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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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보이 2004-06-28 19:4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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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콘 사토시 (2001)
각본 : 콘 사토시, 무라이 사다유키
음악 : 히라사와 스스무
제작 : 매드하우스


사랑은 시지푸스 운동과 같은 걸까? 천 년 동안이나 얼굴도 모르는, 사랑하는 남자를 좇아 무작정 내달리는 여자의 이야기는 마지막 시퀀스에 물씬 묻어나는 허무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콘 사토시 감독은 전작 '퍼펙트 블루'에 이어 '천년여우'로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마련했다. 또한 '천년여우'는 2001년에 일본 영화가 거둔 탁월한 성과이기도 하다. 부천영화제(퍼펙트 블루)와 부산영화제(천년여우)에서만 소개되었을 뿐,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개봉되지 못하고 있다.

콘 사토시 감독이 그려내는 여자 주인공들은 심연이 보이지 않는 어떤 모호한 대상에 대해 강렬한 집착을 보이지만, 아울러 탈속한 듯한 가벼움마저 가지고 있어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캐릭터를 보유하고 있다.

배우로서의 전성기를 한껏 누리다가 돌연히 모습을 감춘 전설 속의 여배우 후지와라 치요코. '연꽃'이라는 영화 제작사의 직원 둘이 그녀에 관한 다큐멘타리를 찍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그녀를 찾아간다. 결코 늙지 않으리라 여겨졌던 그녀는 이미 팔십 노인이 다 된 채다.

영화사 직원은 왕년의 대배우 치요코에게 그녀가 돌연히 모습을 감추기 직전에 잃어버렸던 열쇠를 건네준다. 인터뷰에 대한 댓가다. 영화는 인터뷰 내용을 따라가는 식으로 진행되지만, 콘 사토시 감독은 인터뷰어 두 명을 회상 장면에 직접 등장시켜,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허무는 전략을 취한다.

치요코가 영화 배우가 되고 그간 수많은 영화들을 찍었던 단 하나 이유는 사랑을 찾기 위해서다. 그녀가 학생이었을 때 우연히 길에서 만나 목숨을 살려준 반전주의자를 단번에 사랑하게 된 그녀는, 반전주의자가 준 열쇠를 다시 그에게 돌려주기 위해, 한눈에 사랑하게 된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만주에서부터 우주까지 계속해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가 찍은 모든 영화의 주제는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서'다. 치요코는 그녀가 막부시대 이전의 게이샤였을 때도, 메이지 유신의 여성이었을 때도, 패망한 일본의 여성이었을 때도 늘 사랑을 찾아 끊임없이 어디론가 달려가는 여성으로 분한다. 그녀는 결코 늙지 않는다. 사랑을 찾지 못하는 한, 열쇠를 건네주지 못하는 한.

마치 관금붕 감독의 '완령옥'처럼, '천년여우'는 여배우의 실제 감정과 영화 속의 주인공간의 관계를 탐색하듯 현실과 영화를 계속 번갈아 변주하며 치요코의 사랑에 대한 갈망을 추적해간다. 그러나 남자는 이미 일제시대 때 고문으로 죽었다. 남자는 죽었지만 치요코는 그 사실을 모른다. 아니 안다해도, 그녀는 마지막 죽을 때까지 사랑을 찾아서,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를 찾아서, 사랑은 어쩌면 '부재와 흔적'에 대한 집착일지도 모른다는 헛헛한 깨달음마저 질끈 비웃으면서, 남자가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사랑을 노래하는 자신의 영화를 봐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우주 어디라도 샅샅이 뒤져서라도 그를 찾겠다는 정열의 끈을 놓지 않는다.

페시미즘이 고양되어 끝내 흩어지게 되면 그 끝의 언저리에 묻어 나는 건 어떤 숭고함이다. '천년여우'는 우주 여행 씬에서 우주 여행 씬으로 끝난다. 영화는 내내 일본열도의 지진으로 흔들리며, 치요코는 관동대지진의 날 태어나고, 지진이 일어났을 때 사랑의 진실을 깨달으며, 지진이 일어나는 순간에 마지막 숨을 토한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 그건 실체 없는 사랑에 대한 강렬한 염원이 우리네 세상사와 우주의 원리일지도 모른다는, 아주 오래된 격언이다.

치요코의 사랑에 대한 시지프스 운동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코믹한 요소와 역사적 재미까지 정교한 장치로 동원하는 콘 사토시 연출력이 범상치 않다.


P.S

작년 여름에 쓴 글입니다. 천년여우가 개봉된다길래 권유의 뜻으로 여기 올립니다.
출처 : sohappy.or.kr

'퍼펙트 블루'는 폭력성이 논란이 되어 그간 한국에 개봉되지 못했었습니다. 얼마 전에 무삭제판 DVD로 출시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출시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천년여우가 개봉되는군요. 아주 훌륭한 애니메이션 작품입니다. 2003년에 제작된 세 번째 애니메이션 '동경대부'에 관해서도 나중에 시간 되면 소개해드리죠. 전주영화제에 소개되어 관객들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또, '동경대부'의 주인공 중 한 명이 게이이기도 합니다. 저 개인적으론 '천년여우'가 가장 좋습니다.



어글리 2004-06-30 오전 07:12

퍼펙트 블루 최근에 개봉하지 않았나요? 이 에니메이션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천년여우도 무척 기대하고 있습니다. ^^

모던보이 2004-06-30 오전 09:05

5월 달에 개봉한다더니 개봉했던 모양이군요. 무삭제 DVD 이야기 나오길래 전 또 무산되었나 했지요. 천년여우, 재밌어요.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