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에 대한 담론을 펼치는데에 있어서 기독교 측의 거센 반발은 항상 있어왔습니다. 이러한 반발은 신학적으로 완벽하게 입증된다기보다는, 보수와 진보로 구별되는 양대 진영 중 보수측의 입장을 신학적인 논리로 무장한 것이라고 해야겠죠. 진보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는 기독교 일부에서는 동성애 담론에 있어서 옹호의 입장을 주장하고 있는 측도 있으니까요. 양측 모두 신학적인 정당화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죠. 자신이 어떤 입장에 서있던지 신학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입니다.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이야기된 예수의 결혼이라는 명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이 소설 이전에도 예수의 결혼생활에 대한 많은 가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소개가 되어있지 않아서 그렇지, 예수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외국 신학계에서 오래전부터 논의되어왔던 주제입니다. 다빈치코드라는 소설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알려졌을 뿐이죠. 예수가 결혼했다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예수의 활동시기 30세가 넘어서도 결혼을 하지 않은 상황이 결코 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예수가 결혼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에는 한 가지 놓친 사실이 있습니다. 결혼을 당연히 해야할 상황에서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우리 주위에도 결혼할 나이를 훨씬 넘어서도 독신으로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있죠. 네. 맞습니다. 바로 예수가 동성애자라는 가정이죠. 사실 외국의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가 결혼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넘어서서 예수가 동성애자라는 과감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사람까지도 있습니다. 간단히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먼저 캠브리지 대학의 성마리아 교회 교구장 본피오르(Canon H. W. Montefiore, vicar of Great St. Mary's Cambridge)입니다. 그가 영국 옥스포드에서 교역자를 위해 연설을 하며 피력했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에 남자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하나는 경제적 여유가 없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장가갈 여자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이유 모두 예수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었죠. 예수의 경우 전도자로서의 사명감때문에 결혼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도 말이 안되는 것이 이른바 '메시아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나이 서른에 가서 세례를 받으면서였을 터인데, 그 이전에 결혼을 못할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혼연령은 훨씬 젊은 시기였습니다. 몬피오르에 의하면 결론은 한 가지, 즉 예수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드(Noel I. Garde)라는 신학자는 예수의 성의식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 더욱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예수가 '어미에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마19:12)고 했는데, 이것이 성에 대한 예수의 혐오감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왜 이렇게 성에 대해 혐오감을 갖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다가, 나중에 제자들이 생기고 그중에서도 특히 '사랑하는 제자' 요한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동성애적 성향에 눈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자기가 성 자체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혐오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성간의 성에 대해서만 그러함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그의 주장은 계속됩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동성애는 극히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런 동성애적 충동을 억제하고 부정하려 노력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도저히 억제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러 예수는 심한 당혹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체포되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성전에 가서 환전상의 상을 뒤엎는 등 소란을 피운 것인데, 그것은 마치 자신의 동성애적 경향을 발견한 미국의 청교도 젊은이들이 너무나 무섭고 혐오스러워서 죽음으로 이 문제를 청산하겠다고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가장 위험한 임무에 스스로를 내던지던 행위와 맞먹는 일이라는 것이죠.
물론 이런 파격적인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많습니다. 밀러(John W. Miller)라는 캐나다의 신학자가 발표한 <30세의 예수>(Jesus at Thirty, 1997)라는 책에서는 이를 반박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동성애자가 아닌 가장 큰 이유는 동성애 남자들의 경우 부성적인 요소를 싫어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고 기도할 정도로 '아버지'와 가까웠다는 것이죠. 하지만 밀러의 이러한 반박은 동성애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동성애자는 모두 아버지와 소원한 관계라고 쉽게 일반화시킬 수는 없고, 그렇다면 밀러의 반박은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백번 양보하여 동성애자들이 모두 자신의 아버지를 부정한다고 일반화시킨다고 하더라도 예수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닌, '요셉'과 어떠한 관계였는지가 쟁점이 되는 것이겠죠. 만약 예수가 아버지 '요셉'을 부정했다면 동성애자와 아버지와의 소원한 관계라는 도식은 오히려 더욱 잘 들어맞게 됩니다. 오히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강조는 지상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겠죠.
예수가 결혼했다, 안했다 사실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죠. 혹시 결혼을 했으면 어떻고 안했으면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이 있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결혼을 했는지 않했는지의 여부로 갈리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가 결혼을 했거나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 예수의 위대함을 부정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는 점이겠죠.
교회에서 동정녀에 대한 신화가 있는 것은 아시지요. 성행위에 대한 부정적인 전제가 있다는 뜻이죠. 결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성스러운 일을 하는 사람은 성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묵시적인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어떻게 '결혼 같은 것'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뭐, 이런 식의 반응이 나오는 것이죠. 동성애자라는 문제에서는 여기서 더욱 확대된, 하지만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조가 존재합니다. 아니 어떻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더럽고 어찌저찌한 그런 동성애자라는 주장을 할 수 있느냐... 뭐 이런 식이죠. 동성애가 그 자체로 죄악이라고 규정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동성애자라는 주장이나 학설이 엄청난 모욕으로 다가오겠죠. 다시 말해서 동성애는 나쁘다라는 전제에서는 이런 논의 자체가 그대로 신성모독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ps.다른 곳에 먼저 올렸던 글입니다. 조금 다듬고 이곳에 다시 올려봅니다.
예수와 바울 이후 왜 일단의 성직자들이 결혼을 하지 않게 되었는지 그 신학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겁니다. 기독교 초기에 마니교가 어떻게 이종배합되었는지, 이 이종배합의 신학 역사가 어떻게 예수와 신약을 재구성했는지.
그럼에도 이렇게 다양한 해석으로 전통 신학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겠죠. 유의미한 일이기도 하고요. 덕분에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