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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우울증의 시대, 믿지 못할수록 믿고 싶은 사랑

1.  소설을 읽을 때는 서사가 단선적이고 심리 변화도 치열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한마디로 심심하달까.) 영화에서는 이러한 비교적 단순한 서사가 오히려 강점이 되면서 빈 공간을 연기와 연출로 채워져 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많은 영화에서 소설의 다층적인 서사를 구현하지 못하거나 심리 변화의 치열성을 담지 못해(이건 능력부족이라기 보단 역시 영화의 한계이다) '원작을 해쳤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데, 예로 허진호 감독의 <외출>을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김형경씨의 동명 소설과 함께 기획되어 나왔다. 소설은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서사와 의존과 결핍에 의한 맞바람이라는 치열한 심리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사실 내용은 별거 없다. 각자의 배우자의 불륜에 충격을 받은 주인공 둘은 서로에게 끌려 맞바람을 피우게 된다; 는 것인데 이 내용의 공백을 채우는 건 주인공들의 치열한 심리 묘사이다. 하지만 허 감독의 영화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이 충분히 설명되지도 못하고 그래서 공감받지도 못한 채 좀 쌩뚱맞다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물론 김형경씨의 소설은 언제나 그렇듯이 심리 묘사의 과잉이다.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어떠냐. 재밌는데) 우행시의 이에 반면 원작의 단선적인 서사의 덕을 많이 보고 있다.

2.  둘이 처음 만났을 때 둘은 죽기만을 바라는 상황이었다. 삶-본능(에로스)는 소멸된 채 죽음충동(타나토스)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주인공들이 자살을 시도하거나 얼른 죽기를 바라는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러한 결핍과 상실의 가시 덩쿨에서 도망갈 수 있는 건 결국 자신의 피를 보고, 눈물을 면서 가시 덩쿨을 풀어내거나 죽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형경의 자전적 소설인 <세월>에서 주인공은 성폭행으로 시작된 연애를 지속하는 과정에서 반복하여 수면제를 모은다. 이 수면제의 의미는 이 지독한 나락에서 언제든지 죽음으로 탈출할 수 있다는 일말의 역설적인 희망인 것이다.

둘의 증세는 우울증에 가깝다. 우울증은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을 내면화함으로써 잃어버린 타자가 나의 자아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우울증은 단순히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과는 다른데, 상실에 따른 '애도'가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는 것과 다르게 나의 자아의 일부가 되어 원래의 자아가 새로 들어온 자아(잃어버린 타자)를 끊임없이 괴롭히기 때문에 회복이 쉽지 않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미워하고 괴롭히기 때문에 죄책감, 자학, 자살충동, 무기력 등의 증세를 보인다. 영화 <오로라 공주>에서 정순정(엄정화)이 살인을 할 때마다 딸이 좋아했던 오로라 공주의 스티커를 붙이는 것은 죽은 딸이 이미 엄마인 엄정화의 자아의 일부를 구성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다른 자아(딸)을 죽인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딸을 죽인 또 한 명인 공범을 스스로 죽임으로써 결국 복수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정윤수(강동원)가 잃어버린 대상은 일차적으로는 동생 은수이다(애초의 엄마의 상실이었겠지만 내러티브의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으므로 우선은 제외하자). '애국가를 들으며 무서움을 극복하고 힘을 내는 것은' 은 원래 윤수의 것이 아니라 은수의 것 아닌가. 윤수는 은수가 죽은 후 과하게 슬퍼하는 과정에서 은수를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버리고 결국 그 습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기에 사랑하는 부인 민옥(윤주련)의 상실은 사태를 더욱 극단으로 끌고 갔다. 그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살인을 그저 인정해버리는 건 그가 착해서가 아니라 그의 삶-본능을 죽음 본능이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유죄를 인정하는 것이 그에게의 우울증의 징후인 것이다.

  문유정(이나영)의 징후가 우울증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문제는 일차원적으로 강간트라우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끊임없이 떠올리는 건 강간의 기억이 아니다. 내러티브는 그녀가 강간을 당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유정과 그녀의 엄마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강간을 당하고 난 후 엄마에게 가는 장면, 엄마가 조용히 하라며 유정을 책하는 장면. 즉 강간의 장면이 아니라 상실의 장면이 그녀에게 가장 큰 문제지점인 것이다. 이는 '근친강간의 트라우마'라는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 <여자, 정혜>와 대조적이다. <여자, 정혜>에서 정혜(김지수)는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상황에서 강간의 장면을 떠올리는 반면 <우행시>의 유정은 엄마와의 상실의 기억을 떠올린다. <여자, 정혜>에서 어머니와의 관계와 의존과 치유의 관계였다면, <우행시>에서 강간 이후의 모녀관계는 그와 대조된다.

  유정의 "문유철(구본석/유정을 강간한 사촌오빠) 그 인간 보다 엄마가 더 미웠는데"라는 대사는 유정의 증세가 강간트라우마라기 보단 우울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둘은 혼재되어 나온다) 유정이 "엄마를 용서하는 게 죽기보다 힘들다"고 하는 건 괴롭히는 자아가 이미 내면화되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가 윤수와의 사랑을 통해 어머니를 결국 용서하게 되는 것은 사랑과 치유를 통해 그녀가 우울증에서 치료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결국 둘이 만나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은 일련의 치유과정이다. 우행시에서의 둘의 관계는 정신 분석 관계에서 상담자-내담자 관계에서 유사하다. 다만 상황에 따라서 누가 상담자이고 누가 내담자인지의 관계가 유동적일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한 말들-상실한 타자, 즉 내면화된 타자-을 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숨겨진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것들을 자신에게서 해방시키고 우울증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 둘은 마치 정신분석 중인 내담자처럼 방어기제를 보임으로써 '치료'를 방해한다. 위악적으로 차갑게 대하고 서로를 만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서로에게 화를 내고. 동시에 '치료'를 진행해 가면서 그들은 서로 '전이-역전이 관계'(상담의 과정에서 내담자는 자신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자신을 치료해주는 상담자에게 의존하고, 또한 애정과 집착을 갖게 되는데 이를 전이라고 하며, 반대로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을 역전이 관계라고 한다.)를 맺게 된다.

우행시에 나오는 '상담자-내담자 관계'는 전통적인 정신분석학과는 다른다.  프로이트적인 전통 심리학에서는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전이를 느끼면서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치료 과정에서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담가는 문제의 답을 알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 원인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행시>에서 유정과 윤수는 모든 답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커녕 상처투성이의 존재이다. 이러한 상호 관계는 오히려 여성주의 심리 상담에서 이야기하는 '상담자-내담자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여성주의 심리 상담에서는 상담자를 '피해 받은 개인'으로 가정하고, 내담자와의 평등한 관계를 강조한다.  서로의 상처의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관계가 전통적인 아버지로서의 관계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윤수의 '돈 많고 이렇게 예쁜 여자도 불행할 수 있고, 죽고 싶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대사는 이러한 공감을 보여준다.

사실 이 영화는 못미덥다. 단 몇 번의 만남으로 우리는 그렇게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나와는 너무 다른 타자에게 그렇게 쉽게 나의 마음을 열 수 있을까? 그들의 상실이 그렇게 쉽게 치유될 수 있었을 것일까. 공지영과 송해성은 결국 사랑을 빌리고 만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그렇게 서로에게 빠져들어 치유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나는 사실 이러한 사랑의 환타지를 믿지 못한다. (다만 이나영과 강동원은 이러한 사랑의 환상에 아주 적절한 캐스팅이었다) 현실의 사랑은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믿어갈수록 이렇게 불붙듯 치유되는 사랑이 믿고 싶어진다. 믿지 못할수록, 믿고 싶어진다.

4. 영화는 결국 관계 양식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서로를 험담하고 서로를 경계하며, 이기고-지는 관계만 존재하는, 게다가 언제나 패자는 한마디 변명도 없이 떠나야 하는 미국식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관계 양식인 것만 같아 씁쓸해지는 요즘이다. 서로의 고통에 공감함으로써 맺어지는 관계, 그를 통해 치유되고 해결되는 관계. 그것이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이고, 공화주의에서 얘기하는 정치적 우정의 기초가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시대는 신자유주의적 우울증의 시대이다. 사람들은 평등하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소망을 상실했다.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사랑하였는가. 4.19과 5.18과 87년을 거쳐 90년대의 활발했던 시민사회, 우리 사회를 진보시켜 온 그 소망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삶에서 그 소망을 추방시켰다. 그 쫓겨난 타자-평등하고 인간다운 삶-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무의식에 내면화되어있다. 천만 관객이 넘게 들어 국민 영화가 된 <태극기 휘날리며>,<실미도>,<왕의 남자>,<괴물>은  모두 권력에 의해 추방된 자들에 대한 비극 아닌가. 우리 시대는 이처럼 권력에 의해 추방된 자들에 대해 무의식적인 공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우울증이다.  공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우정의 기반 하에 정치하지 않는 시대. 그 시대와 우리를 치유하는 길은 우리가 상실한 것, 상실했기에 우리 안에 내재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서로 공감하고, 사랑하고, 정치적 우정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다시 평등과 인간조건을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적 과제이다.

기즈베 2006-10-12 오전 08:46

음.. 재밌네..^^

차돌바우 2006-10-13 오전 01:28

물이불 전공이 정신분석학이야? ^^

물이불 2006-10-13 오전 02:37

제 전공은 정치학인 것이지요.

Littledave4230 2011-11-13 오후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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