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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장 콕토, 그의 연인들
2003-12-05 오전 06: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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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파리 부르조아 출신의 젊은 장 콕토가 발레를 감상한 후 디아길레프를 찾아가 자신도 발레곡을 쓰고 싶노라 말했다. 그러자 러시아의 이 천재 발레 프로듀서이자 니진스키의 삶을 뒤흔든 대단한 호모인 디아길레프는 다소 거만하게 말했다.

"나를 놀래켜보게 Etonne-moi."

아마도 디아길레프는 장 콕토가 후에 자신보다 훨씬 더 유명해지리라는 사실을 그 순간 짐작이나 했을까? 나중에 장 콕토는 디아길레프가 자신에게 이때 던진 '나를 놀래켜보게'라는 말을 '오르페우스' 등의 희곡 대사로 즐겨 사용하게 된다.

장 콕토는 1, 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식자층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집약하는 독특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발레곡, 희곡, 소설, 영화 등 그의 능력을 다방면에서 확인한 놀라운 천재임에 분명할 것이다. 또한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후대 작가들에게 기묘한 상상력의 원천을 제공하고 있다.

에릭 사티, 디아길레프와 연결된 발레곡, 당대 한창 창궐하던 초현실주의적인 연극, 피카소와의 우정, 그의 몽환적인 삽화들, 케네스 앵거 등의 전위 작가에게 영감을 부여한 그의 실험적 영화들, 평생의 친구이던 에디트 삐아프와 같은 날 함께 죽은 운명 등 소위 장 콕토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사 '그의 삶이 곧 예술이다!'를 증명하듯, 그의 인생은 화려한 파노라마로 점철되어 있다.

또 장 콕토는 게이였다. 그의 패션 감각은 당시 프랑스 패션을 선도할 만큼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사람들은 재즈가 고요히 흐르는 30년대 씨시 바에 가만히 앉아 담배를 피우며, 춤을 추는 세일러 복의 해군을 감상하는 그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많은 데생 작품들 중에는 당시 해군들에 관한 것들이 많다.



또 처녀작 '시인의 피'를 비롯한 그의 영화들은 신화적 원형에 호모 에로티시즘이 채색된 가장 훌륭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장 콕토의 평생 애인은 두 명이었다. 첫 번째 애인은 20살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가인 레이몽 라디게.



천재로 소문이 자자하던 라디게를 장 콕토가 만난 건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였다. 라디게는 16세였다. 장 콕토는 첫눈에 라디게에게 반하고 말았다. 콕토는 당장 라디게에게 줄 반지를 주문 제작했다. 세 가닥으로 꼬여진 '삼환반지', 세상에서 가장 많이 복사되었다는 그 유명한 반지가 바로 라디게와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장 콕토가 제작한 것이다.

장 콕토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라디게는 2년 여에 걸쳐 그의 짧은 필생의 역작인 '육체의 악마'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곧 프랑스 비평가들로부터 신고전주의를 대변하는 역작으로 열렬히 환영받았고, 후에 장 콕토의 작품 세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잦은 음주와 피폐한 생활로 레이몽 라디게는 스무 살 나이에 장디푸스로 죽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했던 장 콕토는 심한 자기 학대와 아편에 빠져 버렸고, 결국 요양원에 실려가고 말았다.

장 콕토는 라디게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는 자신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던 '내 손의 하늘이 당신을 보호한다'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라디게를 줄곧 따라다니며 그를 즐겨 그렸던 장 콕토의 삽화는 그에 대한 애정이 애틋하게 묻어 있다. 그는 잠자는 라디게 삽화 밑에 '내 손의 하늘이 당신을 보호하다'라고 적어 놓았던 것이다.




만일 철학자 마르탱이 요양원으로 찾아가 그를 카톨릭으로 인도하지 않았다면 장 콕토의 인생은 거기에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카톨릭에 귀의했던 장 콕토는 그 속에서 신화적 모티브를 찾아냈고, 이후 그의 작품 세계는 보다 더 비의적으로 변해갔다. 라디게를 그리워하며 써내려갔던 그의 걸작 소설 '무서운 아이들'과 그 소설 모티브가 일부분 차용된 영화 '시인의 피'의 일부분은 라디게에게 바치는 그의 사랑의 소네트였다.

이후 왕성하게 창작 활동에 몰입하던 장 콕토에게 다시 사랑이 찾아온 것은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26세의 마르셀 킬, 그가 바로 콕토의 두 번째 남자였다.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던 마르셀 킬은 콕토에게 마약과 사랑 둘 다를 충족시켜줬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 영감까지 부여한 걸로 알려져 있다. 빈센트 킬은 콕토에게 그의 평생의 멋진 마지막 모험을 선사하기도 했다. 80일간의 세계 여행.

'80일간의 세계 일주'로 유명한 쥘 베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던 해 마르셀 킬은 콕토에게 재미있는 제안을 하게 된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주인공처럼 세계를 일주해보자는 거였다. 콕토는 이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현지에서 소식을 바로 글로 써서 보낸다는 조건 하에 그는 '파리-수아르'라는 잡지사에서 후원을 얻어냈다.

실제로 이 여행에서 콕토와 킬은 각각 필리어스 포그와 파스파르투 역을 맡고 있다. 당시 46세였던 콕토는 내기의 주체였고, 26세의 마르셀 킬은 여행에 수반되는 실질적인 흥정, 환전, 운반 등 육체적 힘이 필요한 하인의 역할을 맡았다. 예술가 입장에서 세계 곳곳의 광경을 음미하는 '80일간의 세계 일주' 곳곳에 마르셀 킬에 대한 애정이 또한 녹록치 않게 배어 있는 건 당연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이 게이임을 떳떳하게 공언하고 다닌 콕토이니만큼 그의 곁에는 남자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그의 평생의 연인은 단연 레이몽 라디게, 그리고 마르셀 킬이었다.

평생을 예술과 함께 살아온 장 콕토는 연애마저도 다소 드라마틱했으며 그의 삶이 하나의 멋진 향연이자 즐거운 퍼포먼스였음을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74세에 나이로 죽기 전까지도 한 성당의 실내 장식을 하던 콕토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프랑스 샹송의 대모인 에디트 삐아프가 죽은 몇 시간 후에 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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