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산영화제 한국영화 부문은 충무로 바깥에서 만들어진 디지털 장편영화에 주목한다. 신선한 감수성과 도발적인 연출력으로 주류 상업 영화에 자극을 불어넣는 ‘앙팡 테리블’이 나타났다.
신성일의 행방불명
신재인 | 크리틱스 초이스 | 103분 | 한국 | 2004
이제는 ‘신재인표 인물’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식욕이 죄로 취급받는 고아원에서 아무리 밥을 굶어도 토실토실 살이 찌는 소년 성일은 신재인 감독이 일찍이 단편들을 통해 보여 줬던 기이한 인물들과 맞닿아 있다. 볼펜이든 지우개든 뭐든지 먹어 치우는 재주를 가진 소년의 이야기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입을 열면 모든 사람들이 빠져 죽을 만한 진실을 쏟아내는 남자의 이야기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단 2편의 단편만으로 독립 영화계의 기인이자 스타로 떠오른 신재인 감독. 그녀가 이번엔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비련의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아 첫 디지털 장편을 내놓았다. 단편보다 확장된 길이와 폭으로 돌아온 <신성일의 행방불명>은 그렇잖아도 어수선한 신재인의 세계를 더욱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원생들의 밥값을 아끼기 위해 고아원 원장은 밥먹는 일이 수치스런 것이라 가르치고, 아무리 그 말을 충실히 따라도 친구들처럼 야위지 않는 성일은 금식을 선언한다. 도저히 배고픔을 참을 수 없게 된 극한의 순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그가 밥먹는 모습을 날개로 가려준다. 신재인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괴이한 인물과 막가는 이야기가 금기와 억압, 은유와 상상을 통해 날개를 단다.
귀여워
김수현 | 새로운 물결 | 115분 | 한국 | 2004
아파트는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서울 황학동 한복판의 낡은 집, 사이비 점쟁이로 한 시절을 풍미하며 차츰 늙어가고 있는 아버지와 각각 엄마가 다른 세 아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형과 동생, 아버지와 아들은 그 여자 길거리에서 뻥튀기를 팔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 불명의 여인 순이에게 모두 은밀한 마음을 품는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해 한바탕 소동극을 벌이는 유쾌한 영화. 한국 사회의 상투적인 윤리관과 충무로 상업 영화의 판에 박힌 드라마에 일격을 가하는 야심찬 데뷔작이다. 뜻밖에 배우로 돌아온 장선우 감독의 아버지 연기와 네 남자를 단번에 홀리는 예지원의 능청을 기대해도 좋다. 드물게 신나는 해학과 신명 덕분에 에밀 쿠스투리차까지 연상시킨다는 찬사를 듣고 있다.
양아치 어조
조범구 | 한국영화 파노라마 | 100분 | 한국 | 2004
전망 없고 능력 없는 익수와 친구들은 당장 강북 동네를 벗어날 방법이 없다. 로또라도 당첨되지 않는 한 신분 상승의 유일한 기회는 유산뿐이다. 뜻밖에도 행운을 주는 건 익수 어머니의 교통사고. 죽음을 슬퍼하기보단 보험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에겐 더 중요하다. 그는 멋진 인생을 꿈꾸지만 돈은 쉽게 사라지고 우정도 금세 변한다. 입에 밴 욕설과 은어 등 양아치 ‘어조’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장마> <어떤 여행의 기록> 등의 단편으로 알려진 조범구 감독은 충무로 상업 영화의 바깥에서 첫 장편 <양아치 어조>를 만들며 ‘하류 인생’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담아냈다. “경험의 대부분은 실패의 기록이고, 실패를 해도 사람은 성장한다”는 생각이 영화를 만들게 한 원동력이다.
동백꽃 프로젝트-보길도에서 일어난 세 가지 퀴어 이야기
이송희일, 최진성, 소준문 ㅣ 90분 ㅣ 한국 ㅣ 2004
동백꽃으로 이름난 남해의 섬 보길도. 붉은 동백꽃이 피어 오르던 지난봄, 3편의 단편이 그곳에서 촬영됐다. 독립 영화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이송희일 감독과 최진성 감독, 그리고 첫 단편을 연출하는 소준문 감독 세 명이 각기 동백꽃과 섬을 둘러싼 세 가지 동성애 이야기 <김추자><동백아가씨><떠다니는 섬>을 만들어 <동백꽃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것. “한국에서 퀴어로 산다는 것의 난제를 재확인하기 위해 이번 프로젝트의 배경을 ‘섬’으로 삼았다”고 밝힌 이들은 각각의 단편을 통해 남성 동성애자들의 삶과 사랑 이야기를 자신의 개성으로 그려냈다. 본디 한국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1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기획됐던 작품. 퀴어 옴니버스영화지만 한 편의 장편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안겨준다.
김영 기자
출처 : FILM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