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돌 맞은 ‘퀴어 퍼레이드’ 1500여명 유쾌한 소통
1회 때 50여명에서 10회 1500여명 참가, 사상최대
하니Only 허재현 기자
» 13일 청계천 일대에서 10회 ‘퀴어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1500여명의 시민들이 행사에 참가해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현장]열돌 맞은 퀴어 퍼레이드   

50여 명에서 시작했던 퍼레이드
올해 1500여 명 참가, 사상 최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받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사회의 ‘성 소수자’들이다. 지난 13일은 그들이 한 해 딱 한번 세상 바깥으로 당당하게 고개를 내미는 날이었다. ‘퀴어 퍼레이드’가 벌어진 이날 서울 청계천 일대는 성 소수자들의 행진으로 도심 하늘이 무지개 빛으로 물들었다.


 국내 성 소수자들의 문화 축제인 ‘퀴어 퍼레이드’가 열 돌을 맞았다. 해마다 축제가 열리는지 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느새 성 소수자들 사이에선 가장 큰 축제로 자리 잡았다. 10년 전 50여 명의 참가자들로 시작했던 초라하고 수줍었던 퍼레이드가 이제 1천 여명이 넘게 참가하는 성 소수자들의 가장 큰 축제가 되었다. 그래도 1만 여명 이상이 참가해 세계 최대 규모로 치러지는 호주의 ‘마디그라 성 소수자 축제’의 십분의 일에 불과한 규모이지만, 국내 ‘퀴어 퍼레이드’는 나날이 참여자가 늘고 있다. 올해엔 1500 여명이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김현구 퀴어문화축제 기획단장은 “우리나라처럼 성 소수자들에게 인색한 사회에서 10년 동안 행사를 열었다는 것 자체가 기쁘다”고 말했다.

  

촛불집회처럼 청소년 동성애자들 적극 참여
조승수 의원 “차이가 차별되지 않도록 노력”
 

 올해 퍼레이드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청소년 성 소수자 참여가 활발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불편한 시선을 견디지 못해 성인 성 소수자들도 퍼레이드 참여를 꺼리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풍경이다. 촛불집회에만 청소년들의 참여가 두드러진 것이 아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들은 퍼레이드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엔 이십 여명의 청소년 성 소수자들이 따로 행사장 한쪽에 부스까지 마련했다. 청소년 성 소수자 모임 ‘Rateen‘에서 활동하는 이민기(19·서울 외국인고등학교)군은 “우리가 이렇게 (거리에) 나와줘야 청소년 동성애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준다”고 말했다. 이들은 행사 시작 전부터 이성애자 중심으로 그려진 교과서의 삽화 등을 전시하며,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교과서 내 성 소수자 차별 금지’를 주장했다.  

 정당 참여도 눈에 띄었다. ‘성 소수자 정책’을 내놓고 있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따로 부스를 차렸다. 진보신당 성소수자위원회는 ‘퀴어한 노동권’이라는 손팻말을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지난해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 ‘커밍아웃 정치인’ 최현숙씨는 “많은 성 소수자들이 직장 내에서 당당하게 커밍아웃하지 못하고 있다”며 “성전환자 같은 성 소수자들을 노동 현장에서 이성애자들과 똑같이 대우하는 ‘쿼어한 노동권’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노동당 곽정숙 의원과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도 행사장을 찾았다. 조 의원은 “내 몸이 소중하듯 남의 몸이 소중하다는 연대의 정신에서 소수자 이해가 출발할 수 있다”며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유쾌한 소통·질서가 뒤집힌 퍼레이드에 시민들 미소   

 퀴어 퍼레이드는 3m 높이의 베를린 장벽이 세워져 있는 을지로 2가 베를린 광장에서 시작해 청계광장을 돌아 다시 베를린 광장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1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독일인들이 정치적 차이를 허물려고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것처럼, 퍼레이드 참가자들은 성 정체성의 차이를 허물려고 서울 하늘 아래 베를린 장벽을 넘었다.  

 퍼레이드의 가장 큰 특징은 즐거움이었다. 8박자 구호와 민중가요 대신 빠른 리듬의 댄스음악이 행진대열에 추임새를 넣었다. 발랄하고 유쾌한 발걸음은 낯익은 거리행진과 분명 달랐다. 

 그러나 이들이 던지는 메시지만큼은 정치적이다. 소통의 외침이었다. 갑갑한 생활을 강요당했던 이들은 이 날만큼은 세상과 호흡하길 원했다. 한 참가자는 ‘대한민국은 퀴어 공화국이다’는 손팻말을 준비했다. ‘민주’ 대신 ‘퀴어’를 집어넣은 ‘헌법 1조’의 패러디다. 대한민국에 성 소수자들도 살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기묘하다는 뜻의 ‘퀴어(queer)’를 넣어 ‘성적 소수자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회는 이상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주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윗옷을 벗었다. 맨살을 햇살 아래 드러낸 채 즐겁게 춤을 추며 행진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다. 한 참가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누드는 프리덤(자유).”

이들 행진 대열이 지나는 짧은 순간 청계천 일대를 찾은 시민들도 기꺼이 이들의 비상식적인 행진을 즐겼다. 낯설지만 유쾌한 그들의 퍼레이드를 지켜보며 시민들의 안색은 무지개 빛깔로 물들었다.

» 한 참가자가 ‘대한민국은 퀴어 공화국이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 독특한 복장을 한 퍼레이드 참가자들이 트럭 위에 올라 시민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퍼레이드 마친 참가자들 “가슴이 벅차오른다”  

 행진을 마치고 이들은 다시 베를린 광장으로 돌아와 폐막행사를 했다. 퍼레이드를 마친 참가자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자원봉사자 제이디(23)씨는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동성애자들이 이번 퍼레이드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송아무개(21)씨는 “행진을 하면서 내 정체성을 다시 확신하게 되어 좋았다”며 “가슴이 벅차오르고 후련하다”고 말했다. 존재를 드러낸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행복해 하던 이들은 한참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날 행진에 참여한 배우 홍석천씨는 아직 성 소수자들에 낯설어하는 이성애자들에게 부탁했다. “낯선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번 퍼레이드가 (성적 소수자들이) 별반 다를 게 없는 우리 이웃이라는 것을 (일반 사람들이)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 13일 청계천 일대에서 10회 ‘퀴어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1500여명의 시민들이 행사에 참가해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퀴어 발걸음’ 십 년… ‘퀴어 인권’은 얼마나 걸어왔나  

 성 소수자들이 당당히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유일한 공간인 ‘퀴어 퍼레이드’. 이 행사가 올해로 열 돌을 맞았다.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들’이 세상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지 십 년이 된 셈이다.

십 년 동안 진행된 ‘퀴어 발걸음’. 이들이 남겨온 발자국만큼 성 소수자의 인권 수준도 앞으로 나아갔을까. 한국 사회에서 성적 소수자들이 처한 현재와 당면한 과제는 무엇일까.

 

 “10년 동안 (성 소수자를 둘러싼 환경이) 좋아진 것은 분명하죠. 하지만 체감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대표는 지난 10년을 ‘반쪽짜리 개선’으로 평가했다.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에 성 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각인시킨 것은 큰 성과이지만 “본래 우리 사회에서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간접적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간접적 수준에서 보자면 문제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직접적이지는 않았다. 이란 등 이슬람권 국가들처럼 동성애 행위를 두고 처벌하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사회가 동성애에 관대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동성애 존재 자체를 무시해왔던 관습 때문이라는 것이 성 소수자 사회의 일반적 견해다. 때문에 한 대표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 차별보다 간접적인 차별 수준을 놓고 우리 사회를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성애 친목 모임의 수가 증가하고, 동성애가 사회 이슈의 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 것은 성과이지만 가정, 직장, 동료 사이에서의 간접적 차별과 편견은 여전하기에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 한 대표의 견해다. 

 이와 연계해 제도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과제들도 산적한 상태다. 한 대표는 “남·녀 배우자가 결합한 형태의 가족을 구성하지 않는 성적 소수자들에게 걸맞은 ‘가족 제도’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 사회의 256개 법에서 ‘배우자’와 관련한 조항을 두고 있지만 ‘사실혼’ 관계를 인정하는 법은 거의 없다”며 “혼인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의 박탈당하는 권리들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방송인 하리수씨를 계기로 높아진 트랜스젠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제도적 장벽을 허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2002년부터 수년간 국회에서 논의되어 왔던 ‘성전환자 성별변경 특별법’은 한 번도 통과되지 못하고 폐기되기를 반복하고 있다. 현재는 성별을 바꾸려는 사람이 법원에 호적 정정을 신청하고, 법원에서 이를 받아들여야만 호적상 성별변경이 가능하다. 개인의 성 결정권이 판사의 재량권에 맞겨져 있는 셈이다. 

 군대 내 동성애자 처벌 문제도 시급한 개선 대상으로 지적된다. 현재 군에서 동성애 문제가 발생하면 ‘군형법 92조’는 당사자들에 대해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이 조항이 강제적 동성애만 처벌하도록 한 것인지, 자발적 동성애까지 처벌하도록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처벌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실제 1999년부터 2007년까지 육군에서만 비강제적 동성애 행위 6건이 군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때문에 ‘군 관련 성소수자 네트워크’는 지난 8일 헌법재판소에 ‘군형법 92조’의 위헌 결정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최근 보수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성 소수자 인권 개선 움직임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행동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성 소수자들이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민 지 10년째에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풍경이다. 성 소수자들은 이런 움직임에 압력을 받아 국가인권위원회가 성적 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친구사이(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의 박기호 활동가는 “보수 기독교 단체의 ‘반동성애 시위’가 국가기관에 압력을 넣은 것이 차별금지법 조항에 성적 소수자 부분이 삭제된 계기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무관심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성적 소수자 문제가 논쟁의 영역으로 재등장하고 있는 것도 성적 소수자 사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가 되고 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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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09-06-14 오후 10:06:07 기사수정 : 2009-06-15 오후 01: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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