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혹은 철학적 주장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개진이 가능하다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뜬금없는 이야기가 둥둥둥 귀에 울릴때는 당혹스럽기가 짝이 없다.
글쎄 교수를 지식층이자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정신적 노블레스를 추구하는 계층이라는
전제조건 자체가 문제가 있을런지 모르지만, 어떻게 전문적인 인문적/철학적 기반을
가지고 공정성을 유지해야 하는 법학자가 저런 의견을 개진할 수가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 근원적인 문제를 놓고 생각을 해보았을 때, 급속한 산업발전으로 인해서
단지 5-60년 전과는 너무나 다른 서구화된 생활행태를 보이고 있지만,
우리의 정신은 그만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런지 라는 생각이 가끔은 든다.
사실 우리에게는 농경사회와 유교라는 사회적 큰축에 의해 만들어진 전통적인 가치관은
있으나, 해방과 전쟁 그리고 새마을 운동으로 대표되는 급속한 산업화에서
계승은 커녕 과거와의 단절 속에 전통적인 가치관에 서구의 가치관을 접목시키지 못하고
단지, 문물을 받아들이듯이 쉽게 그들의 가치관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전통적 가치관과 서구의 가치관 모두 어중간하게 다리를 걸쳐버린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특히나 위의 이야기중 “보수는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회의 정체성 파괴를
경계한다”며 “동성애자를 차별해서는 아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를 마치 정상적
인간관계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한다는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을 단호히 거부한다”는 부분은
과연 이 교수라는 분께서 '다양성'의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게 하는지 심히
의심이 가게 하는 부분인 듯 싶다.
물론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서양철학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같은
이원론적인 사상과, 아낙사고라스 같은 이들이 주장한 "다원론"간의 갑론을박에 의한
변증법적 발전이라고도 볼 수 있기에 다양성에 대한 고찰이 철저히 그리고 세밀하게
이루어질 수 밖에 없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불확정적이고, 유목적이며, 혼돈적인 근대 이후 사회에 대하여
"신의 죽음"으로 표현되는 니체의 절대적 확정성에 대한 비판의 명제가 제기된 이래,
그의 철학은 현대 사회를 가장 잘 표현하고 비판하는 근원적 다양성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 이후로 많은 이들이 서구 철학을 지배해온 1대1적 확정적 대응 관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고, 다양한 해석에 대한 하나의 방편으로 나타난 것이
데리다의 해체적 글읽기와 들뢰지의 폴드개념에서 추구하는 무한한 다양성과
시뮬라크르 같은 것일 것이다.
내 개인의 소견이기는 하지만,
물론 서양 철학에서 뿐만 아니라위의 교수분 께서 부르짖으신 "보수"님네들의
전통적 가치관에서는 오히려 더욱이 그러한 다양성의 개념이 정말 하나의 도식화되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우리네 태극기에 새겨진 태극 문양 말고, 세로로 분할되어 있고
가운데 점이 하나씩 찍혀있는 '영환도사' 같은 강시영화에 등장하는 태극 문양에
나타나는 동양적 가치관에서의 다양성을 살펴보자.
태극에서 각각의 음양의 면적에 있어서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부분과 적은 면적을 차지하는 부분이 거스름이 없이 매끈하게
그리고 심지어는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르게 연결이 되어 있다.
이는 이 세상에 명확한 경계는 없다는 시사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음속에 있는 양, 양속에 있는 음은 어떤 존재도 확정적/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에 이질적인 다른 존재를 품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이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경계가 허물어짐을 의미하는 'Blurring'의 개념으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공의 개념은 들뢰즈가 말한 '충만한 기관없는 신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충만한 기관없는 신체'란 개념은 배아와 같아서 무엇으로든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실제적인 분화가 이루어지기 전이어서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공' 역시 이와 같은 개념으로 단순히 비어 있음이 아니라, 비어 있음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이 살펴보았듯이 다변화되고 개별화된 현대사회란 근원적 다양성이라는
개념을 배제하고는 설명될 수도 유지될 수도 없을 터인데, 언제까지나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보수는 어찌 어찌 한다"라는 이분법적이고 확정적인 망언을
당당하게 내뱉으실 수 있으신지 그 오래된 지성의 부패하는 숨결에 숨을
쉴수가 없을 정도이다.
영화 '괴물'에서 변희봉씨가 독백처럼 내뱉는
'새끼 잃은 부모 속이 썩어 문드러지면, 그 냄새가 십리 밖까지 진동을 하는 법이여'
라는 말씀과는 달리, 이상돈 중앙대학교 법대교수님의 이미 가치를 상실한
지성-과연 존재했는지도 알 수 없지만-이 썩는 냄새는 백리 밖까지 진동하지
않을런지 싶다.
이
1. 중대 이상돈 씨보다 아류 씨가 말이 더 많다.
2. 둘 중에 누가 더 잘생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