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그의 눈에 물기가 살짝 비쳤다.
더 미안해진다.
내가 손을 더 꼭 잡았고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이 된다.
그의 손을 잡은 내 손이 따뜻하기를 바랬다.
그의 집은 가운데 마루가 있고 양 옆에 방이 한개씩 있는 전형적인 시골집이었다.
작은 마당에는 수도가 있고, 안방 옆에 부엌이 있는.
안방에는 불이 꺼져 있었지만 작은방에는 불이 켜 있었다.
대문을 여는 소리에 작은방에 있던 둘째가 나오며 우리를 맞는다.
낯선 방문객인 나를 보는 동생에게 그는 말했다.
"내 팬이야."
ㅎㅎ 그랬다.
난 그의 팬이었지.
둘째가 뭔 소리냐고 묻자, 그가 나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한다.
이해가 되었는지 관심이 없는지 둘째는 얼른 씻고 자라며 들어 간다.
쌀은 자기가 씻어 놓았다는 둘째의 말에서
이들의 생활이 드러난다.
안방에는 초등학생쯤 보이는 막내가 자고 있다.
막내는 누가 왔는지도 모르고 곤하게 자고 있다.
미남은 막내가 깰까봐 불도 켜지 않고 내게 자기 티셔츠와 추리닝을 건넨다.
달빛으로 보이는 방은 깨끗했다.
한쪽 벽에는 빽판(청계천 등지에서 파는 불법 LP판)과 책들이 있고
한쪽엔 책상과 농이 있고.
"먼저 씻을래?"
그러마고 나섰다.
욕실이 따로 있을리 없다.
마당 수도가에 빨간다라이가 있고 그 옆에 비누와 대야.
가을 밤의 한기가 싫었지만 아무 말 없이 씻을 수 밖에.
마루에 걸터 앉아 하늘을 올려다 보니 별이 꽤 많다.
당시에 신장은 공기가 서울보다 맑아서 별이 많이 보였더랬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있으려니
그가 커피를 건넨다.
미남의 센스.
커피믹스에 뜨거운 물 부은 것이 고작이지만
왠지 커피처럼 그가 따뜻하다.
미남, 담배에 불을 붙여 건네 준다.
둘이 그렇게 대청마루에 앉아 있다.
"우리 이렇게 살아."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잘 떠오르질 않는다.
"별이 엄청 많아요."
딴소리를 하는 내게 그가 오른팔을 뻗어 어깨를 감싸준다.
담배냄새와 어우러진 그의 체취가 느껴진다.
그의 가슴에 대고 심호흡을 해본다.
그의 팔에 살짝 힘이 들어 간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때 그가 말했다.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어."
그의 눈에 물기가 고인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 진다.
그가 내 눈의 눈물을 닦아주며 조심스럽게 뽀뽀한다.
살짝 작은 방을 본다.
다행스럽게 불이 꺼져 있다.
눈을 감고 그의 얼굴을 만진다.
그가 더 용기를 낸다.
그를 받아 들인다.
그렇게 가을 밤이 깊어 간다.
아침이 되었고 내가 분주하다.
내 속 깊숙히 자리 잡고 있던 하녀가 전면에 배치되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준다.
길도 잘 모르면서 가겟집에서 두부며 야채를 사온다.
찌개를 끓이고 호박을 볶고 어묵을 졸인다.
고등어도 한마리 무를 넣고 졸여 내고 김도 기름을 발라 구워 낸다.
언제 일어 났는지 둘째가 부엌을 어슬렁 거린다.
아침은 내가 할테니 어서 씻으라면서 등을 떠다밀었다.
오빠부대로 밤늦게 찾아와서는 아침밥을 해대는 꼴을 둘째는 어떻게 보았을까?
어느새 한상이 가득하다.
밥상을 나르며 셋째가 둘째에게 나에 대해 묻는 것 같다.
둘째가 뭐라 하는데 잘 들리지 않는다.
안방에 상을 놓고 4형제가 빙 둘러 앉는다.
미남과 셋째가 닮았고 둘째와 막내가 닮았다.
맛나게 먹어 주는 그들이 고맙다.
막내가 너무 허겁지겁 먹으니까 둘째가 내 눈치를 보며 야단 친다.
둘째는 어른스럽고 셋째는 무뚝뚝해 보인다.
싸놓은 도시락과 숭늉을 들고 들어 오니 벌써 밥을 다 먹었다.
그런 그들이 한편으로는 귀엽고 또 안쓰럽다.
막내가 도시락 반찬을 보며 좋아라 한다.
죽지 않고 버텨 주다가 나타난 하녀가 고맙다. ^^*
동생들이 학교에 가고 설거지를 마치고
둘만 남았다.
그런데 미남 아무 말이 없다.
누가 시켜서 한 건 아니지만
어째 아무 말도 없는 그를 보니 서운하다.
어젯밤의 그가 아니다.
화는 내가 내도 모자란데 도리어 그의 얼굴이 화난 표정이다.
입은 굳게 닫혀 있고 눈은 나를 계속 피한다.
슬쩍 화가 난다.
나도 그도 말이 없이 사간만 흘러 간다.
뭐지?
뭐야?
쌀쌀한 가을 아침이 무겁다.
"나 이만 갈게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학교에 가야 할 시간이다.
"그래."
그는 아무 말 없이 앞장 섰다.
대문을 나서고 골목길을 지나도록 그는 뒤를 돌아 보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눈물이 났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니까 더 화가 났다.
"왜 이래요?"
그는 아무 말도 안했다.
정말 화가 났지만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버스가 오고
내가 맨 뒷자리에 앉았지만
그는 나를 바로 보지도 않았다.
버스가 떠난다.
차창 밖의 그는 이제서야 나를 본다.
그도 울고 있다.
그는 손도 안 들고 말도 없이 그렇게 눈물을 보이며 나를 보낸다.
아무도 없는 버스 뒷자리에서 난 엉엉 울었다.
멀리 그가 있지만 난 돌아보지 않았다.
...
어린 그는 용기가 없었고
나도 그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
그 이후에 반줄에 가지 않았다.
가끔 그가 보고 싶고
김수희 노래도 듣고 싶었지만
그를 보는 게 겁났다.
그의 눈물과
무거운 어깨와
어린 동생들이 부담스러웠는지
용기 없는 그가 미웠는지
정말 한동안 반줄에 가지 않았다.
...
반년쯤 흘렀을까?
반줄을 찾았을 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주인에게 물어 보니 군에 갔다고 했다.
그렇게 미남 디제이는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또다른 사람을 만났다.
* 후기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풀어 내는 일은 행복한 일이었다.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기억해 내기란 어려운 일이기도 했지만
글을 쓰는 동안은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했다.
지금 그 미남 디제이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말 군대를 간 건지...
다른 사람에게는 용기 내어 사랑을 고백했는지...
동생들도 잘 자라 주었는지...
혹 길가다 부딪혔는데 못알아 본 건 아닐까?
지금 다시 만난다면 그에게 말하고 싶다.
미안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