건 : 안개 낀 성탄절날.
① 어떤 이에겐 위기 혹은 어떤 이에겐 기회.
5. 동화 vs 현실
① 루돌프 vs 다수의 루돌프
② 오직 비주류인 루돌프 vs 주류로도 살아가는 루돌프
6. 세상에서 살다보니...
① 사람들 모두는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를 다른 사람과 구분 짓는 매우 중요한 것이며, 꼭 필요한 것이고 때문에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혼돈해선 안될 것은, 그 특별함은 컴플렉스가 될 수도 있지만, 관점에 따라서 장점이 될 수 도 있다. 동시에, 그 특별한 각자들이 모인 곳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사회이고 세상인 것이다.
② 세상에 살면서 상처를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랴만 우리는 종종 자신이 상처를 받았던 것에 대해 망각을 하고, 너무나 쉽게 다른 이에게 상처가 되는 언행을 서슴치 않는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그러한 언행이 남에게 상처를 줄 것이라는 것을 꿈도 꾸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실수라고 가벼히 넘길수도 있겠지만, 돌 맞은 개구리의 입장은 그렇게 간단히 실수란 것으로 이해하고 넘기기엔 이미 너무 많은 돌들을 맞았을지 모른다.
③ 다들 살기 힘들다고 한다. 이 사회는 이기주의가 팽배하며, 다른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개인의 이기주의는 모여서 님비현상을 낳고, 나아가 국가 이기주의를 낳는다. 나라의 정치, 경제가 어려운 것은, 살펴보면 개인의 이기와 편협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나]의 힘든 삶은 [나]의 이기와 편견의 부메랑일 뿐이다. 그래서 3에 속한 사람들은 편견 가득한 이 시대에 더욱 소중하며 참으로 귀하다.
7. 상황
① 내가 아는... 어떤 여인의 경우다. 그녀는 딸이 셋 있는데, 그 중 첫째 딸이 결혼할 때가 되었다. 첫째 딸의 남자는 ‘**도’의 지방 사람이었는데, 그녀는 바로 그러한 이유로 딸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그녀는 집안에서 (부모이므로) 주류일 수 있으며, 사회에서 (주부이므로) 비주류일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당시에 이 사회에서 ‘비주류’였던, 그 특정 지방사람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결혼반대를 하였다. 그녀는 기독교인이었으며 딸의 남자도 기독교인이었지만 그녀에게 그런 것쯤은 중요하지 않았다. 딸의 행복보다도 종교적 신념보다도 사회적 편견이 그 여인을 지배한 결과다. (사실 우린 살아오면서 이 여인과 같이 이유가 분명치 않은 편견들을 ‘학습’하며 자란다. 사고와 행동의 범위는 그 틀에서 벗어나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은 것이다.) 그 여인은 딸을 통해 남자에 관하여 들었을 때, 그녀를 둘러싼 그 모든 여건을 떠올리고는 ‘큰일났다’고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그 주변과 더불어 살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편견에 따른 현실 인식은 이렇게 어이없기도 하다)
② 이런 경우도 있다. 요즘은 ‘따’가 유행이다. 왕따, 은따... 그런 것 말이다. 그런데, 그 따들이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이들을 따 시킨다고 한다.
약자로 대변되는 그 따들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여러 곳에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보상심리 일 수도 있고, 약육강식의 원초적인 자연법칙 일 수도 있겠지만, 까닭이 무엇이든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 안에서 화합하지 않는다는 것.
8. 결론
① 더불어 살기
진정 ‘더불어 살기’란 무엇인가? 편견을 갖은 무리 속에서 자신도 같은 편견을 갖고 그들 속에 묻혀 사는 것인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으로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 편견을 갖고 사는 그들과는 더불어 편하게 살 수 있겠지만, 그러한 삶이 ‘더불어 살기’ 의 본질은 아님을 나는 확신한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더불어 살기’가 되는 것일까? 잘 모르겠으면 역으로 생각해 보자. 그것의 궁국적인 목표가 ‘화합’이며, 이것은 ‘이해’ 없인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대방을 받아들이려면 스스로 ‘편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정리를 해보자. 첫번째는 자신이 편협한 편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고 또한 버려야 하며, 두번째는 타인(또는 다른 무리)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로운 이해가 즉, 존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앞서 말한 두가지가 우리의 삶에 실재하도록 행동하는 용기인데, 이것이 갖춰질 때 비로소 ‘진실한 더불어 살기’가 될 것이다.
② 산타의 평가
이러한(진실한 더불어 살기) 측면에서 3의 산타는 그 예를 잘 보여줬다고 말할 수 있다. 2의 사슴들이 지닌 옳지 못한 편견은 이미 오랜 시간동안 여론을 장악해왔는데, 3의 산타가 그 대세에 맞서기란 쉽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사슴들은 자신들을 무시한 처사라며 썰매 끌기를 포기하는 강수를 들고나와 산타를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다. 루돌프가 앞장 선 일이 없었으므로 산타의 주장대로 하는 것은 뻔한 위험에 빠지는 것임을 강조하는 세력이 생겨날 수도 있다. 뿐이랴, 산타와 루돌프 간에 커넥션은 없었는지 산타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소리도 커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어쩌면 산타는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2의 무리가 3으로 변화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존의 것과 부딪혀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삶을 강요하는지 겪어 본 사람들은 알것이다. 하지만, 산타가 ‘더불어 살기’의 두가지 방법를 알고 있어도 세번째인 실천하는 행동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당신 안에 ‘사랑’이 있을 때를 전제로 한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루돌프 사슴코’에서 ‘위대한 산타’쯤으로 제목을 바꿔야 할 것 같다.)
9. 의문제기
① '그후로 사슴들은 그를 매우 사랑했네~'하는 대목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동화에서 2의 무리는 (어쨌거나) 1의 무리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않다. 동화속의 그들은 산타의 등장 이후 결론적으로 그들과는 다른 루돌프를 진심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럼 우리의 현실을 볼까? 1의 무리(비주류)에 속한 사람들 중 몇몇은 뛰어난 천재성, 사업성, 예술성, 인간애등을 보였고, 인정받아왔지만 그것이 곧 비주류에 대한 몰이해나 편견을 없애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여기서 갑자기 궁금한게 하나 생긴다. 만약에 루돌프가 둘이였어도 그 동화는 결과가 같았을까? 셋이었다면, 넷이었다면... 수십의 루돌프가 있었다면... 그래서 사슴들 중 상당수가 썰매를 못 끌게 되는 상황으로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그 동화는 같은 결론을 향해 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의 현실은 주류들이 받아들여야 할 비주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비주류인 동시에 주류로도 살아간다. 동화처럼 그렇게 극명하게 둘 중 하나로 살아가지지 않는 것이 현실과의 차이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다.
10. 다시 결론
①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라는 우리 말이 있다. 역지사지라는 말은 올챙이가 외쳐야 될 말은 아니라는 얘기다. 개구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인 것이다. 내가 받는 편견과 차별이 부당하다면, 아무리 비주류가 많다해도-내가 속해있지 않은 -모든 비주류에 대해 편견과 차별을 지금 당장 거둬야 한다. 결국 딜레마를 극복하는 것은 본질에 뿌리를 둔 정공법이다.
② 더불어 살기의 시작은 산타의 등장이 아니라, 내가 산타가 되는 것이다.
난 너무 어린 나이에 산타할아버지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우리집 형편에 택도 없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크레파스, 스케치북.. 그 정도만으로 난 충분히 행복했다.
그리고 보니, 어릴 적에 그린 그림들이 생각난다.
산 봉우리 세개 그리고. 집하나, 연못하나 그려놓고
철봉도 그리고, 우리 가족들 그리고.. 그런 그림을 수도 없이 그렸었다.
아.. 하늘엔 항상 해가 떠있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