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누구를 부르고 계시는가?
서론
당신은 레즈비언이거나 혹 게이이십니까?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계속 수치심 속에 살고 계십니까?
혹 창녀이거나 창남이십니까?
과거에 살인의 경험이 있으십니까?
마약 중독자이십니까?
윤리적으로 지탄받는 직업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당신을 여전히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누군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지옥자식이라 불렀다면 그는 거짓선지자입니다.
그것은 거짓복음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에 대한 엄청난 오해입니다.
책을 소개하며
2천 년 전 예수님이 오셨던 시대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가장 천대받고 소외받았던 계층은 바로 창녀들과 세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대부터 오랜 중세기간을 거쳐 거의 근대에 와서까지도 여자들의 인권이란 벌레만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인종차별주의에 의해 흑인들의 인권이 짐짝처럼 취급받던 시절이 지나가자, 이제는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천대하고 무시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서 사람들을 사랑해야할 의무가 있는 많은 교회들에 의해서 그런 학대들이 자행되고 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에 있는 진보주의적인 성향의 인권운동가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차별해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사실 한국 내에서, 또한 전 세계적으로도 종교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성경에 동성애가 죄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실제적으로 동성애자들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해주거나 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반박할만한 지식이 있는 분들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심지어 신앙심이 있는 동성애자들조차도 본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괴리감과 의구심을 가지면서 신을 원망하며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동성애자들이나, 천대받는 소외계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깨달았고, 동성애 자체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적으로,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뜻이었으며, 하나님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어떠한 성 정체성을 가졌던,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소위 죄라고 말하는 것들을 사람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에 사람들이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판단하며 크게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철저히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설명하려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렇게 마음이 무너지고 사람들로부터 정죄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려 아들 독생자를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벗이 되려고 오셨습니다.
스스로 건강하고 잘나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을 위해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부요한 자들에겐 예수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무한하게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사랑에는 끝도 없고 또한 조건도 전혀 없으십니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반드시 요구해야 하실 만큼 그분은 가난하거나 부족한 것이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십일조도 주일성수도 기타 수많은 보수적인 의무사항들을 사실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구약에 나타난 계약의 관계일 뿐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밝히 드러내신 신약의 예수그리스도는 그리 말하지 않습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의무로 맺어진 관계가 더 이상 아닙니다. 늘 자원하는 심령과 소원하는 만큼 드려지는 사랑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의 중심을 기뻐하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아무 조건 없이 두 팔 벌리고 계십니다.
이 책에서는 외형적인 문화, 외형적인 신앙이 만연해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마음을 다시 회복하고 산제사로 예배드리는 법을 소개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우리를 하나님의 군사로 준비시키시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실 때에 함께 동참한 여러분들의 기쁨과 감동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 더욱더 갑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책을 통해서 많은 성적 소수자 및 소외계층들, 그리고 모든 잘못된 룰과 율법에서 억압 받고 매여 있는 성도들,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는 모든 사람들이 참된 진리 안에 거하고, 자유케 될 날이 올 것을 믿으며, 저는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는 동성애자 옹호론자도 아니고, 인권운동가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을 지키는 것, 첫째,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둘째,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으며, 저와 함께 이러한 사역에 동참한 이들이 있습니다.
더불어, 직접 함께 해주시진 못해도 멀리서 이러한 저희의 사역을 도와주시고 함께 해주실 분들의 물질적, 재정적인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후원해주신 비용은 전액 모두, 책을 편찬하고 또한 책자를 배포 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내용이 길어서 일부만 발췌하여 올렸습니다. 모든 내용을 읽기 원하시는 분은 연락바랍니다. 책자한권을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또한 책은 온라인 및 서점에서도 구입이 가능합니다.
책을 읽으신 후 감동이 있으신 분들의 많은 동참과 후원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주변에 꼭 책자가 필요한 분들께 전해주세요~
오늘도 마음이 따뜻한 하루되시길 소망합니다.^^
차 례
1. 불법을 행하는 자들
바벨탑의 후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악한 열매들
2. 바벨탑 사건의 역전, 새로운 법이 나타나다!
생명의 성령의 법, 의문에서 마음 판으로
사람들의 관심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니
3. 아들의 영, 의무감에서 소원함으로
계집종의 아들들과 맞서라
4. 새로운 계명, 사랑
사랑으로부터 잉태되는 생명적 자기규범
사랑의 생명적 규범과 율법의 차이
자유와 사랑의 조율
5.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사람은 동성애자??
레위기와 동성애
우상숭배와 동성애
소돔의 진짜 죄는 동성애가 아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
6. 본성과 양심에 근거한 율법
오난의 사건
동성애 참고자료 및 문헌
7. 죄의 개념은 누가 창조했는가?
8. 선악과를 주신이유
9. 나의 이야기
10. 글을 마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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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사람은 동성애자??
얼마 전 한국의 유명한 감독 김조광수 감독과 동성연인의 국내최초 동성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이 시작되고 얼마 후 한 남자가 오물통을 들고 식장에 난입해 오물통을 뿌리면서 “동성애는 죄악이야!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라고 외치며 소란을 피웠고 그 옆에는 활빈당 남성회원이 “동성결혼박살내자”라는 패널을 들고 김조광수 감독에게 달려들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기독교 교회 장로들임이 밝혀졌습니다.
이 보도를 접하면서 저는 씁쓸함을 감출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이 식장에 난입한 남성처럼 동성애를 죄악시 하고 있고 하나님이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미워하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저 남성처럼 직접적인 폭행은 하지 않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이미 동성애자들을 증오하며 정죄의 대상으로 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흑인의 해방을 위한 싸움이 2:1 의 싸움이었다면 여성의 해방을 위한 싸움은 1:1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과의 싸움은 8:2 아니 어쩌면 9:1의 가장 불리한 싸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글을 기술하기도 전에 이미 비판적인 눈으로 글을 읽어나갈 준비를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을 사람보다 수배나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제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권면처럼 우리가 무엇을 하지 마라는 법(율법)에 묶여 하나님의 신령한 일(사랑하라)에 참여치 못한 자가 되라고 부름 받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권면처럼 할 수만 있다면 모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겨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경주에 참여케 해야만 합니다.
고대의 도시들과 20세기 전까지의 유럽, 서구 사회는 동성애가 너무 공공연한 것이어서 사실 논쟁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었습니다.
고대 서사시의 동성애 기록들과 가톨릭 사제들간의 사랑에 관한 기록들, 외지로 파견 나온 군인들이 당연하게 재산으로 소유하고 다니던 남자 종(애인)과 전쟁의 시기(1차 세계대전)동안 늘 장려되었던 동성애 등, 그러한 문화들은 신학 안에서도 논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을 만큼 오랜 시간동안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이성애와 함께 당연하게 받아 들여졌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동성애의 문화가 하류로 밀려나면서 그것인 비정상적인 것으로 취급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흐름은 신학자들과 교수들의 힘을 받으며 더욱 더 심화 되었는데 이 줏대 없는 역사학적 관점에서 더욱 주관적인 논쟁만 산만하게 벌어지기 전에 서둘러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레위기와 동성애
많은 신학자들이 레위기 20장의 성결법과 그 내용을 압축하여 옮겨 놓은 디모데전서 1:19절에서 동성애 금지의 근거를 찾고 있습니다.
그 많은 나열된 죄의 항목 중 남색 하는 자는 죽이라는 조항만 골라내어 하나님께서 그러한 행위를 매우 <특별하게> 미워하시는 것처럼 과장하여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먼 봉사가 아닌 바에야 하나님께서 이웃집 아내(자신과 결혼하지 않은 여자)와 결합하는 것을 비롯하여, 근친상간과 짐승과의 교합, 그리고 심지어는 월경중인 여자와의 결합이나 부모에게 악담을 한 것조차 모두 한결같이 죽이라고 말하고 있는 앞뒤 구절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의 판단 기준대로라면 부모에게 욕 한번을 한 것이나 남자간의 결합을 한 것이나 똑같은 죄질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율법의 의로 따지면 하나님 앞에 의로울 사람이 없다는 것은 성경을 조금만 연구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은 하나님의 율법의 비추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형제를 정죄하는 외식 자들이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들의 악한마음을 드러내시는데도 말입니다.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자도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살인하는 자와 똑같으며 형제를 향해 라가(바보)라 한자도 역시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다 >
상황이 이러한데 누가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정결함을 운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저 자신이 옳다 여기는 바를 지킬 뿐이지 형제에 대한 심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야고보서 4:11)
우리는 자신의 삶은 은혜로서 대충 잘못을 눈감아주며 좋게 적용해 버리고 자신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편견을 더해 율법을 적용하는 이중 잣대를 버려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율법 아래 거하는 자마다 저주 아래 있으니 단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가 율법으로 형제를 대하려면 자신도 모든 율법으로 말미암아 먼저 의로워져야 할 것이며 (그러나 사도바울의 선언처럼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다 했으니 만약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율법의 최고수였던 사도바울을 초월한 자입니다.) 자신이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한다면 역시 형제에게도 은혜를 적용해야 합니다.
기억해 보십시요! 간음한 여자를 불러내 모세의 법(동성애를 정죄한 레위기 20장의 바로 그 법)에 따라서 그를 돌로 처 죽여야 마땅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돌을 버리고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동성애자들을 마치 자신보다 <더욱 특별한 죄인>처럼 취급하며 자신을 율법의 거룩한 수호자로 자처하는 자들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도 결국 돌을 던질 악독자 들입니다.
우리는 동성애자들이 우리보다 더욱 특별한 죄인이라는 생각(동시에 자신은 더 의롭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율법과 행위로 말미암아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똑같은 선상(저주 받고 죽어야 할 선상)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은혜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역시 하나님 앞에 모두 수평선상(아들을 믿는 의로 구원받는 선상)에 서 있다는 사실을 벌써 잊은듯합니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윤리적 우월주의에 빠진 바리새인들처럼 교만하여 중심을 살피시며 모든 선 악간을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괴상한 비교의식과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는 마음을 가지지 맙시다.
우리들 중 율법을 가지고 형제를 판단할만한 자격을 가진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으니 말입니다.
우상숭배와 동성애
우리가 이쯤해서 우리의 모든 죄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덮어 주시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권장하는 것은 아니므로 동성 간 결혼이나 동성 간 섹스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견해에 정면으로 부딪히게 됩니다.
정말 그러합니까?
우리가 신약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신약으로 넘어가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약의 4복음서에서는 안타깝게도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언급할 이유를 찾지 못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러한 추측은 뒤로 하고 위대한 선생 사도바울의 발자취를 쫓아가보면서 그의 생각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채택해야 할 태도를 찾아보도록 해보겠습니다.
표면적으로 바울의 서신 서들을 살펴 볼 때에는 바울 역시 동성 간의 성행위는 부끄러운 것이며 그것은 순리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피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로마서 1:26-27)
사도바울은 그러한 생활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여> <하나님을 미워하고 비방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의 말씀을 빌려 이런 자들을 사형하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급한 결론에 다다르기 전에 레위기 20장을 읽을 때처럼 눈뜬 봉사가 되지 않으려면 앞뒤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1장 26절의 앞부분을 살펴보면 이들이 단순히 동성 간에 섹스를 나눈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이방신을 섬긴 것, 즉 우상 숭배를 하는 것으로 인해 동성섹스를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바알 사제들을 비롯한 여러 우상을 섬기는 남자 사제들은 성전 안에서 신도들을 상대로 섹스를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과 <열왕기상 15장 12절>도 우상숭배와 함께 남색을 거론하고 있어 더욱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성간의 섹스와 달리 동성 간의 섹스는 당시의 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우상 숭배자들 사이에서 주로 (후천적으로 배우게 되는 것으로써) 뚜렷하게 비 우상 숭배자들과 구분지어지는 경계선이 되었고 그 당시에 남색은 결국 우상숭배를 상징하는 어떤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동성 간 섹스는 그 당시 우상 숭배자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므로 사도바울이 이들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 함께 거론해야만 했습니다.
구약의 여러 곳에는 <나무와 돌 아래서 저들이 음행하였으며> 라고 표현된 성경구절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이 표현들은 모두 우상숭배와 성적 연관성을 함께 지적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사도바울이 언급한 우상 숭배자들과 달리 동성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미워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비방하지 않는 자들, 즉 우상 숭배자가 아닌 자들에 대해서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경우 사랑 없이 행해지는 육체적 쾌락을 미워했습니다.
때문에 남색을 간음이나 창녀와의 음행과 함께 묶어 늘 지적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0) 음행하는 자며 남색 하는 자며’
‘(고린도전서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 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미국의 대표적 크리스천 작가인 필립 얀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외 다수 저)는 그가 게이 교회에 참석했다가 그들이 드리는 뜨거운 사랑과 열정에 찬 예배를 보면서 엄청난 혼란을 느끼게 되었다고 자신의 책 속에 그 심경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매우 신실한 사역자로써 여김 받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돕고 살리는 일을 한 동료 사역자가 단지 커밍아웃을 한 이후 사람들에게 사단의 자식처럼 정죄 받는 것을 목도한 내용, 그리고 그 동료 사역자가 수많은 정신치료와 약물치료와 기도를 오랜 시간동안 행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았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통을 털어놓았던 내용들을 함께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동성애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이 진술한 것처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1:28)
우리는 비슷한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했던 베드로의 경험을 따라가 보면서 도움을 얻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더럽고 무식한 이방인들>은 결코 성도가 될 수 없다 라는 고정관념에 굳게 사로잡혀 있었던 자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줄기찬 설득으로 인해 베드로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보따리의 환상) 주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도 자신들처럼 방언과 예언을 터지게 하시는 것을 보고 거룩한 성령을 이방인에게도 부어 그들을 <자신의 거룩한 성도>로 삼으신 하나님께 겸손히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됩니다.
‘(사도행전 10: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베드로가 경험했던 것처럼 그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이방인이 절대로 거룩할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을 것 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도 구원에 참여케 해주셨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람들을 외모로 취하시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실한 마음을 보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베드로처럼 이방인이던 동성애자들이던 어떠한 종류의 사람들을 가리켜 함부로 속되고 더럽다고 말할 자격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소돔의 진짜 죄는 동성애가 아니다?
많은 교사들이 소돔은 동성애의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유황불로 심판을 받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늘날 성령께서 하시는 일과 매우 상반된 주장입니다.
오히려 동성애자들은 지금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께 축복의 불(성령)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정죄가 두려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의 수를 헤아려 보면 그 수는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을 것입니다)
사실 소돔뿐만이 아니라 고대의 모든 도시에는 동성애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아니 만연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라는 단어 자체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도시 중 하나가 소돔이었으니 소돔이 동성애자들로 말미암아 특별히 죄악의 성으로 지목되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소돔은 다른 도시들처럼 우상을 숭배함으로 로마서에 기록된 대로 이성에 대한 것이든 동성에 대한 것이든 성적인 문란함이 가득한 곳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유다서 1:7)
그러나 소돔이 특별히 다른 성들에 비해 하나님의 눈에 띤 죄목이 있었다면 그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돔에 대한 견해를 들어봅시다.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권능을 베푼 가버나움 마을이 회개치 않자 소돔도 너희보다는 낫겠다! 라고 이야기하시며 화를 내십니다.
그렇다면 가버나움은 어떠한 도시였습니까? 그 도시는 예수님께서 많은 치료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마태복음 8:5,14, 9:1, 요한복음 6:55) 예수님을 끝까지 냉대한 도시였습니다.
‘(마태복음 10: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다른 학자들이 어떻게 소돔을 바라보던 간에 분명 예수님은 소돔의 죄가 손님을 냉대한 악함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통적으로 손님을 천사처럼 여겨 대접하는 것을 덕으로 여겼고 예수님 역시 손님과 이웃에 대한 친철함에 대해 늘 강조하고 계십니다.(소자에 대한 냉수 한 그릇, 꾸러 온 자에게 묻지 말고 줄 것,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도 줄 것 등)
소돔에서 롯이 천사들을 맞이했을 때 온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천사들을 내 놓으라고 윽박지릅니다.
그때 롯은 고민 끝에 자기 딸들을 군중에게 내어주고자 하는데 만약 몰려든 자들이 일반적인 학자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정욕에 불타는 동성애자들이였다면 왜 롯은 여자인 자기 딸을 손님 대신 내주고자 했을까요?
롯이 성난 군중 앞에서 될 성 싶지도 않은 제안을 할리가 없으며 자기 딸들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순결한 여자임을 군중들에게 강조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소돔의 군중은 남자든 여자든 외부인에 대해 학대를 자행하는 자들이었으며 그것이 성적인 학대로 이어질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롯은 그것을 염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소돔의 죄가 동성애다.’라고 주장하는 말도 안 되는 견해는 이쯤해서 접기로 합시다.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
시편에는 다윗의 이러한 외침이 있습니다.
‘(시편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 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
이러한 고백이 나올 수 있게끔 만든 경험, 즉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깊은 우정의 상징이 된(그러나 실은 그 당시 문화적 상황 속에서 동성애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옳은)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에 대해 여러분은 자세히 알고 계십니까?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서 정서적으로 다윗과 매우 깊은 연합의 상태에 있었고 (마치 아담이 하와를 향해 이는 내 살이요 뼈라고 말한 것과 같이)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어 다윗을 끝까지 보호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친구 이상의 특별의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8: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통하여)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 하였더라’
‘이 말을 듣고 사울은 요나단에게 버럭 화를 냈다. 이 몹쓸 <화냥년의 자식>놈아! 그래 네가 이새의 아들<다윗>놈하고 <단짝>이 된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네 망신이 어미 망신이 될 줄 알아라.’
위와 같은 비난은 성경 전체를 통해 부적절한 성적 관계에 대한 책망의 방식으로 일관되게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과 요나단의 깊은 관계를 알고 심하게 질투를 느낀 것입니다.
‘[공동번역](사무엘상 20:34) 요나단은 화가 나서 자리를 떴다. 그리고 축제 이틀째 되는 날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아버지가 다윗을 욕하였으므로 마음이 몹시 아팠던 것이다.’
여러분께서는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이웃이나, 형제를 사랑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무엘하 1:26) 나<다윗>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는 가슴이 미어지오.
형은 나를 즐겁게 해 주더니. 형의 그 남다른 사랑,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었는데.’
요나단은 다윗의 즐거움을 위해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깊은 관계까지 정서적이고 육체적인 연합(결합)을 시도했을 것이라는 예상은 조금도 억측이 아닙니다. 이미 위에서도 사울의 말을 들어보면 다윗과 요나단이 그런 관계였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단과 다윗도 동성 간에 깊은 사랑을 나누고 혹은 동성애 관계를 했기 때문에 사단의 자식이라 비난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에서는 다윗을 두고 말하기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말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도 다윗을 사랑하셔서 그의 혈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6. 본성과 양심에 근거한 율법
이러한 저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 해석은 그렇지 않다! 라고 때를 쓸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땅에는 그만큼 율법의 누룩이 가득히 퍼져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저는 쐐기를 박는 성경적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제공하고자 합니다.
의문에 속한 법을 폐한 예수님께서 우리로 늘 살아있는 생생한 하나님의 지혜(성령의 법) 가운데 우리를 두셨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동성애에 대한 확실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가르친 가르침 중에는 남자가 머리를 기르면 그것이 자신에게 욕이 되는 것을 본성이 가르친다고 말한 구절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14)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하지만 재미있게도 구약을 살펴 볼 때 일부러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기르는 남성들도 있었는데 삼손과 같은 나실인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도리어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것을 하나님 안에 거룩한 것으로 여겼으며 실제로 삼손의 긴 머리에는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삼손의 본성(양심)은 사도바울의 본성(양심)과는 다른 것이었습니까?
분명 그렇습니다! 삼손의 본성은 그것을 욕되다 하지 않고 도리어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중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습니까? 많은 윤리적 거부반응들이 그것을 제지하려 하고 있지만 문화적 변화의 대세는 제제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대에 따라 바뀌어 가는 본성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우리를 자극하는 다른 본성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사도바울의 시대와는 다른 본성입니다.
이런 것을 사도바울은 이방인들은 본성으로 행할 때에 자기 양심이 자신에게 율법이 된다 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본성(양심)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 때의 지침과는 달리 예배당에서(구교가 아닌 신교) 도리어 머리에 무엇을 쓰면 여자든 남자든지에 상관없이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 거슬림이 되는 새로운 율법(룰)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본성에 근거한 가르침은 시대마다 달라집니다. 그리고 성경을 잘 알고 있던 사도바울 또한 이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본성에 근거한 양심의 율법을 제정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르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감에 있어 자신의 양심의 거리낌 바 된 것이 마음에 남아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며 사도바울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거리낌 바 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 장애물을 미리 제거하여 원활한 예배를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시 문화에서 남자가 머리를 기르는 것은 대중적으로 매우 큰 거리낌이었을 것이며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은 것 역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튀는 행위>였습니다.
마치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교회당 안에서 모자를 눌러쓰고 앉아 어떤 사람이 예배드리는 것을 볼 때 예배드리는 많은 성도들이 그것이 눈에 거슬려(혹은 신경이 쓰여) 예배에 집중하기 힘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시 그때 그 문화 속에서 사도바울은 고민한 것입니다.
바울은 리더로써 교인들의 일치감을 불러내기 위해 쓸데없는 일에 관심이 분산되는 것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2000년 전 고린도 교회에 그 나름의 유익한 율법을 제정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르친 이 율법도 영원히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상황들에 똑같이 적용될 수 없을 것임을 성령의 법 안에 있었던 사도바울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 당시 동성애가 학대적인 섹스와 노예 상인, 우상숭배에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사도바울이 남색을 경계하는 율법을 만들어 가르쳤다 할지라도 그러한 시대적 양심에 따른 율법적 지침이 영원한 지침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의문(한번 기록되어 굳어진 형태의 가르침)을 따르지 말고 영의 생생한 가르침을 따르자고 외치던(로마서 7:6) 사도바울은 더욱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과 관련된 논쟁에서 이러한 자신의 신앙적 관점을 드러냅니다.
당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모든 교회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룰(율법)을 제정하는데 이는 성령으로 인해 나타나는 은혜와 지혜를 최소한 해치지 않으면서도 교회의 일치감을 끌어낼 수 있는 선상에서 제시되었습니다.
사도들은 각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논쟁거리(그러나 실상 비생산적이고 쓸모없는 논쟁들)들을 잠재움으로써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생명적 경주에 참여케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도행전 15: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 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 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그래서 사도들은 우상의 제물은 먹지 말라고 온 교회에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그가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그는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도리어 믿음이 강한 자는 <사도들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제사에 바쳐진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바울 자신도 포함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이러한 담대한 믿음과 자유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새로운 지식과 깨달음(성령의 법)을 근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가 <알고> <확신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는 대체 무엇을 안 것일까요?
그는 만물이 다 깨끗하다는 것과(로마서 14:20)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사실 신은 하나님은 한분밖에 없다는 것을 안 것(고린도전서 8:5)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도 하나님의 것이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우상에게 바쳤다 할지라도 사실 진짜 우상은 존재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깨달음에 이른 것은 아니고 어떤 사람은 낮은 믿음 안에서 그것을 먹는데 거리낌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먹든지 먹지 않던지 주를 위해 하는 것이면 마음의 동기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다 선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선언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정의된 한 가지 행동 외에 다른 행동으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한 동기 안에서 다양한 행동패턴이 나오는 것을 다 이해하고 받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그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쯤해서 여러분이 본성과 문화적 배경과 상황적 양심에 따라 우리의 생활적 지침은 분명 바뀔 수 있으며 획일적이고 변하지 않는 문자적인 율법의 적용(의문에 속한 생활)이 도리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납득했을 것이라 여깁니다.
또한 사도바울이 모든 교회에게 비방과 오해를 받아 가면서도 헬라인에게 헬라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자유자에게는 자유자처럼 다가가 한 영혼이라도 건지려 했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성도 안에 존재하는 <율법위로 온 완전케 된 율법> 즉 사랑의 계명과 성령의 생명의 법인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고유의 문화들을 존중하셨고, 시대적 본성이 다른 것을 인정하셨으며, 그 시대의 수준과 양심에 맞추어 말씀하시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의 고유문화와, 시대적 본성에 따라서, 하나님은 그 민족 수준에 맞는 율법의 말씀들을 주셨고 부모가 아이를 돌보듯,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모세 때에 받은 그 율법 말씀 그대로를 문자적으로 지킨다면, 지금의 문화와, 시대적 본성과 양심에도 어긋날 뿐더러, 또한 그렇게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도 아닌 것입니다.
레위기의 성결 법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가지 율법을 주셨는데, 부정한 음식을 먹는다던지(돼지고기, 지느러미나 비늘이 없는 물고기 등),곰팡이가 피어있는 집에 들어갔다던 지, 여자가 월경을 하는 등, 이러한 자들은 부정한 자들이어서 정결케 되지 못한 채 성소에 오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오늘날도 문자적으로 지켜서, 식사모임이나, 회식 때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돼지 삼겹살이나 혹은 아구찜이나, 추어탕(지느러미나 비늘이 없는 물고기) 같은 것을 먹고 다음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던지, 집구석 어딘가에 곰팡이가 피어있는 지도 모른 채, 주일성소를 지킨다던지, 여자가 월경 중에 예배를 드렸을 경우, 구약의 율법대로라면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해야 하는 부정한 죄인들인 것입니다.
‘(레위기 15:31)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이 부정을 타지 않도록 하여라. 그들 가운데 있는 나의 성막을 부정하게 하였다가는, 그것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율법주의자들은 이러한 부정한 죄인들을 하나님이 그저 증오하고 미워하신다고만 생각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처벌하실 것에만 관심이 있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들조차 두려움으로 떨며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며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는 어린 자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혹여 잘못된 음식이나 균에 감염된 것을 먹어서 몸이 상할까봐 염려하시고, 또한 곰팡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그 당시의 위생상식과, 낮은 지각수준으로 인해 병이 걸릴 것을 우려해서 곰팡이가 집에 피면 밖으로 나와 있으라고 명하셨으며, 여자들도 월경을 시작하게 되면 몸이 약해지면서 공공의 장소나 성소같이 예배드리는 곳에서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있기가 불편할 터인데,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남자들에 의해서 여자들의 인권이 무시될 것을 우려하여(그 당시 여자의 인권이라는 것은 한 남자의 소유재산, 즉 물건처럼 취급되어졌습니다) 월경 때에는 쉬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큰 뜻을 그 당시 그 누가 알기나 하였겠습니까?
사실 오늘날에는 과학이 발달하고, 위생과 건강에 관해 지식이 많아져서 돼지고기이던,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아구찜이던, 추어탕이던, 독이 들어있는 복어든 성경의 레위기에서 먹어서는 안 되는 부정한 음식들을 위생적이고 안전하고 청결하게 만들어 먹을 수가 있게 되었고, 집에 곰팡이가 피면, 모두들 집밖으로 도망갈 필요 없이 페브리즈 한번 뿌리면 싹 사라지게 만들 수 있으며, 여자가 월경을 하더라도 생리도구들이 발달하여, 좀 더 활동하기가 수월해져서 월경을 이유로 굳이 교회를 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쓰여 있는 내용이 모두 진리이므로 문자적으로 따라서 해야 한다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위해 우리가 우리의 문화 안에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새로운 계명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을 지키지 못하고 다시 옛 구약의 법인 율법아래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율법에 흐르는 정신은 문자적인 명령과 복종, 그리고 두려움이 아니라 바로 자비와 사랑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가야 합니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노인이든 어른이든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것, 그것이 사랑이며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며 사랑할 때 연합이 일어나는 것이며 미움은 분리하는 것이라는 깨달음 안에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지혜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주신 과학이라는 선물을 통해 동성애가 후천적이라기보다 선천적인 것임이 점차 밝혀지고 있습니다. 아직은 후천적이라는 시각 속에서 동성애를 연구해 온 것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선천적이라는 시각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많고 우리 역시 그 결과를 더욱 신중하게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사회 통계학적으로 볼 때에도 모든 시대에는 10-20% 정도의 동성애자들이 늘 존재해 왔으며 많은 경우 양성애자의 형태를 띤 사람들이 함께 존재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동물들 중 동성애를 나누는 개체들이 많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며 동성애 자체를 동물들의 본능 속에도 심어놓으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동성애를 선악 간에 나누려 하지 않으신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어미 뱃속에 있기도 전부터 우리의 형질을 조성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우리가 성경 그대로 믿고(시편139:16) 동성을 사랑하게끔 창조된 사람이 있다 하면 우리는 그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까?
기도가 부족해서 의지가 부족해서 너는 죄인의 길을 선택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선천적 창조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가 여기 있습니다.
‘(요한복음 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제자들은 그의 특별한 출생의 원인을 자신의 죄나 죄의 유전에서 찾으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특별한 조성에 대해 이제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녀가 부모를 떠나 하나 될 것이라 선언하셨으나 사도바울은 자신이 독신의 부르심이 있고 또한 예수님도 말씀하시길 스스로 고자 된 자도 있으며 모두가 그리될 수는 없지만 그런 자도 있음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9:10)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창조하실 때 각자를 고유하게 만드시고 각기 기능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일반적인 법칙이 있으나 그것에 모두가 편입되지 않는다 해서 그들이 정죄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께서 직접 선언하셨던 것처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라는 질서를 만드셨듯이 모든 창조 질서도 결국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보편적 질서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 무조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은 유치하기 그지없는 수준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를 독특하게 창조하신 대는 어떠한 목적과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성애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도바울은 동성애가 하나님의 일반적인 질서에서 벗어난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로마서 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사도바울 스스로 지킨 독신 또한 하나님의 일반적 질서에서 이미 벗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로마서 1장 27절의 진정한 의미는 동성애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생활 구조가 남자 중심적인 사회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버림받거나 사랑을 잃을 때 여자가 당해야 할 비참함과 아픔에 대해 사도바울이 지적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버드대학교 앨프레드 킨제이 이학박사가 내놓은 미국의 권위 있는 성 보고서인 <킨제이 보고서>에서도 나와 있고, 또한 동성애자 커뮤니티에 접수된 많은 사례가 있듯이, 오늘날도 많은 수의 중년이나 노년 부부 중에서도 현재 배우자에게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이성에 대한 회의감이나 증오가 깊어진 사람 중에 동성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동성연애를 하는 남편들이 많이 있는데, 진정한 사랑보다는 현실에 대한 회피나, 육체적 쾌락만을 쫓아가서, 가정이 깨어지고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앞서 말했듯이 사도바울은 이성이든 동성이든 육체적 쾌락만을 위해서 사랑 없이 행해지는 관계를 비판하는 것이지, 동성애 자체를 비판한 것이라는 생각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쾌락주의적인 후천적인 동성애자가 아닌 선천적이고 경건한 동성애자들도 그들의 특별한 출생과 삶의 경향성으로 인해 한탄하고 정죄만 받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특별한 삶을 통해 당당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신 계획일 테니 말입니다.
한번은 어떤 크리스천 형제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본인이 성경에 나오는 자유를 잘 알고 있고, 성경지식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기뻐서 믿음으로 말이 통하겠거니 하고 자유와 사랑의법과 동성애의 관한 주제로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형제가 경악하면서 동성애자들은 나쁜 죄인들이고 속히 그들의 행동(?)을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흥분해가며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길, 물론 쾌락만을 추구하여 사랑 없이 행동하는 동성애자들도 있겠지만, 모든 동성애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며, 만나본 게이 중에서는 남자를 좋아하긴 하지만, 육체적 쾌락만을 즐기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형제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무조건 동성애자는 지옥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격과 마음과는 아무상관도 없이 말입니다. 그 형제는 자기의 의로 인해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형제가 갑자기 담배를 피기 시작했습니다. 본인은 자유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고 하나님이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담배 피우는 것은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또 성경에는 담배를 금하는 구절도 없으니 굳이 본인은 거리낄 것이 없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형제에게 성경에 있는 이런 구절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 하니라’
제가 말하기를 “형제님! 위에서 뜻하는 하나님의 성전은 우리의 몸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 더럽힐 수 있는 것은 담배입니다.
담배는 우리의 폐를 더럽게 하고, 발암물질인 타르, 니코틴(중독성),일산화탄소 등 이외에 수천가지의 물질이 들어있습니다.
담배로 우리의 몸을 더럽힌다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담배는 폐암을 유발시키는 원인이며, 다른 암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그 외에 위암, 췌장암, 유방암(여자에게 해당),갑상선암 등 여러 암 발생의 원인이 됩니다.
형제님께서 자유해서 담배 피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정죄를 받지 않는다 해도 자유의 본래 목적은 사랑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지, 육체의 쾌락의 기회로 삼는다거나, 자신의 건강을 잃으면서까지 자유를 쓰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행동이며,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비록 율법으로는 정죄 받지 않더라도 사랑의 법에 의해 형제님은 하나님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형제님도 하나님의 성전인 자신의 몸의 건강을 해치는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시지요? 이렇듯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라도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데(갈라디아서 2:16), 하물며 형제님께서 다른 지체들의 성 정체성이 어떻든 간에 함부로 그들의 인격과 마음도 모르면서 죄인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 아닐까요?”
이런 저의 논리적인 얘기에도 형제는 내 말을 듣지 않고, 그저 본인이 기성교회에서 배운 대로 동성애자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며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저는 씁쓸함을 뒤로하고 형제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난의 사건
제가 성경을 통해 깨달은 것은 그것입니다.
바로 사랑이란 진심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 마음속에 존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한 질그릇 속에 들어온 보배로운 하나님의 마음이며 고린도전서 13장 후반에 나타나는 온전한 하나님의 형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매우 재미있는 사건 하나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아들 오난이 그의 형수와 성관계를 맺다 죽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난을 죽인 것은 레위기에 근거한 윤리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늘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마음으로 사랑을 행하는지 아닌지를 보십니다.
오난은 아들이 없는 형수를 위해 성관계를 맺다가 형수가 행여나 아들을 얻게 될까봐 그것을 염려해 질외사정을 합니다.
‘(창세기38:9) 그러나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고 오난은 형수와 한 자리에 들었을 때 정액을 바닥에 흘려 형에게 후손을 남겨 주지 않으려 하였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크리스천들이나, 신앙인들은 유대인의 이러한 통례를 허용하진 않습니다. 아들을 얻기 위해 형수랑 자는 일은 도리어 우리나라에서는 불륜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당시 문화권에서 자식 없는 과부의 설움은 어떠한 것이었겠습니까? 평생을 정절을 지키며 남편도 없이 타인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근근이 살아가며 홀로 늙어가야 할 처지가 아니겠습니까? 키우는 자녀가 없는 그의 존재는 이미 그의 가족 구성원 안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오난은 형수의 아들이 아버지 재산에 대한 장자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런 그의 형수를 사랑하지 않는 이기적인 마음이 하나님의 화를 산 것입니다.
여기서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레위기의 윤리관이나 동성애자를 비난하는 구실로 늘 쓰이는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간의 이상적 결합관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단지 이것뿐입니다. 모든 문화와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께서 한 인간의 삶을 깊이 사랑하시어 그 사람이 처한 문화와 인식의 테두리 안에서 그의 감정을 최대한 보호하고 지키시려 노력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며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동성애 참고자료 및 문헌
<창조적 본능에만 따라 살 것이라고 믿고 있는 동물들에 대한 동성애 보고>
예1)
미국의 동물학자인 부르스 바게밀의 10년에 걸친 연구결과에 따르면 동성애를 하는 동물은 적어도 470종 이상이라고 합니다.
작게는 벼룩부터 딱정벌레, 갈매기, 펭귄, 돌고래, 해마뿐만 아니라 타조와 기린, 그리고 오랑우탄, 원숭이까지 육해공 동물 전역에 걸쳐 있습니다.
예2)
1930년대 영국의 에든버러 동물원에선 사육사들마저 이성 커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임금펭귄 두 쌍이 나중에 알고 보니 암컷끼리와 수컷 끼리로 이루어진 동성 커플이었던 적도 있다는군요. (한겨례21)
또 서양에선 옛 부터 숫양은 정욕의 대명사처럼 쓰였는데, 1997년엔 미국 캐럴대의 앤 퍼킨서 교수는 암컷과는 관계를 맺지 않고, 수컷끼리만 관계를 가지는 숫양이 전체의 10%에 이른다는 놀라운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예3)
미국의 연구진이 유전자 조작을 통해 기온이 상승하면 동성애 상태로 변할 수 있는 과실파리를 만들어냈다고 미국 과학원회보가 17일 보도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호프 시티 국립의료원 신경과학과의 기타모토 도시히로 박사 팀은 과실파리의 신경단위인 뉴론에 기온에 민감한 변형 유전자를 주입한 결과 과실파리가 기온 변화에 따라 이성애와 동성애 상태를 오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기타모토 박사는 '변형 유전자가 주입된 수컷 과실파리를 따뜻한 기온 속으로 옮겨놓을 경우 이 유전자가 신경단위인 뉴론에서 이어지는 전달체계를 교란시켜 다른 수컷을 갑자기 유혹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유전자 조작 과실파리는 기온이 섭씨 30도 이상 오를 경우 암컷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고 주의를 수컷 파리에게로 돌렸으며 다른 수컷이 접근해올 경우 역시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유전자 변형 과실파리는 그러나 차가운 기온 속으로 다시 옮길 경우 원래의 이성애 상태로 되돌아갔다고 연구진은 밝혔습니다.
이 같은 연구결과는 뉴론의 활동이 수컷들 간의 관계를 제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기타모토 박사는 '이번에 발표된 수컷대 수컷의 관계는 기온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비정상적인 개발의 결과는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1만3천600개의 유전자로 이뤄진 과실파리의 유전자지도는 2000년 해독됐는데 과실파리의 유전자는 인간과 유사해 과학자들의 주된 연구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10절과 디모데전서 1장 9절-10절에 대해>
고린도 전서를 보면,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하는 사람들,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부드러운 남자’(희랍어로 말라코이malacoi)나 ‘침대의 남자’(희랍어로 아세노코이타이 arsenokoitai)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 을 열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중 이 두 단어, "부드러운 남자" 와 "침대의 남자",가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 공동체를 정죄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증거로 사용된다.
이 단어들에 대한 보통의 번역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심각하다. NRSV는 "말라코이"를 "남창"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도 비슷한 번역을 따르고 있다.
"말라코이"의 문자적 의미는 "부드러운 남성"인데 이는 일반적인 남성의 이미지의 기준을 벗어나는 행위나 모습을 나타내는 남자를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겁이 많거나, 게으르거나, 수동적이거나, 퇴폐적이거나, 사치스럽거나, 여성적이라는 이유로 남성적이지 않는 어떤 남자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아르세노코이타이"를 번역한 영어판 성서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더욱더 심각하다. 대부분 동성애적인 표현인 단어들인 "소도마이츠," "동성애자," "동성 강간자들” 등으로 번역되었다.
디모데 전서 1:10절의 악행에 대한 리스트에서 우리는 같은 언어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린도전서의 행악 자들에 대한 리스트와 매우 비슷하다.
여기에서 영어 성서들이 "아르세노코이타이"를 역시 동성애자들과 연결시켜 번역하고 있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주 명확한 사실은 "남자"와 "침대"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 복수형태를 가지고 있는 "아르세노코이타이"를 바울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느냐는 것을 알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단어를 사용하는 그 어떤 고대 그리스 문서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바울이 스스로 만들어 썼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단어를 쓴 어떤 다른 문서도 없으므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의 "아르세노코이타이"를 번역한 영어 성서들이 번역가들의 편견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위험할 정도로 성서의 본문을 LGBT 사람들을 정죄하는 논조로 번역해 놓았다는 것이다.
출처 : 동성애와 신약성서
양승애 (시카고 신학교 신약성서학 교수)
<저명한 성경학자 “바울은 동성애자들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
세계적인 암호 해독가이자 성경연구가인 마이클 우드씨는 바울이 동성애를 비판하기는커녕 공개적으로 옹호했다고 지적했다.
해독 불가능한 REDOC-2 암호체계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 마이클 우드씨는 성경학계에서 기원전 1세기경 신약성서 저자들이 사용한 단어 및 기호의 뜻을 보다 정확히 해독하는데 이바지해 왔다.
최근 그는 동성애에 대한 신약성서의 입장이 기존의 생각과 충격적으로 다르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현재, 같은 견해를 가진 신학자 및 성경학자들도 늘고 있는 추세이다.
“사도바울의 글을 정확하게 직역하면, 그가 동성애를 비난하기는커녕, 당시 종교적 관점에 맞서 동성애자들을 옹호했다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 자신의 저서 <pauline Paradoxes Decoded>에서 광범위한 문서를 제시하고 있다.
(참고링크:http://michaelwoodcrypto.com/)
또한 우드씨는 홈페이지를 통해 <소년강간범과 율법>이라는 매우 중요한 부분도 공개하고 있는데, 이장에서 그는 기존의 성경해석과 달리 사도바울이 arsenokoites(아르세노코이타이)라는 희랍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왕국에서 제외된다고 한 것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소년강간범이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세인트 멜리터스 대학교의 크리스 틸링박사도 arsenokoites를 동성애가 아니라 소년강간범으로 해석한 마이클우드씨의 분석이 언어학적으로 정확하다고 한다.
“우드 씨는 1~2 세기 희랍어, 히브루어 문서에서 arsenokoites가 실제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방대한 양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arsenokoites는 고대뿐만 아니라 마틴 루터 시절은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년 강간범>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어를 전공한 윌리엄 버그 박사의 말이다.(프린스턴 대학교)
비록 기존의 성경연구가들은 바울의 편지에 동성애가 세 번 언급된다고 주장하지만, 우드씨는 동성애가 단 한 번 밖에 언급되지 않는다고 한다. 즉, 기존의 성경연구는 arsenokoites를 두 번에 걸쳐 오역했다는 것이다.(고린도전서 6장 9절, 디모데전서 1장 10절)
즉, 합의에 의한 성인간의 동성성교가 언급된 곳은 한 군데 밖에 없는 것이다. 우드 씨는 바울이 동성애를 언급한 것은 오로지 동성애자들을 당시의 종교관점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를 입증할 문서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우드 씨의 저서 <pauline Paradoxes Decoded>에는 동성애 관련 사항 외에도 수많은 수수께끼들이 해독되어 있다.
우드 씨는 이 책에서 바울의 율법(희랍인들의 동성애 금지법뿐만 아니라)을 모두 분석했다. 사해문서의 편집자이자 저명한 성경학자인 제임스 샌더 씨는 율법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성경학에 있어서 가장 난해한 수수께끼 였다고 밝혔다.
우드 씨는 자신이 바울의 율법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공통점을 발견했을 뿐만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한 문장으로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우드 씨의 단독문장 해결법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대로 하면 모든 게 해결 되요. 정말 놀랍습니다. 우드 씨께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의 책을 읽고 나서 바울의 편지와 관련된 부분을 모두 다시 읽어 봤는데, 단 한 군데도 모순 된 곳이 없었어요. 우드 씨가 정말 놀라운 일을 해냈습니다.”
“학계에서는 율법에 대한 바울의 시점에 대해 혼란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도 희랍인들의 동성애 금지법 즉, 레위기의 동성애 금령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잘못 해석해 왔지요.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레위기를 근거로 동성애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바로 바울이 동성애자들을 공개적으로 옹호했다는 뜻을 담고 있어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마이클 우드 씨는 성경 암송 대회에서 수많은 상을 탔었고, 젊은 시절에는 해독이 불가능한 REDOC -2 시스템을 개발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후일 그는 암호해독학과 성경을 접목시켜 획기적인 발견을 통해 오늘날 세계적인 성경학자들의 시각을 바꾸고 있다.
우드 씨의 암호해독학에 대한 열정과 종교관이 융합된 계기는 바로 사해문서였다. 그는 암호해독의 경력을 이용해 풀리지 않던 고대의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사해문서를 해독하면서 획기적인 사실을 발견한 우드 씨는 성경과 암호해독학을 접목하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까지 밝혀낸 고대 수수께끼들은
<The jerome Conspiracy>,<The Hidden Bible>, <The Jesus Secret>,<Breaking the Roman Code>,<Paul on Homosexuality> 등의 저서에 소개되어 있다. 또한 그는 최근 저서 <Pauline Paradoxes Decoded>는 사도 바울이 집필한 종교율법 중에서 암호같고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들을 풀어냈다.
출처 : 북미, 미국 타비소 줄로 기자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다?>
제일 먼저 "후천성 면역 결핍증 환자 중 남성 동성애자가 많고, 성적 지향은 선천적이지 않다"는 주장의 경우 대한에이즈예방협회 홈페이지만 들어가도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데 남성 동성애자보다 이성 간 성 접촉으로 감염된 사람이 더 많으며, 성적지향의 선천성 여부는 아직 입증되지 않은 것입니다.
"2011년(1~12월) 888명의 내국인 HIV 감염인이 새로이 확인됨 감염경로가 확인된 감염인은 총 522명으로 남성 481명, 여성이 41명이고, 모두 성 접촉에 한 감염으로 확인됨. - 남성(481명) : 이성 간 성 접촉 263명(54.7%), 동성 간 성 접촉 218명(45.3%) - 여성(41명) : 이성 간 성 접촉 41명(100.0%) 누적HIV감염인 현황. 감염경로가 확인된 6,964명 중 성 접촉에 의한 감염은 6,907명(99.2%)임.- 6,907명 중 이성 간 성 접촉은 4,175명(60.4%), 동성 간 성 접촉은 2,732명 (39.6%)임"
‘성적 소수자는 전염성 있는 질병을 옮길 수 있고, 성 문화를 문란하게 한다’ 는 주장 역시 사실과 다릅니다. 특히 동성애자가 전염성 있는 질병을 옮긴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WHO는 1992년 동성애를 질병 목록에서 삭제한바 있습니다.
또한 성 문화를 문란하게 한다는 것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추측성 발언으로 동성애자 및 성 소수자에 대한 인권을 침해하고 차별을 조장한다고 보여집니다.
또한 에이즈는 '콘돔'을 사용할 경우 100% 예방되며, 국내 에이즈 관련 단체들도 에이즈는 바이러스가 원인이지 동성애가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는 다는 점, 오히려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동성애자에게는 자신이 아우팅(자신의 성 정체성이 자의가 아닌 타인에 의해 밝혀지는 것) 됨으로 인해 발생하는 인권침해를 우려해 검사를 기피하게 되고, 이성애자는 에이즈를 자신과 관련 없는 질병이라고 생각해 검사를 기피하게 되면서 에이즈에 대한 국가의 관리를 어렵게 만든다는 점 등을 바탕으로 본다면 이 같은 내용은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동성애자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심어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처 : 대한에이즈예방협회
저자 지현일(David JEE)
연세대학교 졸업
왕같은 제사장교회 선교사
뉴욕 새천년교회 음악선교사
로얄프리스후드 프로덕션 음악 PD
이메일(E-mail): royalpdd@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