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에 실린 칼럼이긴 한데.
글은 좋네요.
[삶의 향기] 다름과 틀림에 대하여. ( 이영직 변호사)
“이 집은 어제 먹었던 집과 맛이 왜 이렇게 틀려.” “같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끼리도 왜 이렇게 틀린지 모르겠어요.” 일상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말이나 글에 그다지 예민하지 않은, 무딘 감수성을 가진 나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지 못하고 약간의 짜증과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다름’과 ‘틀림’의 차이를 잊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는 그 차이를 무시하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이를 듣는 사람도 이상한 느낌을 갖지 않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다행히 텔레비전을 보면 출연한 사람이 ‘틀리다’고 말한 경우에도 자막에는 ‘다르다’로 ‘수정’되어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30여 년이 지나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대학교 신입생 시절의 국어 교재에 논쟁 주제 중에서 피해야 할 것의 예로 “배구와 농구 중에 어느 종목이 재미있는가” 하는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냥 단순한 취미의 차이에 불과한 것을 두고 어느 것이 재미있는가 하고 다투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이와 같이 단순한 예를 들면 말을 잘못 쓰고 있는 경우를 쉽게 알 수 있지만 막상 실제의 생활을 살펴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에서는 동성애에 관하여 열띤 논쟁이 벌어진다. 동성애자는 그냥 이성애자와 다른 것에 불과한 것임에도 마치 도덕적으로, 인류학적으로, 위생적으로 ‘유해’한 것인가 아닌가를 놓고 설전을 벌이게 만든다. 종교적·윤리적 측면에서 질타를 하고, ‘정상적인’ 결혼을 하여 자손을 낳아야 함에도 이를 하지 않음으로써 인류의 재생산을 위협한다고 하고, ‘변태적인’ 성행위를 일삼아 여러 질병을 일으키는 집단이라고 단죄하기도 한다.
그냥 세상에는 이성애자가 있는 반면에 동성애자도 있구나 하면 될 것을 굳이 이를 논쟁의 주제로 삼을 필요가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문제가 될 것이 없으니 그냥 ‘신경을 끄면’ 될 것이지 과연 논쟁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우리의 평범한 이웃인 동성애자들이 전혀 의미도 없는 방어를 하게 만드는, 소수라는 이유로 생래적인 취향을 두고 논쟁거리로 삼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때 한 선생님이 왼손잡이에 대하여 극언을 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남들은 다 오른손을 쓰는데, 왜 왼손을 쓰느냐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왼손잡이들은 ‘병씬’이다 하였다. 아직 어려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였다. 내 아이 중의 하나가 왼손을 써 학교에 들어갈 때 내심 걱정을 하였다. 그 선생님 같은 사람이 혹시 지금이라도 있어 아이에게 ‘몹쓸 언행’을 하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불안감이 든 것이다. 다행히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요즘은 그렇게 ‘막돼먹은’ 선생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지 아이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라고 있다.
편하게 알고 지내는 친구 중 하나가 장애인이어서 장애인의 세계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많이 접하고 있다. 그 결과 장애인들은 이런저런 사유로 몸이 불편할 뿐이지 그 이상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너무나 평범한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을 ‘정상인’으로 부르는 것에 익숙해 있다. 즉 장애인을 장애인이 아닌 사람과 ‘다른’ 사람이 아닌, ‘틀린’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말과 글은 생각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역으로 말과 글이 생각을 규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다르다’라고 써야 할 때 ‘틀리다’라고 쓰는 것은 단순히 문법적인 착오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즉 ‘틀리다’를 오용·남용하다가 보면 자신이 세운 기준에 어긋나는 것,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자신이 모르는 것 등을 틀렸다고 하여 배척하고, 세상을 흑백의 무채색으로 보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영직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