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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들 묻곤 한다.

보길도는 땅끝 마을 해남과 제주도 사이에 있는 섬이다. 윤선도는 제주도 귀향길에 그 섬의 아름다운 풍광에 이끌려 그곳을 '낙원'이라 부르며 정주했었다. 그이가 만든 정원이 곧 '세연정'이다.

이렇게만 이미지화하면 이뻐 보이겠지만, 윤선도 '세연정'에는 삶의 비극이 드리워져 있다. 귀향 온 윤선도 때문에 당시 보길도에는 원성이 자자했었다고 한다. 유배당해도 양반이었던 윤선도는 아름다운 자신의 정원을 만들기 위해 보길도 서민들을 '부역'시켰으며, 젊고 아름다운 처녀가 있는 부모들을 바짝 긴장시켰다고 한다.

왜 하필 보길도야?
하고 사람들이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산악인들에게 '왜 저 높은 산을 오르려고 그래?' 하고 물었을 때 그들이 짓는 희미한 미소처럼 난 늘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이미지는 종종 구두 언어로 정리되지 못할 때가 있다.

조악하기 짝이 없는 제작비는 요즘 날 고통스럽게 한다. 지금 토요일 새벽이지만 우리 스텝들은 그 조악한 제작비의 한계수위를 넘지 않기 위해 신촌으로, 구리시로 뛰어다니고 있다. 나 역시 오후 내내 자존심 따위를 벗어던진 채 '저렴'의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전화를 돌려야만 했다. 신용불량자가 된 지 오래인지라 긁을 카드가 없는 게 한스러울 뿐이다. 지금은 제작비 수치와 돈 숫자로 가득찬 어지러운 머리로 콘티 하나라도 쥐어짜기 위해 책상 앞에 앉은뱅이 자리를 하고 있다.

하기는 저번 주에는 이 프로젝트를 엎을까 했다. 나 때문에 어디선가로부터 주문에 이끌려나온 40여 명의 이성애자 스텝과 배우들에게 못할 짓이었다. 한 명은 아예 울먹이며 니들 너무 하는 거 아냐? 차라리 내가 깡통 들고 너네 게이 바 돌아다니며 앵버리짓이라도 할께 하고 말하기도 했다. 프로듀서랍시고 앉아 있는 나에게 '제 영화는 사운드가 중요한데, dat 쓰면 안 돼요?'라고 침울하게 눈을 반짝이는 준문이를 보고 있는 것 역시 고통스럽다. 그는 첫 영화고, 되도록이면 좋은 여건에서 서포트하고 싶었는데, 늘 이런저런 타박만 늘어놓는 내가 밉고 화가 나기도 한다.

그들은 정당했고, 나는 비겁했다. 앞으로 십 년 후까지는 동성애자 단체와 관련해서 영화를 만들지는 못할 것 같다. 아직 우리는 욕심에 비해 준비할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기적이라는 게 존재하는가 보다.

요즘 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짓'이란 표현을 자주 쓰고 있다. 충무로에는 이런 속담이 하나 있다.

"너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 알아?"
"..... 뭔데?"
"연출부한테 시키면 되지."

그만큼 연출부의 힘과 고통은 괴력을 발휘하곤 한다. 우리는 2주도 안 되는 준비 기간 동안 스텝을 구성하고 배우 캐스팅 완료라는 '번개불에 콩 튀어내는 신기'를 만들어냈다. 오늘은 내 운동화에서 하도 냄새가 나서 신발 밑창을 빨아버렸다.

하긴 세월이 많이 달라졌다. 99년 당시 '슈가힐'을 만들 때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도망치던 배우들의 모습은 구닥다리 사진관 윈도우의 사진처럼 아련하기만 하다. 요즘 대학로 배우들은 훨씬 더 유연해졌고 능동적이다. 설핏 캐스팅 때문에 걱정했는데, 다행히 캐스팅이 완료되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기도를 해야 한다. 3월 23일 날 새벽까지 소위 '빵구'가 나지 않도록 빌고 빌어야 할 것이다. 번개불에 콩 튀어내는 신기, 그 살얼음판이 깨지지 않도록 빌고 빌어야 한다. 2주도 안 되는 준비기간이란 데미지를 뛰어 넘어 그냥저냥 볼 만한 영화가 나오길 빌고 또 빌어야 한다. 준문이가 dat를 쓸 수 있게 사정이 호전되도록 빌고 빌어야 한다.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보길도에 도착하고 떠날 수 있도록 빌고 또 빌어야 할 것이다.

난 지금 콘티를 막 그릴 참이다. 왜 하필 보길도야? 라는 질문을 다시 하기 시작한 게다.

[3월 21일]


p.s

David Darling-Minor Blue

현재 들리는 곡입니다. 제가 연출할 작품의 테마곡으로 사용하기 위해 고심해서 고르고 있는 세 곡 중 한 곡입니다.



홈페이지 : http://gondola21.com/bogil/index.htm

막달리나 2004-03-21 오후 12:18

눈물이 핑 도네요. 괜스레 그간 연애한답시고 게으름 폈던 것도 죄송스럽기만 하고.
정신 바짝 차리고, 흡족한 결과물로 지금의 한숨들이 한큐에 날아가 버렷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황무지 2004-03-21 오후 17:22

그렇구나.. 그랬구나... 영화 한 편 만들어 내기 위해 저리 가슴 쓰려 하고 울분을 삼켜야 하는 거구나.. 그랬구나....... 그래서 내가 보는 그 영화들이 그리 가슴 저리는 감동처럼 다가 왔던 거구나....

힘내요... 당신이 있기에 .. 우리의 영화가 있을 수 있었던 겁니다.. 힘내서 멋진 영화 만들어 주세요.. ^^

......... 근데, 이성애자 스탭.. 멋진 남자도 있던데요~ ^^;;;;;

황무지 2004-03-21 오후 18:01

덴당~!! .. 후원금 결제가 않된다고 하네요~!!!... 그 사이트가 불안하다고 하더니.. 오늘 해보니 정말 그렇네요..
차라리 은행 계좌로 입금을 시키거나... 다른 사이트를 이용하게끔 하는 게 어떨까요.??

라이카 2004-03-23 오전 00:56

많은 도움 드리지 못해 늘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부디 별 탈 없이 촬영을 마치시길 바라고 또 원하시는 작품이 빠지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기즈모 2004-03-23 오전 09:00

힘을 내요... 미스터 리....
데이빗 달링 잘 들었어요,... 첼로인거 같은데...
음반을 찾았보니 오래되었두만요..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