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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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팬 2006-10-17 21:21:12
+2 787
반줄.

그저 내 추억 속에 묻어 있는 음악다방 이야기를 쓰려 했다가
어떻게 번지고 번져서 내 로맨스를 풀어 내게 되었다.
그것도 5회에 걸쳐서 말이다.
쓰다보니 나름대로 팬들이 생겨서
성원을 보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개인적인 사랑 얘기를 공개적으로 쓰는 것에 대해
반감을 보이기도 했다.

다른 이야기를 연재하려고 한다.
연재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반줄을 시작할 때와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는 뜻.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짤막한 글들을 정기적으로 써 볼 요량이다.
내 추억의 단편들을 들춰내는 건 두려움이자 기쁨이다.

훗날
"내가 왜 그랬지?"하며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를 돌아보며
내 식으로 정리하면 그만이다.
지금껏 두려움 없이 살아왔으니...


RCY  첫회

지금으로부터 22년 전,
그러니까 내가 대학 2학년생이었던 1984년,
우리집은 미아삼거리 쯤에 살고 있었다.

미아삼거리에서 19번 버스를 타면
고대를 지나 동대문운동장을 거쳐 한양대를 가게 되어 있었다.
직선 노선은 아닌지라 시간은 좀 걸렸지만
고대생들과 건대생, 세종대생(19번 버스는 면목동까지 다녔다)들을 두루 볼 수 있는 재미가 있어서 난 주로 19번 버스를 이용해서 등하교를 하고는 했는데,
시간이 없을 때는 29번 버스를 탔다.
29번 버스는 마장동을 거쳐 가는 꽤나 직선 노선이어서 시간을 20분 정도 줄여 주었다.
하지만 한양대 앞에 바로 서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도 왕십리 성동경찰서 앞에서 내려 지하도를 이용하면
한양대 후문까지 그리 먼 거리는 아니어서
인문관에서 대부분 수업이 있는 나로서는 29번 버스가 시간을 많이 줄여 주는 왔다였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지금은 주 5일 근무가 많아서 토요일이 휴일이지만
그때는 토요일은 반공일(반만 노는 날이라는 뜻)이었고
대학에서도 토요일 수업이 있었다.
그날은 영화워크샵이 있는 날이었다.
난 대학 2학년에 올라가면서 학생운동에 전념하던 터라
평일에는 거의 수업에 못(안)들어가고 주말 수업만 그냥저냥 듣고 있었다.
내가 수업에 들어가면 교수님이
"어, 민주투사 오셨구만."이라며 놀리는 적이 많았다.
여하튼 그날 난 29번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면 안 좋은 게 운전기사가 라디오를 크게 튼다는 거다.
예나 지금이나 이 버스 기사님들의 센스는 제로에 가까워서
지들이 듣고 싶은 방송을
귀가 떨어져라 열라 크게 들어 제낀다.
오후 4시가 넘어 가고 있던 시간이었나 보다.
그날은 왠지 기분이 울적했었는데
그날 따라 이 버스 기사 센스 있게도 FM방송을 튼다.
FM은 그나마 AM보다는 수다도 적고 수다의 내용도 달라서 그럭저럭 들을만 한 게 꽤 있더랬다.

* 난 '지금은 라디오 시대'류나 노래방 대결 같은 프로를 정말 싫어 한다. 정말 듣기 싫다.

어쨌든 그날 버스에서는 '시인과 촌장'인지 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꽤나 들을만한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런 날은 왠지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오지 않나?
난 그랬다.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좋은 예감.

버스가 적십자사 빌딩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노래에 취해서 눈 감고 흥얼거리는데
뭔가 느껴 졌다.
이 거 뭐지?
뭐야?
눈을 뜨고 둘러 보는데
귀여운 녀석이 나를 힐끔 거린다.
짜~식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흥, 외면 하며 다시 눈을 감는다.
다시 또 뜨겁다.
참나, 보는 눈 정말 있구나 너?
눈을 떴는데 내 앞에 바로 그녀석이 와 있다.
허걱.
난 모른척 딴청을 피웠지만 가슴이 뛰는 건 어떻게 말릴 수가 없었다.
녀석이 너무 코 앞에 있었다.
가슴 뛰는 소리가 녀석에게 들리면 안 되는데...
녀석은 아주 핸섬했다.
키는 나보다 한 10센티미터는 크고
얼굴은 김석훈과(科)였다.
요즘은 찐한 타입 별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때는 그런 과가 최고였다.
아니, 난 여전히 찐한 타입을 선호한다.
그런 녀석이 바로 앞에 있다.
나를 힐끔 거리면서.
버스는 사람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닌데
녀석은 어쩐 일인지 내 앞 자리를 차지했다.
마이마이(당시 유행하던 휴대용 카세트, 삼성제품)에서 연결 된 이어폰에서는
아바가 노래하고 있다.
짜식, 아주 나를 제대로 아는 구만.
그래도 짐짓 모른채 해야 한다.
일단, 녀석이 나를 노리는 건지
뭔지 모르잖나?
게다가 바로 며칠 전 대지극장 앞에서 중학생 다섯에게
회수권 10권(100장, 버스를 100번 탈 수 있는 분량)을 삥뜯긴 아픈 추억이 있는 나로서는
덩치 큰 넘들은 경계 대상이었다.
그게 아무리 핸섬 파릇한 넘이라도 예외는 될 수 없었다.
주머니 속에 회수권이 들어 있는 지갑을 꼭 쥐었다.
그런데 녀석은 계속 나를 힐끔 거린다.
아니 어떤 때는 노골적으로 빤히 바라 본다.
어후, 뭐야?
살짝 흘겨 보다가 눈이 마주 쳤다.
놀라서 얼른 돌렸다.
가슴은 왜 또 뛰는 거니?
너 좀 가만히 있어 봐.
얘는 회수권 노리는 일당 중 하나일 수도 있다니깐.
그러다가 슬쩍 녀석을 보는데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그러더니 한번 씨~익 웃어 준다.
뜨거운 바람이 가슴을 뚫고 지나 간다.
이를 어째.
큰일 났다.
적을 알아야 대처를 할텐데...
저 녀석 보아하니 신수도 훤하고 돈도 좀 있는 집 자식인 것 같아.
게이는 아닌 거 같고(당시 나는 게이는 나처럼 가난한 집 자식에 우울한 넘들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그게 다 반줄 미남 때문이다?), 뭐야 증말?
머리는 계속 그렇게 저렇게 굴리지만 가슴은 여전히 뜨겁고 100미터 달리기용으로 전환되어 버린지 오래다.

미아삼거리가 다 와 간다.
내리는 척 하면서 녀석의 앞을 지나쳐 문쪽으로 갔다.
녀석의 눈빛이 살짝 흔들린다.
내 가슴이 또 방망이질 한다.
앞으로 두 정거장 남았다.
버스 두 정거장, 시간으로 치면 5분이 채 안되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 진다.
내가 벨을 눌렀다.
녀석을 본다.
녀석도 나를 본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고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내린다.
뒤 돌아 보지 않는다.
보고 싶지만 보면 안 된다.
그게 내 자존심이다.
버스가 출발하고 100미터 이상 갔을 때 쯤 돌아 봐야 한다.

그리고 바로 확인 작업 들어 간다.
확인하는 벙법은 이렇다.
일단 천천히 걷는다.
최대한 천천히.
그러다가 따라오던 넘이 나를 앞지르면 쫑이다.
나를 따라 오는 게 아닌 것.
내가 최대한 천천히 걷는 데도 나를 앞지르지 않으면 그건 나를 따라오는 게 맞다.
일단 확률 50% 이상.
그러다가 속도를 조절한다.
조금 빠르게 걷기도 하고 또 느리게...
내 속도에 그 넘이 맞추면 확률 100%.
짜증 난나구?
오~ 노.
그런 과정을 꼭 거쳐야 한다.
시간을 들이고 노력하지 않으면 봉변 당하기 십상이다.

게이 연애 수칙 1항.

지독히도 계속적으로 살피라. 그렇지 않으면 개망신 당하거나 맞는다. ㅠ.ㅠ

그런데 이 녀석, 확률 100%다.
좋아, 딱 이 때 쯤이다. 싶을 때

"저기요."

뒤를 돌았을 때 녀석이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빙고!
짐짓 모는채 하며 눈을 동그랗게(최대한 예쁘게) 뜨고 쳐다 보는데,

"시간 있으면 빵이나..."

빵?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방금 빵이라고 한 거 맞지?
뭐래?
녀석, 고등학생인가 보다.
시간 있으면 커피나 한 잔... 이 정석인데 빵이라니...
어떡하지?
똥 밟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딩과의 연애는 내 스케쥴에는 없던 거였다.
그럼, 그렇지 내 주제에 무슨...
그런데 슬슬 배가 고팠다.
순간, 돌아가는 내 머리... 빵이나 얻어 먹고 헤어져?
내 눈 앞에는 문화당의 슈크림빵이 떠다니고 있었다.
녀석이 빨개진 얼굴로 나를 꼬신다.
녀석은 꼬신다는 표현이 딱 맞는 모습으로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었어요. 그쪽만 좋다면 잘 만나고 싶어요. 저 북공고 다니는..."

귀여웠다.
북공고?

"좋아요, 문화당으로 갈까요?"

순간, 녀석 새파랗게 질린다.



다음에 계속


피터팬 2006-10-17 오후 21:21

부산에 갓다가 어젯밤 서울에 돌아 왔어요. ^^*

칫솔 2006-10-18 오전 00:39

마지막회 예상

1. 이번엔 꽁치를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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