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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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보이 2005-03-25 13:12:09
+0 807


Gerry, Gus Van Sant, 2003


며칠 전에 보았더라면 난 이 영화를 2004년 베스트 목록에 넣었을 것이다. 2005년의 베스트는 이 영화부터 시작해야겠다.

아핏차퐁이 정글 속으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다면, 거스 반 산트는 사막 속으로 들어갔다. 정글과 사막을 대하는 이들의 시각은 확연히 다르다. 아핏차퐁이 정글 속에서 유영하는 사이 인간 주체를 정글이라는 사물의 질서 속에 흩어놓으며 해체한다면, '제리'의 거스 반 산트는 서구 남성 자아의 대명사 오딧세이의 항해 일지를 돌연 미국의 사막에 옮겨놓는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사막은 제리라는 인간 주체에게 시련을 더하고 매순간 고통을 던지는, 매혹적이되 위험한 타자인 것. 제리와 사막은 융합되지 못한다.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는 예리한 통증이 이 영화에 담겨 있다. 평화롭게 구름이 흘러가고, 끝없이 펼쳐진 광대한 사막에서 제리는 헤매고, 죽고, 살기를 반복하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파인딩 포레스트를 끝으로 상업영화와 결별한 듯한 제스추어로 '제리'와 '엘리펀트'를 들고 인디적 감수성으로 귀환한 거스 반 산트.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참패를 겪은 '제리'는 지금 소수 아트 하우스 팬들을 거느리며 새로운 기운으로 부상 중이다. 당신이 이 고통스러운 롱테이크의 향연을 버틸 수만 있다면, 침묵과 사막의 소리로만 짜여진 100여 분의 여정을 무난히 끝마칠 수 있다면 놀라운 체험을 한 소년의 눈빛을 띠게 될지도 모르겠다.

'제리 Gerry'는 제리의 여행담에 관한 영화다. 똑같이 제리라 불리우는 두 청년이 자동차로 사막을 횡단하다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사막에 버려진다는 내용이다. 끝도 없는 사막을 도보로 가로질러야 한다. 서로 말도 없이 침묵 속에서 고통스럽게 사막을 걸어가는 제리와 제리에게 남은 건 공포와 두려움. 거스 반 산트는 4분, 5분짜리 롱테이크로 이들의 여정을 담담히 따라간다. 마침내 제리가, 죽여달라는 친구 제리의 목을 졸라서 죽인다. 하지만 이내 눈에 들어오는 고속도로.

벤 에플렉과 맷 데이먼은 동성애자설이 나돌 정도로 극진한 우정을 과시하곤 한다. 벤 에플렉의 친동생 커시 에플렉과 맷 데이먼이 이 영화에 출연한다. '굿 윌 헌팅'으로 스타덤에 올려준 거스 반 산트 감독은 맷 데이먼에게 은인. 시나리오는 세 명이 함께 썼다. 의기투합해 사막 안에서 프랑스 돈을 끌여들여와 저예산으로 인디영화를 찍은 흔적이 역력하다.

기실 이 영화는 서구 남성 자아에 대한 불안을 외딴 불모지를 타자 삼아 표현하는 기존 문예적 전통을 답습하고 있다. 가장 가깝게는 조셉 콘라드의 '문명의 전초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게다. 두 남자가 식민지 어느 곳에서 배를 기다린다. 배는 오지 않는다. 이들이 현재 발딛고 있는 문명의 전초지는 구원의 빛이 닫혀버린 지옥이다. 이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한다. 이렇게 고통이 단말마를 향해 그들을 옥죄자 단지 설탕 한 숟가락 때문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자신마저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곧이어 배가 들어온다.  

뻔한 내용을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솜씨 때문에 우리는 거장을 호출하곤 한다. 단언하건대, 난 거스 반 산트가 또다시 헐리우드 상업영화에 매진하지 않는다면 곧 거장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 장담한다. 스테디 캠과 두 배우와 함께 사막에 들어가, 느리디 느린 호흡으로 두 남자지만 한 남자이기도 한 제리의 내면을 사막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차분히 응시하는 이 영화야 말로 길을 통해 계급과 섹슈얼리티의 정체를 탐색했던 '아이다호'의 진정한 철학적 업그레이드 영화라 말하고 싶다.

굿!

2004-12-28






개봉할 가능성 제로.
갖은 수단을 구해서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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