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김혜정님은 부산여성성적소수자인권센터(www.womcenter.org)에서 활동하는 레즈비언인권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동성애 바로알기’ 강의를 다니면서 성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주로 다른 사람들의 예를 든다. 그것은 나의 레즈비언 정체화 과정이 레즈비언 일반의 경험과는 다른 특수성을 갖기에, 강의를 듣는 사람이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소위 ‘선택’의 부분. 내가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한 과정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사람들이 “그래, 페미니스트들이 남자를 싫어하고 여자들끼리만 있다 보니까 저렇게 되는 거야”라는 식의 기존의 오해를 강화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들려줄 때는 항상 조심스럽다.
‘남이 보는 나’에서 ‘내가 보는 세상’으로
학교 언론사 활동을 하고 있던 대학 2학년 때, 여성운동을 접할 기회가 생겼다. 여러 가지 자료들을 읽으면서 머리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 동안 내가 사실이라고 여기고 보아왔던 것들이 남성중심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교하게 짜여진 신기루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여성운동을 시작하면서 특별한 친구들을 많이 갖게 되었다. 우리들은 우리가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한 세상에 대해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개인적인 경험들과 상처들을 함께 나누었다.
나는 여성운동을 하면서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 내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남이 보는 나’보다 ‘내가 보는 세상’에 더 주의를 쏟게 되었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술만 마시면 폭음을 하고 펑펑 울곤 했던 버릇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세상이 명료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레즈비언’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그 때쯤이었던 것 같다. 당시 레즈비어니즘을 내 성정체성과 연관시킬만한 인상적인 텍스트를 접한 건 아니었다. 그저 영화 <더월2> 정도? 그리고 가끔 서울에 가서 대학 여성운동을 하는 친구들을 만날 때 레즈비언이 굉장히 많고, 그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것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난 내가 레즈비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떤 직관처럼 그런 느낌이 들었다. 당시까지 난 제대로 된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혹시 내가 바이섹슈얼(양성애자)이 아닐까’정도로 생각했을 무렵, 남자를 사귈뻔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남자의 철없음으로 인해 연애는 불발로 끝나버렸다.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겪은 ‘현실’들
그 후 나는 인터넷에서 부산지역의 레즈비언 동호회를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그 모임의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게 됐다. 난 그 모임의 회원가입서의 성정체성 기재란에 ‘바이’라고 적었었다. 여자를 사귀어본 경험은 없지만 사귀고 싶고, 남자랑은 연애 비슷한 거 한 두 번 해보았다 실패했으니, 아직 레즈비언으로 나 자신을 규정하기엔 자신이 없었다.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지금의 파트너를 만났다. 정식 연애는 내 생애 최초의 경험이었다. 교제를 시작하면서 너무나 행복했다. 교제나 연애는 사람들마다 다른 의미를 두는 것이겠지만 나는 안정적인, 그리고 친밀감의 정도가 심한(?) 우리의 관계가 좋았다. 내 평생에 이토록 거리감이 없고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집을 구해서 함께 살기 시작했고, 이제 함께 산 지 3년이 되어간다. 내가 레즈비언으로 생활한 지 3년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레즈비언에게 그렇지 않겠느냐만 나에게 ‘레즈비언 정체성’은 하나의 선택이었다(레즈비언인 것과 레즈비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정치적’ 선택은 아니었다. 나는 정치적 결단으로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만큼 목적의식적인 인간도 아니고, ‘레즈비언 정체성’은 목적의식적으로 선택해야 할 만큼 이상적이기만 한 것도 절대 아니다.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과 레즈비언이 되는 과정은 함께 맞물려 있었지만, 실제로 레즈비언으로 살면서 나는 즐거움과 함께 고통도 감수해야 했다. 교제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친언니의 아기 돌잔치가 있었다. 내 친언니는 결혼을 일찍 한 편이라 벌써 두 번째 아이 돌잔치였는데, 친언니와 형부를 잘 아는 모든 사람이 와서 아이의 건강을 축복하고 행복을 기원해주는 모습을 보고 가슴 한편이 싸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앞으로 할 사랑은 저렇게 사람들의 축복을 받지도 못하며, 축복을 받기는커녕 들키지 않도록 노력하며 숨겨야 하는 관계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이 되는 기쁨 속에서 내가 잊고 있었던 현실인식이 하나씩 찾아왔다. 우리가 같이 살 집을 구했을 때, 내가 발품 팔아가며 힘들게 구한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트너의 어머님이 이사를 도우러 와 계셔서 나는 이사하고 일주일가량은 친구 집에 얹혀서 생활했다. 그 일주일은 너무나 서글펐다. 내 반려자와의 관계를 숨겨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우리의 관계를 인정 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 컸다.
또한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는 현실에서 당당한 존재일 수는 없었다. 페미니즘 이론 한 켠에만 있는 레즈비어니즘, 그리고 여성운동 내에 존재하는 호모포비아로 인해, 여성운동가로서 다른 여성운동가에게 내가 레즈비언임을 항상 밝힐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받는 소외의 경험은 그 상처가 더욱 클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재 레즈비언으로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다. 그것이 내가 농담 식으로 가끔 이야기하는 “진짜(파트너)를 만나서이기 때문”인지, 레즈비언의 이중의 억압에 대한 강력한 오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레즈비언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레즈비언이 되는 기쁨과 함께 고통도 끌어안고 극복해 나가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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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혜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