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 “언론과 관련해서 인터뷰하기 싫어요. 그런 거 말해봤자 괜히 나만 미움 받고. 기자 분은 인터뷰 한번 하면 끝이겠죠. 하지만 그 뒤에 내가 어떻게 사는지 한번이라고 생각해 봤어요?”그의 목소리는 예의를 잃지는 않았지만 차가웠다. 상처가 생긴 자리에 고름이 솟고 딱지가 돋아 단단해진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를 만난 건 지난 16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인권콘서트에서였다. 인권콘서트는 국가보안법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양심수와 인권을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 소수자를 위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15년째 열고 있는 연례행사다. 그는 2000년에 이어 올해에도 이 행사에 참가했다. 올해는 아마 그에게 더 뜻 깊은 날이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20여명의 동성애자 인권연대 소속 회원들이 집단 커밍아웃을 선언했다. 그는 이 순간 3년 전 자신의 커밍아웃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엄마, 나야. 나 동성애자라고 얘기했어요.
인터뷰기사가 몇 주 있다가 나갈 거야. 그러니까 너무 놀라지 말고, 그렇게 알고 있어요.”맑은 하늘에 청천벽력 같은 전화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길로 청양에서 부모님이 달려왔다. 부모님은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아니라고, 정상이라고 말하라며 그를 달랬고, 두 누나들은 차마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농약을 먹고 함께 죽자는 부모님의 말에 그는 심장근처가 아프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는 몇 년 동안 고민해 결정한 일을 번복하고 싶지 않았다.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지 8년째.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왔는데 앞으로 남은 30년은 솔직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장국영이 내 첫 사랑이라고?”
그의 커밍아웃 시기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월간지 인터뷰 기사가 나가기 전 친하게 지냈던 스포츠신문 기자가 시드니 올림픽 연예인 응원단으로 출국하려는 그를 찾아왔다. 그는 아무 말 하기 싫다며 귀국한 후에 단독으로 인터뷰를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신문에 ‘홍석천은 호모’라는 기사가 대서특필됐다.보도가 나간 후 상황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빴다. 바로 그날 밤 출연하고 있는 모든 프로그램을 그만두라는 전화 통보를 받았고 예정돼있던 일정도 모두 취소됐다. 시드니 올림픽을 취재하러 왔던 취재진들은 몰래카메라까지 동원해 그를 따라다녔다.그를 더 힘들게 한 건 신문의 왜곡보도였다. 그가 태국 여행을 떠났을 때는 ‘부모님과 동반자살을 기도’했다는 오보가 났고, 장국영이 죽었을 때는 ‘장국영이 홍석천의 첫사랑’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장국영을 한번이라도 만나봤어야 사랑을 하든지 말든지 하죠. 장국영이 죽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길래 좋아하는 배우였다고 말했더니 다음날 기사가 그렇게 났어요. 또 한번은 기자가 아예 누구누구 이름을 대면서 동성애자인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맞는지만 확인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당사자한테 직접 가서 물어보라고 했죠.
다음 날 제가 ‘연예계에 동성애자 또 있다’고 말했다는 기사가 실렸어요. 우리나라 신문들 사실을 보도하는 게 아니라 흥미 위주의 보도가 많아요.
중요한 말은 다 빼고 선정적인 말 한 가지에 너무 집착하는 거죠.”
<완전한 사랑>은 단비같은 드라마
그는 얼마 전 동성애자라는 것을 밝힌 뒤 처음으로 단역이 아닌 고정배역을 맡을 수 있었다. SBS의 <완전한 사랑>에서 그는 주인공 시우(차인표)의 동성애 성향을 가진 친구의 역할이었다.“사실 커밍아웃 후 1년 동안은 일이 없을 거란 걸 알았어요. 하지만 2년 후부터는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연예계 속성상 쉽게 잊혀지곤 하니까. 하지만 일이 없었어요. 2년이 되니까 초조해지고 3년이 되니까 정말 미쳐버리겠더라구요. <완전한 사랑>은 제가 가장 힘들 때 찾아와 준 단비 같은 드라마였어요.”
그는 다행히도 동성애자에 대한 시각이 3년 전과 비교해 많이 변했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뭐 저런 새끼가 있어”라는 눈초리였다면 지금은 “그럴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완전한 복귀’는 멀게만 느껴진다. 이번 드라마도 힘이 있는 김수현 작가가 “홍석천 아니면 안 돼”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수현씨는 그에게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는 정말 용기 있는 거야. 흔들리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는 대가를 치렀고 이제 마음의 감옥으로부터 풀려났다. 애초부터 갇혀 있었던 건 그가 아니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
미디어오늘 김상만 기자 hermes@med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