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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의사소통권리 보장을 위해 필요한 것 - 함께걸음
의사소통이라는 단어만큼 자주 쉽게 쓰는 말이 있을까. 의사소통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말 많이 듣고 말하는 단어이자 주제다. 그만큼 인간은 사...
의사소통이라는 단어만큼 자주 쉽게 쓰는 말이 있을까. 의사소통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말 많이 듣고 말하는 단어이자 주제다. 그만큼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타인의 생각과 느낌을 이해하는 수단인 의사소통은 개인의 욕구를 해결하고 공동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풀어가는 데 필수적이다. 그래서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의사소통을 잘하기 위해 애쓰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원활한 의사소통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잘 안 되는 측면이 있다. 이미 의사소통 방식이 주류 중심으로 돌고 있기 때문이다. 음성언어 중심, 표준어 중심, 비장애인 중심 등. 이 중에서도 비장애인 중심은 우리 사회 의사소통 구조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청각장애인이나 뇌병변장애인 또는 지적장애인들의 언어가 잘 전달되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니까. 수화를 공식 언어로 지정해달라는 요구나, 지적장애인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나 그림문자를 사용하라는 요구도 비장애인 중심으로 운영되는 우리 사회 때문에 생긴 요구다. 한마디로 장애인의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주류 중심의 운영, 비장애인 중심의 방식에서 비롯된다.
쟤는 의사소통이 어려워? 흔히들 ‘쟤는 의사소통이 어려워’ 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필자를 포함해 ‘나는 의사소통이 힘들어’라는 표현보다 더 잘 쓰는 말이다. ‘쟤는 의사소통이 어려워’와 ‘나는 의사소통이 힘들어’ 두 말의 차이는 뭘까? 전자는 의사소통의 중심은 나라는 점에서 매우 자기중심적 판단이다. 후자는 상대의 문제일수도 있고 내 문제일 수도 있음을 열어둔 판단이다. 결국 의사소통(방식과 내용)의 기준이 어디냐다. 기준이 누구로 설정돼 있냐에 따라 다르게 판단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장애인 중심으로 굴러가는 의사소통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상대화가 안 되고 책임은 상대편인 장애인에게 넘겨진다. 비장애인중심의 사회에서 의사소통도 비장애인 중심으로 사고하게 된다. 실제 생활에서 비장애인이 장애인과 의사소통을 힘들어하는 것도 궤를 같이 한다. 사람들은 그냥 즉각적이고 감각적으로 느끼는 어려움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의사소통 어려움’의 본질은 안중에 없다. 뇌병변장애인의 발음이 부정확해서, 지적장애인이 이해도가 낮아서 대화를 하려면 힘이 든다고 하소연한다.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장애인당사자의 문제가 원인이라고 여기는 게다. 본인들이 익숙해진 언어 습관이나 의사소통 습관에 대해 되돌아보는 이는 많지 않다. 사회적 소수자의 어려움이다. 또 ‘쟤는 의사소통이 어려워’ 라는 말은 의사소통의 상호성과 관계성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 태도다. 흔히 말하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말이 바로 의사소통의 관계성을 말해준다. 사실 상대가 실수로 부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하더라도 관계가 친밀하거나 익숙하다면 제대로 알아챌 수 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존중하겠다는 마음이 상대의 말을 듣게 한 경험을 한번쯤은 했을 테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의사소통을 흡족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장애인의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과 자원에 대해 고민하고 그걸 마련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장애인의 의사소통 권리 이렇게 상호적이고 관계적인 의사소통의 성격을 사고하지 않다보니 장애인과의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의사소통이 어려운 것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한계-어려움 때문이다. 문제를 자연화하는 순간 해결은 요원해진다. 의사소통은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하다. 사회적 소수자인 장애인들은 의사소통에서 제외되거나 자기의사를 표현하지 못해 결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곤 한다. 불이익을 당해 경찰이나 법원에 구제를 신청할 때도, 병원에 가서 아픈 곳을 진료해달라고 요청할 때도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된다. 직장을 구하려고 해도 의사소통이 안 되면 이력서 접수조차 어렵다. 얼마 전 발표회에서 장애인이 나눈 경험도 비슷했다. 한밤중에 배가 아파 119에 신고했지만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1시간 뒤 친구를 통해 접수했다고 한다. 장애인을 위한 의사소통 지원이 행정기관이나 법원만이 아니라 전 영역에서 이뤄지지 않으면 건강에 대한 권리나 법에 대한 권리, 노동에 대한 권리 등 다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다. 당사자인 장애인들이 의사소통에 관한 권리를 사회가 보장하고 필요한 지원을 하라고 외치고 싸웠다. 그 결과 며칠 전 서울시의회에서 ‘서울시 의사소통 권리증진 조례’가 본회의를 통과했다고 한다. 조례에 따라 장애인도 의사소통과 정보접근에 대한 차별을 받지 않고 필요한 편의 제공을 요구할 수 있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은 특성에 따라 의사소통 방법을 보완·대체 의사소통(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 AAC)이나 단말기 및 프로그램, 의사소통 조력인, 한국 수어 통역, 문자통역(속기), 점자자료 등 각종 편의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했다. 보완대체의사소통(AAC)은 말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말을 보완하고 대체 할 수 있는 보조기기다. 의사소통이 잘되려면 보조기기나 조력자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당사자들이 지원을 통해 자신감도 얻고 실제 어려움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걸 나누는 일이 필요하다. 낯선 것을 경계하는 사회에서 보조기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파악하는 것도 좋고, 비장애인이 그러한 보조기기 사용에 익숙해지는 것도 필요하다.
의사소통의 첫발,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무엇보다 의사소통은 상호적이고 관계적인 것이기에 기존의 인식과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익숙해진 태도를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다른 방식의 의사소통수단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불편해하거나 멀리하는 일이 종종 있다. 이길용 교수가 한국사회의 장애인 차별구조의 요인으로 동질성의 추구와 효율성의 추구라는 한국사회의 에토스(관습)를 짚은 것과 관련이 있다. 친한 친구 중에 청력이 약한 사람이 있다. 그는 오랜 동안 보청기를 사용했다. 그 친구가 보청기를 사용하는 줄 몰랐을 때는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일이 많아 속으로 번거롭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조금 친해진 후 그이는 자신은 청력이 나빠 보청기를 사용한다며, 자신과 대화할 때는 목소리를 조금 키워달라고 했다. 못 들어서 한 번 더 얘기해달라고 해도 이해해달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나를 쪼그라들게 했다. 너무 미안했다. 장애가 약점이 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장애를 드러내지 못한다. 보청기를 사용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다른 대체의사소통수단을 얼마나 낯설고 부담스럽게 여기겠는가. 그이 이야기를 들으니 내 경험이 겹쳐졌다. 청력이 낮은 나도 비슷한 일을 겪곤 했다. 대화하다 작은 목소리의 말을 놓쳐서 한 번 더 말해달라고 하면 상대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나를 비난하거나 중요한 말이 아니라며 지나가곤 했다. 여러 번 청력이 나빠 작은 목소리는 듣지 못한다고 했음에도 그걸 잊어버린 사람들이 되레 나를 핀잔줄 때 느꼈던 그 억울함과 소외감……. 그러나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나도 말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아는 이 중에 한 사람도 직장에서 동료들이 자신의 장애에 대해 고려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그는 한쪽 귀가 안 들려서 동료나 부하직원이 얘기할 때는 왼편에서 해달라고 요청했단다. 그럼에도 여전히 오른편에서 얘기하는 동료나 부하직원들이 있었는데 그러면 더 이상은 그 사람과 말하기 싫어서 얘기를 짧게 하거나 못 듣더라도 그냥 서류에 적힌 것만 봤단다. 문서에 쓰인 것 이상의 깊은 대화나 소통은 그 사람과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누가 더 손해일까. 사실 손해라고 규정하기 어렵지만 양자에게 모두 손실이지 않을까. 협조가 필요한 동료 사이에서 상대를 계속 밀쳤을 테니 서로의 기회를 차단한 셈이다. 이렇듯 장애인의 의사소통에 대한 권리는 비장애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장애에 대한 고려가 없을 때 관계도 제대로 맺기 어렵다. 장애인의 의사소통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선 먼저 익숙함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비장애인과 다른 의사소통 수단을 사용하는 걸 고려하고 내가 익숙한 방식으로 소통했던 방식을 되짚어 보면 어떨까. 내 목소리 크기는 어떤지, 말의 속도는 어떤지, 상대가 눈이 나쁜지 아닌지, 상대의 발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 등등. 진심으로 상대를 존중하며 의사소통하려 노력해보자. 그러면 작은 몸짓도 큰 목소리로 들리지 않을까. 지금은 그 친구가 보청기를 두고 오거나 보청기에 이상이 생긴 날에는 그이가 내 말을 못 알아듣고는 하지만 괜찮다. 이제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채는 사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니까. |
글씨가 작아서 정독은 못했지만,, 수용소?? 에 몰려있는 그들이 일상생활에 좀 더 많이 나올 수 있어야 하는데말이죠. 자주 봐야 서로 소통이 자연스러울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