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_보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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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누구를 부르고 계시는가?

 

 

 

서론

 

당신은 레즈비언이거나 혹 게이이십니까?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계속 수치심 속에 살고 계십니까?

혹 창녀이거나 창남이십니까?

과거에 살인의 경험이 있으십니까?

마약 중독자이십니까?

윤리적으로 지탄받는 직업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당신을 여전히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누군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지옥자식이라 불렀다면 그는 거짓선지자입니다.

그것은 거짓복음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에 대한 엄청난 오해입니다.

 

책을 소개하며

 

2천 년 전 예수님이 오셨던 시대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가장 천대받고 소외받았던 계층은 바로 창녀들과 세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대부터 오랜 중세기간을 거쳐 거의 근대에 와서까지도 여자들의 인권이란 벌레만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인종차별주의에 의해 흑인들의 인권이 짐짝처럼 취급받던 시절이 지나가자, 이제는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천대하고 무시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서 사람들을 사랑해야할 의무가 있는 많은 교회들에 의해서 그런 학대들이 자행되고 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에 있는 진보주의적인 성향의 인권운동가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차별해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사실 한국 내에서, 또한 전 세계적으로도 종교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성경에 동성애가 죄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실제적으로 동성애자들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해주거나 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반박할만한 지식이 있는 분들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심지어 신앙심이 있는 동성애자들조차도 본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괴리감과 의구심을 가지면서 신을 원망하며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동성애자들이나, 천대받는 소외계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깨달았고, 동성애 자체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적으로,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뜻이었으며, 하나님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어떠한 성 정체성을 가졌던,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소위 죄라고 말하는 것들을 사람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에 사람들이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판단하며 크게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철저히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설명하려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렇게 마음이 무너지고 사람들로부터 정죄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려 아들 독생자를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벗이 되려고 오셨습니다.

 

스스로 건강하고 잘나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을 위해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부요한 자들에겐 예수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무한하게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사랑에는 끝도 없고 또한 조건도 전혀 없으십니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반드시 요구해야 하실 만큼 그분은 가난하거나 부족한 것이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십일조도 주일성수도 기타 수많은 보수적인 의무사항들을 사실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구약에 나타난 계약의 관계일 뿐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밝히 드러내신 신약의 예수그리스도는 그리 말하지 않습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의무로 맺어진 관계가 더 이상 아닙니다. 늘 자원하는 심령과 소원하는 만큼 드려지는 사랑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의 중심을 기뻐하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아무 조건 없이 두 팔 벌리고 계십니다.

 

이 책에서는 외형적인 문화, 외형적인 신앙이 만연해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마음을 다시 회복하고 산제사로 예배드리는 법을 소개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우리를 하나님의 군사로 준비시키시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실 때에 함께 동참한 여러분들의 기쁨과 감동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 더욱더 갑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책을 통해서 많은 성적 소수자 및 소외계층들, 그리고 모든 잘못된 룰과 율법에서 억압 받고 매여 있는 성도들,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는 모든 사람들이 참된 진리 안에 거하고, 자유케 될 날이 올 것을 믿으며, 저는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는 동성애자 옹호론자도 아니고, 인권운동가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을 지키는 것, 첫째,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둘째,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으며, 저와 함께 이러한 사역에 동참한 이들이 있습니다.

 

더불어, 직접 함께 해주시진 못해도 멀리서 이러한 저희의 사역을 도와주시고 함께 해주실 분들의 물질적, 재정적인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후원해주신 비용은 전액 모두, 책을 편찬하고 또한 책자를 배포 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신 후 감동이 있으신 분들의 많은 동참과 후원을 기다립니다.

 

후원에 동참해주신 분들께는 소정의 선물로 책자한권을 보내드립니다. 책자가 더 필요하신 분은 연락바랍니다. 그리고 주변에 꼭 책자가 필요한 분들께 전해주세요~

 

오늘도 마음이 따뜻한 하루되시길 소망합니다.^^

 

 

 

 

 

저자 지현일(David JEE)

 

연세대학교 졸업

왕같은 제사장교회 선교사

뉴욕 새천년교회 음악선교사

로얄프리스후드 프로덕션 음악 PD

 

후원해주실 계좌

(국민은행) 852502-04-001-011 지현일

이메일(E-mail): royalpdd@gmail.com

 

 

 

 

 

 

 

 

 

 

 

 

 

 

 

 

 

차 례

 

1. 불법을 행하는 자들

 

바벨탑의 후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악한 열매들

 

2. 바벨탑 사건의 역전, 새로운 법이 나타나다!

 

생명의 성령의 법, 의문에서 마음 판으로

사람들의 관심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니

 

3. 아들의 영, 의무감에서 소원함으로

 

계집종의 아들들과 맞서라

 

4. 새로운 계명, 사랑

 

사랑으로부터 잉태되는 생명적 자기규범

사랑의 생명적 규범과 율법의 차이

자유와 사랑의 조율

 

5.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사람은 동성애자??

 

레위기와 동성애

우상숭배와 동성애

소돔의 진짜 죄는 동성애가 아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

 

6. 본성과 양심에 근거한 율법

 

오난의 사건

동성애 참고자료 및 문헌

 

7. 죄의 개념은 누가 창조했는가?

 

8. 선악과를 주신이유

 

9. 나의 이야기

10. 글을 마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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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법을 행하는 자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필연적으로 한 국가에 속하게 되며, 그 나라의 국민으로서 국법을 지키며 살아가게 되듯이, 성인이 된 이후에는 누구나 자의적으로 어떤 종교라든지, 혹은 마음에 어떠한 도덕적 양심의 룰(Rule)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불교인들은 석가모니의 법을 따라서 불경을 읽고 부처를 섬기고, 이슬람교인은 마호메트의 코란을 따라 알라신을 섬기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지키며 살아가려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서도 구약에서 모세가 받은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바리새파 같은 자가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오신 후 새로이 주신 새 계명, 즉 자유와 사랑의 계명을 가지고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아무런 법 없이도 산다고 말하는 이방인(무(無)교, 불(不)신자)들조차도 성경에서 말하기를, 각자 양심의 법에 따라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고, 그 어느 누구도 법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로마서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제가 이 책을 집필하면서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제정하사,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법인 <생명의 성령의 법>에 대한 것입니다.

 

‘(로마서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전에 수많은 크리스천 여러분께 죄송한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지금껏 아주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해 왔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일하시지 않은 크리스천들은, 하늘나라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분께서 당신에게 많은 상급을 주시며 당신을 후히 칭찬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법에 따라 일하지 않은 분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노력을 조금도 기억하시지 않으실 것이며 인정하시지도 않고, 심지어 당신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 하실 것 이라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무서운 말씀입니까?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하늘나라 주님 앞에 가니 아무공로도 인정 못 받고 심지어 쫓겨나기까지 하다니요?

 

에이 나는 설마 아닐 거야, 라고 아직까지도 확신에 차있으신 크리스천이 계시다면,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 이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지, 혹시라도 내가 그 사람들 중에 포함되어있지는 않은지, 정확하게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바벨탑의 후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2천 년 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표면적으로 볼 때는 당시 최고의 성경학자들이었으며 모든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는 랍비였고(오늘날로 따지면 권위 있는 종교인, 신학박사들이며, 목사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문구 그대로 가감하지 않고 지켜 행하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늘 열심이 있었고, 성경을 읽고 금식하고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당시 이들의 열심을 따라올 자가 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외적으로 드러내 보인 것이 아닌 그들의 마음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을 진정한 성령의 열매로(의의 열매) 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교회 내에서 나름 신앙생활 좀 했다고 자부하는 열심파 크리스천의 얘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외적인 행위에 대한 얘기가 가득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헌금을 얼마나 냈다던 지, 새벽기도를 몇 시간 이상이나 오래 한다든지, 교회봉사활동을 열심히 해서 인정받는다던지 등등, 외모나 행위 즉, 눈에 보이는 것으로 신앙이 좋다고들 판단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더욱 중요시 여기는 마음의 상태를 들여다보고 신앙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마음에 관해 관심도 없을뿐더러 마음으로 누구를 미워하고 살인을 한들, 여자에게 음욕을 품고 마음으로 간음한 생각을 한들, 눈으로 보이게 일어나는 일들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생각들(마음의 중심보다 외모로 판단하는 일)을 미워하셨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선한 행위들을 칭찬해주시기 보다는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히 드러내셨습니다.

 

‘(마태복음3:23)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 하도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다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 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마태복음 3장에 열거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예수님의 판결을 보면

 

첫째. 그들이 외식하는 자들이었으며

둘째. 그들이 소경들이었고

셋째. 그들이 회칠한 무덤이었으며

넷째. 그들이 불법이 가득한 자들이었고

다섯째. 그들은 독사의 새끼들이라 했습니다.

 

외식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진실은 없이 늘 선행만 강조하고 드러내는 것만을 좋아하는 위선자들이란 뜻이며,

 

소경이란 말은 그들이 영적인 능력이나 지혜와 지식이 없어서 사람들을 도무지 하나님께로 이끌어 갈수 없을 뿐더러, 본인들도 같이 구렁텅이에 빠질 것이며,

 

회칠한 무덤이란 뜻은 그들이 겉만 번지르르 하게 꾸며진 온갖 종교행사의 주관자들이나 영은 죽어 있고 속마음들은 악한 것들로 가득 차 있어서 올바르게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음을 뜻하며,

 

불법이 가득하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늘나라의 합법적인 섬김의 방식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불법적인 자기방식, 자기의 의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기만족에 취해 있다는 뜻이며,

 

마지막으로 독사의 새끼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깨우치려고 영적으로 깨우친 자나, 선지자들을 보내면 그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여 사단의 편에 서 왔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이런 일들이 왜 이자들의 마음에 나타나게 되었는지 혹시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일(?)에 열심 있는 자들이었고 그들이 읽고 지키려 노력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거룩한 율법(?)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셨다시피 율법은, 율법자체의 의미와 하나님의 뜻도 모른 채 문자적으로 지켜온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더 거룩함을 지향하는 삶을 살기 위해 율법이 시키는 대로 부단한 노력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부단한 노력, 즉 <자기 노력>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의를 세우려는 인간적인 노력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시스템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철저한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있고 자신의 노력을 통해 구원이나 어떠한 생명의 도에 이를 수 있다는 이 오래된 인간적 믿음들, 즉 인간 스스로의 힘을 믿는 종교심, 그러한 바벨탑을 쌓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을 때 그들 가운데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의도였든지 사람에게 인정을 얻으려는 의도였든지 그것을 선택하고 지키려 노력한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는 결코 마음이 변화될 수도 하나님께 다가갈 수도 거룩해질 수도 없다는 한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이 분명히 깨달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노력과 의로 율법을 행하거나 혹은 스스로 세운 어떠한 윤리적 근거들을 바탕으로 거룩해지려고 (신학적 용어로는 성화나 구원을 이루려)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가 스스로 깨닫는 것은 그것을 더 하기 싫어하는 우리 안의 죄성 뿐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악한 열매들

 

마음의 진실여부와 상관없이 드러나는 선행을 강조하고,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요구를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온갖 자신이 해온 선한 노력들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취하려는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누가복음11: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 도다.’

 

‘(마태복음23: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런데 더욱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도 모른 채 율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두드러진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가 세운 의의 기준으로 스스로의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서 상대방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3:15)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로마서10:2)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도 지기 힘들어 했던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지움으로써 자기들처럼 그들의 마음도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에서 급속히 멀어지게 만듭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정죄와 의무감의 감옥 속에 사람들을 쳐 넣어 자신들처럼 죄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마태복음23: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마태복음23:13)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이렇듯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통해 힘겹게 쌓은 자기 바벨탑의 공력을 자기의 거룩함과 영광으로 여기며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자랑하려 했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죄의 항목들을 열심히 찾아내어 정리하고 상대방을 정죄하면서 자신을 상대적으로 높이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를 믿는 종교가 이와 같아야 한다면 고행을 행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영광을 취하는 수많은 이방 종교와 우리가 대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율법주의자들의 입술은 오늘날도 늘 주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주님을 찬양하지만 마음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의 경험이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자신들이 스스로 믿는 성경 지식과 이론을 떠벌릴 뿐입니다.

 

그들은 종교적 열심, 곧 어떠한 일을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며 자신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오지도 않는 행동들에 대해 당위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행하는데 열심을 내지만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선을 행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지 못합니다.

 

‘(마태복음15: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 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하나님을 <자기 방식>과 <자기의 의>로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이 오늘날 누룩처럼 온 교회에 퍼져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각처에서 노래하고 설교하고 선교를 하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핍박까지 받고 있다고 자기 멋대로의 소견을 펼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마음속에 나타나지 않는 삶 가운데에 살면서도 그들은 그 행위로 인한 선한(?) 자기 만족감에 빠져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 즉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삶(성화)은 우리가 따로 희생을 치러야 얻을 수 있다는 논리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과 은혜를 막아섭니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처럼 지옥 속에서 사는 자식들로 만들며 그의 제자들을 삼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자들을 엄중히 꾸짖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사도바울은 이런 자들을 향해 인간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하늘(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자가 아무도 없다고 선언하고 그런 헛된 노력을 중단하길 요청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렇듯,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이 바리새인의 후손들이며,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와 소망과 사랑의 능력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쳇바퀴처럼 도는 병들고 의무감으로 가득한 누룩이 가득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성경에서 증거 하는 바와 같이 확신하건대, 하나님은 그들의 열정적인 열심, 즉 바리새인, 서기관들, 혹은 열심파 크리스천들의 그 잘못된 열심을 미워하고 계십니다.

 

신약성경의 위대한 저술가요,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섬기고 사랑했던 사도바울조차도 한때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주의자들 중의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거듭나기 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으로 택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고, 죽이는 것 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채 <자기 방식>과 <자기 의>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악한 열매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자신의 생각과 의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을 싫어하십니다. 결코 그들의 공을 인정치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시하신 하늘나라의 합법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지 아니하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친히 강림하사 바벨탑을 허물어 버리신 것과 같은 불로 그들의 공력(업적들)을 소멸시켜 버리실 것입니다.

 

 

2. 바벨탑 사건의 역전, 새로운 법이 나타나다!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하사 모든 사람의 언어를 흐트러뜨리시고 사방으로 사람들을 흩으신 것과 비슷한 사건, 하지만 완전히 다른 사건이 오순절 날 다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강림하셔서 모든 사람이 다른 언어(방언)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도행전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리고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져서 사방으로 흩어져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쪽이 다 거룩한 뜻을 세우기 위해 일한 것은 사실이지만 극명한 차이점이 있다면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은 <자기 의> 곧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려 했고 자신들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같아지려 했지만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은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의>예수 그리스도를 세우기 시작했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같이 동역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께서 세우시려고 계획하셨던 법이 <법적 효력> 을 발휘하기 시작한 때입니다.

 

바로 성경이 증언하는 위대한 법, <생명의 성령의 법> 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로마서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모든 인류의 헛된 공력을 허무시려고 오늘날 소멸하는 불로 오신 성령님께서 지금도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들에 대해서 우리를 새롭게 훈계하실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요한복음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성령)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나를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말씀해 주실 것이며,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므로 너희가 나를 더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임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세상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심판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해 주실 것이다.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어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보좌 앞에서 다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우리에게 약속된 불로 세례를 주실 수 있었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새로운 성령의 법으로 이끄실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더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 의문에서 마음 판으로

 

이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법인 <생명의 성령의 법>에 따라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사망과 죄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던 모든 법과 통치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적인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에 다다르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육신의 연약함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을 이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로 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첫 모델로 자기 아들 예수를 육신으로 보내시고 다시 성령의 법에 따라 살게 하심으로써 육신을 좇아 살지 않고 성령을 좇아 살 때에 율법의 요구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마음으로도 이룰 수 있음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선물로 주신 성령을 따라 살게 될 때에 누구든지 율법의 요구 즉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저는 기존의 율법들과 성령의 법을 비교해 보면서 생명의 성령이 법이 어떤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을 포함한 성경 기자들은 기존의 모든 법(rule)을 기본적으로 <의문에 속한 법>으로 보고 있습니다.

 

의문에 속한 법이란 문자로 종이나 돌 판에 기록된 법조문을 뜻합니다.

글로 책에 기록된 법과 계명들은 모두 다 선한 의도를 가지고 제정되긴 했겠지만 그 자체로 이미 한계를 지니게 됩니다.

 

세상의 법들이 다 그렇듯이 그런 법들은 서로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최소한의 선을 제시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선한 무엇을 하라고 명문화 시키지 못하고 오직 악한 무엇을 하지 마라는 수동적 제재를 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 하지 말라고 정해 놓는 최소한의 규제들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 말라는 계명들은 도리어 그 규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자극해 더욱 많은 범죄를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때문에 <의문에 속한 법>으로는 결코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선악과도 먹지 말라 하니 그때부터 먹어보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입니다.

 

규제하면 할수록 더 그것을 하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라서 이런 의문에 속한 법으로는 사람을 하나님의 의에 결코 이를 수 있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성령의 법>은 다릅니다.

 

성령의 법은 애초에 종이에 기록되어 정의된 조문을 따르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규정화 된 어떤 틀을 내 생각 속에서 없어지게 만듦으로써 그 법을 범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의문에 법>이 마음속에서 먼저 사라지고 죽을 때에야 각 사람 마음속에 새롭게 조성되는 개인적이고 창조적인 성령의 법이 살아나게 됩니다.

 

이것은 이미 만들어진 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각 개인이 배워가는 새롭고도 능동적인 마음 판에 새겨지는 법 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율법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법들은 종이나 돌 판에 기록되어 그 지혜의 적용이 모든 사람들에게 획일화 되고 제한된 분량으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를 풀어줄 수 없는 한계에 갇히게 만들지만 성령의 법은 각자의 깨닫는 마음 판(영)에 무한하게 새겨지는 생생하고 능력 있는 법입니다.

 

‘(골로새서2:14)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 하셨느니라’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나타내시며 만 명의 사람에게 만 가지의 길을, 즉 각자의 기질과 성품에 따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도해 가실 수 있는 다양한 인격적 반응을 나타내 주심으로써 모두에게 생명적 지혜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세우신 법이지만 처음부터 제한된 지침만을 제공해 주는 돌 판에 새겨진 법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인격적인 반응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를 성령의 인격적인 지혜로 뚫고 나가며 더 이상 해결 될 수 없는 문제도 더 이상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할 그 어떤 방해물도 다 소멸시켜 버리십니다.

 

‘(요한일서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예수)에게서 기름 부음(곧 성령)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모든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다는 이 성경의 약속을 여러분께서 받으실 수 있으시길 빌겠습니다.

 

성령의 법은 우리 안에 역사하는 영으로 말미암아 마음으로 깨닫고 실천하는 법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누군가가 강요한다고 해서 지키는 법이 아닙니다.

오직 순전한 양심과 자원하는 심령, 믿음 가운데 행하게 되는 법입니다.

 

‘(빌립보서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율법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법들이 유치하고 초등학문이고 수준이 낮은 젖먹이 어린아이들의 법이라면 생명의 성령의 법은 고차원적이고 수준이 높으며 성령의 지각과 지혜를 가진 영적인 성인들의 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사람들의 관심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보이지 않는 마음에 관해 관심이 별로 없고 드러나 보이는 외적인 모양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앞서 밝힌 대로 수많은 크리스천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외형적인 신앙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이 있고, 심지어 자신의 외적인 기준으로 상대방을 잘도 판단하고 살아갑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서 상대방을 심판하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까지 지껄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들과 아주 다르게도 외적인 부분보다는 사람의 마음의 중심에 더욱 관심이 있으신 데도 말입니다.

 

‘(사무엘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율법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법들은 모두다 외모나 외형의 규제들입니다. 마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처럼 마음속에는 온갖 미움과 살인과 간음과 불법들이 가득한데도 율법을 잘 지켜 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많은 존경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외형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악한 것을 보시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판결하셨습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 합니까? 세상에서든 교회 내에서든 사람의 외모와 겉 행위만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고 상대방의 진심이나 마음 따위는 도무지 관심을 갖지 않는 병폐가 만연해 있습니다.

 

사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거나 많은 돈을 기부하거나 혹은 교회 내에서 많은 돈을 헌금하는 사람을 우러러 보고 존경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나 인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소외된 자(소위 LGBT,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성전환자, 창녀, 마약중독자등)들 같이 주류가 아닌 비(非)주류들에 대해서도 함부로 판단하고 심판하며, 혐오하고, 심지어 살인하기까지 서슴지 않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대다수 크리스천들이 내뱉는 레퍼토리 설교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동성애자나 창녀들은 저주 받았고 돌로 쳐 죽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라고 반문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합니다.

 

요한복음 8장 7절에는 예수님의 공의와 자비의 마음을 동시에 드러내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한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잡혀, 소위 율법을 어긴 죄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둘러싸여 돌에 처 맞아 죽을 위기에 쳐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대로라면 유대인들 생각에는, 그 간음한 여자가 돌에 처 맞아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들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지킨다는 의분이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물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모든 일 조차 사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간사한 바리새인들이 꾸민 일이었지만 말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모두 외모와 겉 행위를 따라 여자를 판단하고 여자를 정죄하고 여자를 돌로 처 죽이려 했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어떠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와 율법 안에 흐르는 정신을 똑바로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이 사람을 정죄하고 다치게 하고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실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선을 베푸는 자비와 사랑의 정신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아셨고, 그 여자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사정을 이해하려 하셨을 것이고, 또한 여자가 이렇게 죽기보다는 다시 살아서 앞으로는 창녀의 삶을 청산하고 위험하지 않은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며 생계를 꾸리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의 마음으로 여자를 정죄 자들의 손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사람들은 같은 율법으로 단지 외모와 겉 행위만보고 상대방을 정죄하고 심판하며 죽이려 했지만, 예수님은 같은 율법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보시고 자비와 사랑으로 상대방을 살리려 하셨습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로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누가복음15: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 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 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 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시고 식사하시는 것을 보며, 예수님이 저런 자들과 함께한다고 비판하고 정죄하고 있을 때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며 방탕하다 돌아온 둘째아들은 창녀나 세리, 즉 당시에 가장 천대받고 죄인 취급받던 계층의 소외된 자들을 뜻합니다.

 

맏아들도 나오는데, 맏아들은 방탕했던 둘째아들과 다르게 한 번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열심히 아버지를 섬겼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방탕했던 자기 동생이 돌아오고, 아버지가 그를 위해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고 품으로 받아들이자 아버지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화를 내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당연히 아버지의 행동은 맏아들이 보기에는 못마땅하고 말도 안 되는 처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권고를 합니다. “얘야 둘째아들은 네 동생이기도 하고 또 살아 돌아와서 이 애비의 마음이 이렇게나 기쁜데, 너도 내 마음을 이해한다면 같이 기뻐하는 게 마땅하지 아니하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맏아들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유하신 것이었고,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지킨들, 마음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니,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고, 불법을 행한 자들이란 말씀이며, 둘째아들은 비록 처음 행위는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났으나, 결국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깨지고, 회개하고, 거듭나고, 돌아와서는 비참하게 아버지께 머리를 조아리니, 하나님이 그의 잘못과 행위들은 기억치 않으시고 다시 그의 마음을 받아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높여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의 판단기준과 하나님의 판단기준은 너무나도 다르고 다릅니다.

 

‘(누가복음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세리)이 저(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렇듯 여러분도 자기의 선한 행위를 따라 착각에 빠져서 기도하고 있는 거만하고 자기 의가 가득한 저 바리새인과 같이 되지 마시고 스스로 죄인중의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세리처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애통해하며 자기를 낮추고, 이사야 선지자처럼 얼마나 자기 자신이 부정한 사람인지를 깨달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죽게 되었구나, 울며 가슴을 치는 겸손한 자가 되시어, 사람들이 인정을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의인이라 인정해주시는 크리스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의 기준과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의의 기준이 얼마나 다른지 아셨다면, 이제 올바르게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배우고 실천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람들을 진리와 생명으로 인도하거나 살릴 수 없고 죄와 사망으로 죽게 만드는 율법과 온갖 세상의 의문에 속한 법 대신에 예수님께서 새로이 제정하신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 살면서 앞으로 소개할 새 계명을 받아 들이기전에 우리 모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자유>의 문제입니다.

 

뜬금없이 민주주의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웬 자유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크리스천이든, 신앙인 대부분이 바로 자유하지 못하고 있고 자유가 무엇인지 깨닫지도 못하고 있으며, 율법에 종노릇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타깝지만 대다수의 크리스천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알고 있고 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정말로 예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내셔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런 말을 하는 자를 이단이라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로마서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러분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잘못된 열심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거나, 혹은 자기 의가 가득해서 마음속으로 남을 판단하거나 미워하며 사는 독사의 자식들이 아니라면, 이 진리는 정말로 쉽게 마음속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오히려,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반복하며 살아가다 원하는 이상(ideal)과 본인의 행동이 따라주지 못해, 늘 정죄 받으며 죄인이라 자책하던가,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창녀나 게이나 세리처럼 죄인 취급을 받고 있거나, 날마다 마음이 깨어져서 자신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더욱 더 큰 진리로 마음에 다가오고 기쁨과 감격에 눈물을 흘릴지도 모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자)는 더 이상 율법이든 의문에 속한 세상의 법을 어겼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판단하지도 않으시겠고, 죄를 묻지도 않으시겠고, 죄를 정하시지 않겠다는 얘기입니다.

 

헐, 이게 무슨 무법천지 같은 말인가요? 더 이상 혼란스러워서 얘기를 듣지 못하시겠다는 크리스천 분들께 조금 더 신중하게 성경말씀 그대로를 들여다보시고 그 말씀 그대로를 믿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율법으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외모로든 행위로든 따지지도 묻지도 않겠다는 이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단코 이 다음 장들에서 다루게 될 예수님의 새 계명을 받아들이거나 배우실 수 없으시고 또한 계속적으로 율법 안에서 종노릇하면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되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유한 친아들이 되실 수 없으십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성경을 읽을 때에 마음에 수건이 덮여있어서 못 보게 되었던 진리의 말씀들이 수건이 걷히고 보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고린도전서 3: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사실 많은 신학자들이나, 교회의 목사들은 이러한 진리를 알면서도 자유에 대한 경험이 없다보니 섣불리 설교하거나, 말하지 못하고 그들 머릿속에서 이론으로만 알고 있을 뿐, 다시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가서 신앙생활을 강요하거나 가르치는 교회가 대다수인, 안타까운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생명의 성령의 법을 근거로 정죄함이 없이 자유를 실천하려는 목사나 교회들도 나타나지만, 대부분 그 이상의 목표로 나아가는데 실패하거나, 혹은 방종으로 인해 타락하거나, 다른 종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받아서 참 진리를 더 경험하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안타까운 상황도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각자 성령을 통해 경험되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누구나 율법 안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거나,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늘 자신을 정죄와 회개로 채찍질하며 쳇바퀴 돌듯 교회를 다녔던 크리스천이라면, 성령 안에서의 이러한 자유의 신앙생활이 도저히 머릿속으로 그려지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두려움과 판단만 가득할 것임을 알기에, 뒷부분에서 구체적으로<자유와 사랑의 계명>에 대해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3. 아들의 영, 의무감에서 소원함으로

 

사실 어떤 사람이든 간에 - 진심으로 -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면 영접하는 순간 인격적인 성령님께서 그 마음에 즉시로 들어오십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 가운데 오실 때에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게 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나타나게 됩니다.

 

‘(로마서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우리가 자녀(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의무의 속한 율법으로, 즉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맺어진 계약 관계가 아닌 사랑으로 맺어진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하나님의 제안에 대해서 어떠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는 신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을 무서워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아닌 정죄가 없는(죄를 정하지 않는) 사랑의 법 아래로 옮기어진 것을 여러분도 이제 알아야만 합니다.

 

‘(로마서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앞서 설명했던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진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선택 할 수 있는 자유를 실제로 허락하시며 그런 자유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보게 하는지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성령의 법아래 거하는, 하나님의 친 아들이 된 우리에게 있어서는 실수와 뉘우침이라는 것이 성장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소이지 정죄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자유로 선택했을 때 그 열매가 비(非)생명적인 것이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돌아서는 경험, 즉 우리가 회개라고 일컫는 이러한 행동은 자유로운 아들 가운데서도 늘 존재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에게 그런 행위를 얼마든지 용납하고 계신다면, 자유 안에서 자라며 같은 성장 통을 겪는 형제들은 그러한 서로의 연약함을 더욱 더 잘 용납해야 합니다.

 

‘(마태복음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여러 차례의 되풀이되는 잘못에 대해서 결코 용서란 것이 없었고, 또한 당장에 드러나 보이는 유익함이 없을 것 같은 모든 시도들을, 소위 죄라는 이유로 막아버린, 그렇게 과거에는 판단력이 없던 어린아이를 보호할 목적으로 고용되었던 몽학선생은 이제 사랑과 지혜의 스승이신 성령님께서 오셨을 때 그 가르침의 교편을 내어 드려야만 합니다.

 

갈라디아서 본문에 등장하는 <몽학선생(Supervision)> 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주인의 상속자(아들)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학덕을 겸비한 노예 가정교사로써, 율법을 뜻하고 있습니다. 

 

상속자는 성인이 된 후(대략 16살 이후)에는 몽학선생의 감독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자유를 행사할 권리를 얻게 되는데 이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영적인 성인으로써 성령께 교육을 받을 자유가 주어졌다고 갈라디아서 본문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성령께서 자유를 허락해 주시면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동역 할 수 있으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택들을 통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것을 걱정합니다.

 

우리는 아들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그리스도의 약속과 믿음에 대해 이야기도 해보기 전에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면서 위험의 요소들만을 미리 강조해두고 겁을 줍니다.

막연한 염려나 두려움을 조장하는 말들로 자유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영적인 지도자의 참된 권면이 아닙니다.

 

자유에 책임이 따른다는 것은 영적인 면에서 볼 때 자신이 심은 것을 거두는 과정에서 우리가 심은 것에서 자라는 결과를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지, 다른 뜻이 아닙니다.

 

계집종의 아들들과 맞서라

 

우리 모두는 처음 양자의 영을 받고 생명의 법 아래로 옮겨졌을 때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들의 즉각적인 반응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거듭난 영혼들을 가만두지 않는 율법주의자들의 마수는 성령의 법 아래로 옮겨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무엇 무엇을 더 열심히 해야만 한다며 자기들도 능히 메지 못하는 무거운 멍에를 다시 어린 자녀들에게 씌어 기필코 종의 법과 사망의 법 아래로 끌고 들어가려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상황을 두고 이렇게 비유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아멘!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부요를 상속받고 경험하지 못할 저 육체를 따라 난 계집종들의 아들들이 아니라 믿음의 언약에 따라 난 자유한 아들들임을 믿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하는 그들로부터 우리의 자유한 신앙을 지키는데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 예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믿는 믿음이 여러분 안에 서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얻어진 이 (행위의 정죄로부터의) 자유를 누구도 다시는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자유를 위해 부르심 <calling> 을 입었다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약속을 마음으로 믿지 않고 화려한 지성과 자기 의로 나아가는 오늘날의 괴악한 가르침(누룩)들을 염려하십니다.

 

‘(마태복음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누가복음 12: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사도바울 역시 예수님처럼 율법주의를 누룩에 빗대어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것이 쉽게 들어올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재차 경고합니다.

  

‘(갈라디아서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오늘날의 율법주의자(선행주의자)들은 2000년 전의 바리새인들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경건의 모양과 구색이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 때문에 순진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쉽게 넘어가게 되며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을 체험도 해보기 전에 율법의 멍에 아래로 다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나야 할 영의 자녀들을 다시 육체의 계명 아래로 데려가다니요?

이런 일들은 매우 비통하며 가슴 찢을 만큼 안타까운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율법적인 삶에서 성령을 따르는 삶으로 옮겨 주시고 의무와 가식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을 때 저는 한국 교회와 전 세계에 퍼진 이 어마어마한 율법주의의 누룩을 보면서 제 눈을 의심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괴악한 누룩을 싫어하십니다. 누룩은 부풀리는 것이고 실속이 없는 것입니다.

 

‘(말라기 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성령이 주시는 사랑과 믿음 소망 안에서 행하지 않고 의무감과 당위감으로 점철되어 자기희생으로 쌓아 올리는 바벨탑을, 곧 자기 의로 드리는 섬김들을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다시 말하지만 결단코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설사 사람들의 인정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기에는 아무런 선한 열매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직 인간적인 열심과 자기만족만 가득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 늘 무거운 짐을 씌우려 하고 아직 마음으로 깨닫고 수긍하지 못한 일들에 대해 이것은 옳은 일이니 반드시 해야 한다고 자신의 종교적 지휘와 리더십을 이용해 행위를 강요하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이런 자들은 새로운 영적 도전, 곧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자유한 권면 자들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달리 우리의 멍에를 가볍게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이 오래 참고 기다리시고 바라보시는 것을 택하셨으며 그럼으로써 우리와 멍에를 나눠지신 분이시므로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으면서 무거운 멍에만 씌우는 율법주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셨습니다.

 

‘(누가복음 11:46) 가라사대 화 있을 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

 

성령은 율법주의자들처럼 우리를 정죄하여 의무감만으로 일하도록 채찍질하시거나 분명한 목표(비전이나 소망)도 없이 무작정 앞만 보고 뛰어나가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성령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우리 안에서 판단하게 하시며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심으로써 지표를 갖고 살게 만드시지만 우리를 죄의식 가운데 눌려 지내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주의 영이 우리 삶에 임재 하시면 우리는 자유해집니다.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그런 면에서 율법적인 삶과 사역은 도무지 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당위성과 종교적 열심과 비교의식만 가득하고 하나님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살아나갈 마음의 여유조차 주질 않습니다.

마치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말만 계속 채찍질 하다 좋은 경치는 다 놓치는 자들같이 그들의 열심 있는 행사가 미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나눠주시는 일의 분량은 그리 무거운 것들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우리 선생님께서는 눈높이 학습을 잘 아십니다.

우리를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각자의 영적 성장에 따라 알맞은 만큼의 일만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짐은 분명 새로운 짐이며 그 짐은 쉽고 가볍습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 멍에는 바로 정죄치 않으시는 사랑의 계명인 것입니다.

 

4. 새로운 계명, 사랑

 

이제 가장 중요한 단원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신 것을 아예 알고 있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그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십계명에 이어 쓴 11계명이나 12계명이 아닙니다.

 

그 계명은 율법의 모든 연약함을 보완하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게 할 완전하고도 새로운 (kainos ‐ 이전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 계명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NIV 번역본] (요 13:34) I give you <new command>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만약 사랑의 계명대로 살면 우리는 더 이상 모든 구약의 법문들을 일일이 지켜 행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계명은 이미 완벽하게 보완이 된 계명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새 언약을 따라 자녀 된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니라’

 

제가 성령 안에서 구원의 확신과 자유함을 얻게 되었을 때 저는 뛸 뜻이 기뻤습니다.

모든 거짓되고 무거운 멍에가 한 순간에 내 어깨로부터 벗겨졌을 때 그 기쁨은 누려보지 않은 자는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곳에서 한 발짝 앞으로 더 나가고자 했을 때 나는 미아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여태껏 나는 누군가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만 의지해 살아왔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으로부터 자유해진 내가 스스로 무엇을 선택하며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해왔던 모든 율법과 위선적인 일은 다시 안 하겠다는 내 각오와 기쁨이 끝나자 나는 심각한 무기력 증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 구할 때 성령께서 내 눈을 여사 이 구절을 보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사랑의 계명은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삶 속에 구체화되어 나타난 명령입니다.

 

저는 다시 성령께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했고 마음에 살아 숨 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나타난 후에야 모든 생명의 성령의 법의 운행하심이 내 삶 속에서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일서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 할지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율법)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사랑의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인도하시는 성령의 깨달음)이 벌써 비췸 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 이니라’

 

우리에게 주신 이 새 계명은 매우 재미있고 독특한 계명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사랑하라는 구체적인 명시가 자세하게 규정되지 않았음에도 성령을 통해 진실한 사랑의 실천이 있는지 그 마음을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맘을 다해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부연 설명이 전부입니다.

 

‘(마태복음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래서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사랑의 계명>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어떻게 사랑하라는 획일적인 틀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수동적으로 몇 가지 형태의 사랑만을 외식으로 행하고 자기만족을 일삼던 모든 위선자들을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계명을 겉모습에서 마음속으로 옮김으로써 언제나 하나님의 관심이었던 사람의 심령이 하나님을 닮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요청은 우리 모두를 무한대의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실천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자유자 이면서도 스스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여러 가지 모습이나 행동으로 구속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이런 사도바울의 모습은 당시 사랑의 계명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신도들에게 비난거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겉으로 드러나는 일관됨 없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율법적인 신도들은 사도바울이 거짓 사도라고 계속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치 않는 이 능동적인 사랑의 계명 아래서 용기 있게 행한 자신의 행위들에 대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정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선언하면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그 생명 가운데 거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 안에 거한다 하는 사람들이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거짓말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요한일서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우리가 영생이신 하나님과의 연합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깨달음으로 인도되어야 하는데 사랑의 계명은 이런 고차원적 요구를 우리 모두가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이룰 수 있다고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참으로 창조적이고 살아있으며 도전적이고 수준 높으며 그것을 지켜 행하는 자들에게 다양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케 하고 종국에는 영생이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에 도착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계명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다른 사람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이 같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외모나 행실로 정죄 받을 필요가 없으며 오직 성령이 깨닫게 하신대로 중심의 진실함을 따라 사랑과 섬김을 주님께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부터 잉태되는 생명적 자기규범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옮겨졌을 때 종의 의무 대신 주어지는 자유함으로 인해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질서의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이 새로운 질서는 우리를 문자적인 율법의 굴레로부터 자유케 해 줌과 동시에 자유가 방종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영을 붙들어 주는 생명적인 규범으로써 나타날 것입니다.

 

규범이란 말에 어떤 사람들은 반감부터 드러낼 것이 자명하지만 사실 누구나 나름대로 자신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규범을 가지고 삽니다. 단지 우리가 규범이란 단어에 반감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이 결정하고 스스로 따르는 규범이 아니라 대부분 타인의 기준과 판단에 의해 강요되어지는 규범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따라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이미 새로운 규범들로 우리 자신을 다스리기 시작하게 됩니다.

예를 한 가지 들어봅시다.

 

한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과 심하게 다툰 후 술을 마신 채 저녁에 통화를 했는데 자기도 기억하지 못하는 욕을 상대방에게 퍼부어 그 사람을 실족케 했다 합시다.

 

이 경우 만약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화가 났을 때 술을 자제해야겠다는 결심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이것은 율법이 아닌 오직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은혜가 계속 그에게 더해진다면 그는 이 룰 가운데 자신을 계속 잘 지켜 나갈 것입니다.

 

생명적 규범은 얼핏 보기에는 율법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바에 따라 자신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세우고 지키는 법이라는데 그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성년 된 자가 스스로 자신에게 적용하는 지혜의 법규인 것입니다.

 

아침 일찍 학교나 직장을 다니는 사람에게는 간혹 좋아하는 반찬이 나와 아침을 먹고 나갈 때에는 아침 먹는 것을 규범이라 말하지는 않겠지만 입맛에 맞는 반찬이 나오든 아니든 아침을 거르지 않는 규칙적인 습관 안에 자신을 두는 일은 건강에 유익이 될 규범이라는 것을 <사랑과 생명의 통찰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라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한 일에는 지혜롭고 악한 일에는 미련하며(로마서16:19) 생각하는 데에는 어린아이같이 되지 말고 어른이 되라(고린도전서 14:20) 했습니다.

 

아침에 밥을 거르면 혼쭐을 내겠다는 부모의 엄한 교육법(율법)에서 우리가 해방 되었다고 해서(갈라디아서 3:13,4:5)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파괴시킬 만큼 꼭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년의 자유를 이용해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더 이상 어린아이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법인 무형의 생명의 성령의 법(로마서8:1)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새기는 할례(생명적 규범의 세움)를 통하여 구체화되고 확연한 열매를 나타내게 됩니다.(로마서 2:29)

 

때문에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생명적 추구를 위해 자신의 의지를 어떤 틀 가운데 두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유익함을 위해 스스로 무엇인가를 <제재할 수 있는 자유>도 있음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공동번역](고린도전서10:23) 누구나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해서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 고 말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의 근본 목적은 그저 자유를 계속 지켜 나가게 하는 것이거나 생명을 파괴하는 악한 일을 변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수가 얼마든지 용납되는 자유함 안에서 성령님께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 내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 안으로 데려가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로마서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수많은 나라들이 자신의 자유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되찾아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자유함을 얻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에 불과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자유의 목적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출애굽 이후에 나타낸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다시 애굽(이집트)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며 열심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던 옛 모습이 차라리 지금의 무기력하고 게으른 삶보다 더 낫다 여긴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악을 더욱 행했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좇음으로써 갑작스레 주어진 자유로 인한 무기력과 불안함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신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약속의 땅인 가나안(하나님의 생명적 성장을 통해 영광에 참여하게 하는 일)에 대한 소망을 품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가 주어져도 그 자유를 생명의 기회로 삼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 자체를 숭배하는 잘못된 개념에서는 벗어나야 합니다. 율법과 의무로부터의 해방은 예수님께서 보혈의 피값을 치르고 얻어내셨을 만큼(갈라디아서 2:10-20)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과의 영광스런 연합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자유에 대해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는 자유와 은혜를 위한 복음적 교사들의 신령한 전투를 과소평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여전히 자유의 투사이며 지금도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교사들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단의 왕국에서 이미 해방된 자들은 검과 총보다는 새롭게 살아갈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더 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를 분명하게 경험한 자들에게 향수에 젖은 총과 검을 뽑아들고 자유의 구호를 외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유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갈 새로운 열정을 불태우고 싶어 하며 이미 해방된 자들과의 더욱 깊은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에게로 자라갈 수 있는 안전하면서도 튼튼한 새로운 영적 질서(골로새서 2:19) 즉 <사랑의 생명적 규범>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건강한 자유 안에서의 변화와 좋은 구속 안에서의 안정감 모두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생명적 규범과 율법의 차이

사랑의 생명적 규범을 세우고 지키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가령 우리가 아침기도시간을 7시로 정했다고 합시다. 어느 날 우리가 늦잠자서 9시에 일어났을 경우 시간표에 따르자면 우리는 기도 시간을 이미 놓친 것이 되는데 이때 우리는 아침 7시에 일어나 기도하는 규범을 지켜야 합니까? 아니면 말아야 합니까?

 

만일 우리가 시간표를 너무 주목해 본다면 생명의 규범에 따라 행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적으로 이것을 지키려는 자는 약속에 대한 의무감으로 이것을 이행하려 하기 때문에 7시가 넘은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되겠지만 생명적 규범을 스스로 지키려는 자들에게는 그 시간 이후의 기도라 할지라도 아침에 주님을 만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음을 알기에 늦게라도 기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나는 7시에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께 대한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할 맘이 나지도 않고 앞으로 아침에 기도하지도 않겠습니다. 나는 실패자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율법과 사단의 참소 안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옳습니다.

“주님 저는 매일 고정적인 시간에 일어날 수 있을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일어나면 주님 면전에 나오길 원합니다. 이것이 저의 규범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즉 사랑의 생명적 규범은 율법의 요구(사랑으로의 접근)를 이루어 줍니다.

 

비록 내가 늦게 일어났어도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사랑의 생명적 규범은 아무 열매 없이 행하기만 하는 법칙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규율을 지키려 하거나 아무 규율도 없는 상태로 살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에게 너무 높은 선을 요구하거나 너무 자신을 풀어놓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두 극단 모두가 효용이 없는 일입니다.

 

즉, 건강한 신앙의 삶을 위해서는 룰(Rule)과 자유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먹는 것은 살기 위해 지켜져야 할 당연한 룰(Rule)이지만 그렇다고 먹는 것이 의무는 아닙니다.

 

잠자는 것 또한 살기 위한 하나의 룰이지만 이것 역시 의무는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사실 모든 것이 규칙과 룰로 짜여져 있지만 만일 우리가 사랑의 생명적 규범 안에서 건강하게 룰을 지켜 나간다면 우리는 율법의 비(非)융통적인 법칙주의나, 자유의 방종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나치게 틀에 얽매이기 시작할 때 율법주의에 빠지지 말고 성령으로 자유케 되라고 경고하실 것이며 우리가 성령의 질서가 없이 너무 무질서하고 파괴되기 시작할 때에는 너를 제어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지나치게 자유를 강조하는 사람은 늘 새로운 것을 찾고 도전을 받지만 일정한 틀 안에 자신을 두지 않음으로써 영적 깊이가 없는 경향이 있으며 너무 율법적인 사람은 자신을 늘 일정한 틀 안에 가둬두려 함으로써 성령의 새로운 가르침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적 자유자는 성령님과의 협조 아래 틀을 세우고 자신을 그 틀에 스스로 가둘 수 있는 자며 필요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새로운 틀을 세워 곧, 그리로 이동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든지 자유하나 또한 질서가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의 신앙인 것입니다.

 

 

자유와 사랑의 조율

 

앞서 우리는 사람을 변화시키기에는 한계를 가진 초등학문인 율법과 세상의 모든 의문의 룰(Rule)에서부터 자유케 되어 사랑의 법으로 옮긴 후에는 어떻게 자유와 룰(Rule)사이에서 조화롭게 삶을 조율하며 생명적 규범 안에서 생활할 수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앞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은 마음의 소원함을 따라 행하는 진실함이며, 아무런 사랑과 소망의 심령도 없이 외적으로 보이는 외모나 행위에 가치를 두거나 기준을 두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언급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오늘날도 아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의무감이나, 두려움으로, 혹은 위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크리스천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일부러 위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은 있으나 율법적인 신앙을 배워왔고 외형적인 신앙이 습관화 되어있어서 마음을 보는 방법을 알지 못하거나, 내적인 열매를 맺기보다는, 외형적인 교회 시스템을 잘 따르는 것이라던가, 외적인 신앙행위 자체를 열매로 착각하고, 잘못된 누룩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크리스천들도 상당히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도 모른 채 율법주의와, 사람의 교리를 따라서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했던 사도바울조차도, 사실은 위선자가 아니라, 그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서,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싶어서 수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가두고 핍박하는 악행을 행했지만, 은혜와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사도바울이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던 마음을 아시고, 다메섹에서 그를 부르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전 세계적으로 크게 쓰임을 받는 주님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 분명하셔서 이렇게 비록 바리새파에서 교육받고 율법주의로 잘못 신앙생활을 해왔더라도, 진실로 마음이 정직하고 하나님께로 향해있는 자들을 찾으시고,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중에서도 니고데모와 같이 마음이 진실하고 경건한 자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무리들이 많이 생겨났고, 심지어 고넬료 같이 진실로 하나님을 찾는 이방인에게까지도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부어졌던 것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목사님 한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와는 교파도 다르고 교리도 달랐으며, 심지어는 일반적으로 많은 크리스천들에게는 소위 이단으로 알려진 교회에 속해있는 목사님이셨습니다.

저도 연약한 사람인지라 처음에는 그 목사님을 뵙고 얘기를 나누었을 때, 왠지 이단교회에 속한 목사님(사실 공식적으로 이단이든 아니든 저의 큰 관심사는 아닙니다) 이라는 생각에 무언가 좀 거부감이 들었고, 괜히 이상한 사람일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면서 제 생각은 금방 깨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믿음이라던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가 저의 생각과 같지는 않았지만, 그 목사님께서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섬기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순교를 각오하고 온갖 핍박과 위험이 난무한 중국이나, 러시아 등 위험지역에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다는 경험담들을 경청하면서, 감동으로 저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복음을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종이시라는 걸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간증 중에서 특이한 것은 본인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갈급한 마음으로 여러 교단과 교파를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어느 교파의 가정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성경적으로 생활하는 검소한 생활과 또한 성경적인 건강한 식생활에 감동받아, 이 교파에서 목사안수까지 받게 되었고, 심지어 본인이 예전에는 불규칙한 일상과 무절제한 식습관으로 인해 큰 병까지 걸렸다가 이 교파에 와서 성경말씀대로 식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한 후 모든 건강이 회복되었고, 또한 지금까지도 이렇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라고 믿는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교파에 대한 큰 신뢰를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우리교회식구들이 목사님을 식사에 초대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나름 목사님을 잘 대접하고자, 고기반찬과, 여러 반찬에 정말 진수성찬을 차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와우, 정말 왕같이 식사들 하시네요? 이런 식으로 계속 식생활을 하게 되면, 일찍 죽을 수도 있어요” 라고 우리에게 조언하시면서 무언가 마음이 불편해 보이셨고, 자유한 우리교회식구들은 그 조언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이 주신 음식 건강하고 풍성히 잘 먹으면 되고, 저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니까 왕같이 먹어야죠!” 하고 그 말에 반 농담조로 웃으면서 응수했습니다.

 

결국 그 목사님은 우리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농담으로 받은 것이 기분이 상하셨는지 식사 내내 말씀이 없으셨고 우리들도, 목사님이 우리의 마음과 사정도 잘 모르시면서 함부로 판단하시는 것 같아서 썩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목사님께서는 본인께서 생각하시는 성경적인 식생활(주로 채식위주의 식사)을 하시면서 병이 낫는 생명적인 일을 경험 하셨던 터라 다른 사람들도 본인과 똑같이 그러한 성경적인 식습관을 갖는 게 좋다고 여기신 것 같고, 또한 우리교회의 식생활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판단되어서 그러한 말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제가 섬기는 교회가 늘 이렇게 진수성찬을 차리고 먹는 것은 아니고, 때에 따라 격식에 맞게 상황에 맞게 식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교회도 지금의 믿음의 수준과 사랑의 생명적 규범이 확립되기 전에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무절제하고 불규칙적인 생활패턴과, 불균형한 식사와 과식 등으로, 크게 건강을 잃었던 경험이 있었고, 그 이후에 몇 달 이상을 병으로 고생하다가, 다시 주님의 은혜로 긴 시간에 걸쳐 건강한 식습관 및 규칙적인 생활들을 배우면서 현재는 가장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는 지각과 지혜들을 갖게 되었고 또 누리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잠깐의 욕심으로 과식을 하거나 또 병이 걸리더라도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음식자체는 우리들에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고, 자유와 사랑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생활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 목사님이 예전에는 무절제한 식습관으로 인해 건강을 잃고 나서, 현재는 나름대로의 성경적인 채식위주의 식생활로 병을 고치고 건강해졌다고 하시지만, 내 생각에는 이제 목사님이 많이 건강해지셨으니, 육류도 좀 드시면서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셔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목사님의 모습이 건강해보이기보다는 살이 많이 빠지시고 야위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못알고 있는 성경지식 중에서 다니엘이 채식만을 해서 건강해졌기 때문에 육류를 섭취하는 것보다 채식위주의 식사가 건강에 더 좋다 라고 많이 오해를 하게 되었는데, 현대에 와서 알려진 사실은 채식만 먹는 것보다 각 사람의 몸에 맞게 음식을 조화롭게 골고루 섭취하는 것이 영양학적으로 더욱더 몸에 건강하다고 밝혀진 것이 자명하고 상식이며 생선라든지 육류에도 사람 몸에 꼭 필요한 비타민이나 영양소가 포함되어 있어서, 이것을 섭취하지 않으면 심지어 건강의 불균형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떤 채식주의자들은 직접적인 육류를 섭취하는 대신 이러한 비타민이나 영양소를 약으로 대체하기도 한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실, 다니엘이 채식을 택한 이유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지 않기 위해서이고, 그런 채식위주의 식생활이 당시에는 우상 숭배자들과 구별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사람에게 생기와 건강을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주님께서는 다니엘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더욱 더 건강함을 허락 하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지식이 있었던 나는, 목사님이 한때는 자신만의 성경적인 식생활로 빛과 생명을 맛보았지만,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헌부대인 옛 생활습관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율법적이고 법칙적인 식생활을 가지고 우리교회를 판단하는 것이 싫었고, 그 목사님도 어쩔 수 없는 율법주의, 법칙주의자라고 속으로 판단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저를 책망하시면서, 로마서 14장을 묵상하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14:1)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습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비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그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할 수 있으시니,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날이 저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날을 더 존중히 여기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요,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며, 먹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먹지 않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다 주님이 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입이 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마십시다.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또 확신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부정한 것입니다.

 

그대가 음식 문제로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좋다고 여기는 일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

하나님이 이룩해 놓으신 것을 음식 때문에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먹음으로써 남을 넘어지게 하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

고기를 먹는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그 밖에 무엇이든지, 형제나 자매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대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 근거해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목사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려 하고 마음으로 판단하고 비난한 것에 대하여 분노하셨고, 너의 믿음과 지식 때문에 그가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바로 회개하였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제가 앞서 말한바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자유롭게 된 저를 더 이상 율법의 행위를 어겼다고 해서 정죄하시거나 책망하지 않으셨지만, 생명의 성령의 법안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웃이나 소자를 실족케 했을 경우에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은 죄목으로 엄청나게 화를 내시고 회초리를 드신다는 사실입니다.

 

즉 ,율법의 종으로써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를 가르치기 위해서 친아들(양자)로 대하시기 때문에 매도 드시고 훈계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그 목사님과 저는 비록 믿음과 지식들이 다르지만, 제가 하나님 앞에서 그 목사님께 가져야 할 사랑의 태도는 내가 믿음이 크고 지식이 더 많다고 자랑하고 교만할 것이 아니라 나의 지식과 자유(채소만 먹지 않고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믿음)가 그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었고, 또한 그가 작고 연약한 믿음과 잘못된 생각을 가졌을지라도 하나님은 사랑으로 그를 받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되면 그 목사님께도 이러한 자유와 사랑의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길 것이니, 그전까지 목사님을 사랑하며 잘 대우해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3:1)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렇게 각 사람의 경우에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게 자유와 사랑을 조화롭게 실천하고 조율하며, 무엇을 깨닫고 행해야 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저의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도 지금은 채소만 먹는 작은 믿음을 소유하고 계시고, 비록 상대방의 마음과 사정을 알고 판단하시기보다는 외모만을 보고 판단하는 지각의 수준을 가지고 계시지만, 때가되면 율법에서 자유케 되어서 생명의 성령의 법안에서 자유와 사랑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로마서 14장의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부정한 것은 없고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부정한 것이 진리임을 깨닫는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는 사도바울조차도 이 세상에 창조자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것도 부정한 것이 없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고, 그 당시에 유대인이 가장 죄악으로 여기고 부정하게 여겼던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조차도 천지에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우상조차도 돌덩이나 나무에 불과할 뿐이라서 그 앞에 바친 제물도 아무런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먹을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큰 믿음과 자유를 가지고 있던 사도바울께서도 만약 어떤 믿음이 약한 형제가 선생인 자신이(사도바울) 우상에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을 보면 실족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우려하면서, 그 형제 한명을 위해 차라리 본인은 평생 고기를 안 먹는 것을 택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랑을 위해 먹는 자유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고린도전서 8:1)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

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신이 없습니다.

 

이른바 신이라는 것들이 하늘에든 땅에든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은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 우상을 섬기던 관습에 젖어 있어서, 그들이 먹는 고기가 우상의 것인 줄로 여기면서 먹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약하므로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지식이 있는 당신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보면, 그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약한 사람은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 형제를 사랑하려하고 혹은 복음으로 형제를 얻기 위해서 잠시 우리의 자유를 보류하거나 절제하는 것이지, 우리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절제하면서까지 그 형제를 사랑하려고 했고, 또 그 형제가 적은 믿음의 수준에서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큰 믿음의 수준까지 성장하길 바라는 우리의 기대를 알아채고 그 형제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2) 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여러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사람들은 이러한 기대와 달리 전혀 믿음으로 성장할 생각도 없고 하나님을 배울 생각도 없습니다.

 

단지 그들의 믿음 없음을 변명하고 이기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상처나 안 받으려는 생각에 사랑을 행하려는 자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이유로 삼고 아무런 타당한 열매를 맺는 것과 상관없이 강요적으로 자유를 절제시키려하고 자신의 악한 목적으로 상대방을 이용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러한 대표적인 악한 사람들이며, 생명의 성령의 법안에서 활동하셨던 자유와 사랑의 선구자이신 예수님역시도 이렇게 배우려하지 않는 교만한 자들 앞에서는 굳이 본인의 자유를 절제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상식과 믿음을 깨부술 정도로 자유를 사용하셨던 분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문자적으로 철저하게 율법행위를 지켰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율법에서 금하는 부정한 죄인들과 예수님께서 어울리신다던가(마가복음 2:16),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던가(마가복음 2:23),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등(마가복음 7:2), 예수님과 제자들의 율법을 거스르는 자유한 행동이 눈에 가시였고, 또한 자신들의 정통신앙과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을 것이며, 예수님이 하는 행위들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어떻게든 자신들이 옳게 보이기 위해서 예수를 죽이고 없애려고 달려드는 악한 행동만 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5.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사람은 동성애자??

 

얼마 전 한국의 유명한 감독 김조광수 감독과 동성연인의 국내최초 동성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이 시작되고 얼마 후 한 남자가 오물통을 들고 식장에 난입해 오물통을 뿌리면서 “동성애는 죄악이야!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라고 외치며 소란을 피웠고 그 옆에는 활빈당 남성회원이 “동성결혼박살내자”라는 패널을 들고 김조광수 감독에게 달려들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기독교 교회 장로들임이 밝혀졌습니다.

 

이 보도를 접하면서 저는 씁쓸함을 감출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이 식장에 난입한 남성처럼 동성애를 죄악시 하고 있고 하나님이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미워하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저 남성처럼 직접적인 폭행은 하지 않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이미 동성애자들을 증오하며 정죄의 대상으로 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흑인의 해방을 위한 싸움이 2:1 의 싸움이었다면 여성의 해방을 위한 싸움은 1:1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과의 싸움은 8:2 아니 어쩌면 9:1의 가장 불리한 싸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글을 기술하기도 전에 이미 비판적인 눈으로 글을 읽어나갈 준비를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을 사람보다 수배나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제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권면처럼 우리가 무엇을 하지 마라는 법(율법)에 묶여 하나님의 신령한 일(사랑하라)에 참여치 못한 자가 되라고 부름 받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권면처럼 할 수만 있다면 모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겨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경주에 참여케 해야만 합니다.

 

고대의 도시들과 20세기 전까지의 유럽, 서구 사회는 동성애가 너무 공공연한 것이어서 사실 논쟁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었습니다.

 

고대 서사시의 동성애 기록들과 가톨릭 사제들간의 사랑에 관한 기록들, 외지로 파견 나온 군인들이 당연하게 재산으로 소유하고 다니던 남자 종(애인)과 전쟁의 시기(1차 세계대전)동안 늘 장려되었던 동성애 등, 그러한 문화들은 신학 안에서도 논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을 만큼 오랜 시간동안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이성애와 함께 당연하게 받아 들여졌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동성애의 문화가 하류로 밀려나면서 그것인 비정상적인 것으로 취급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흐름은 신학자들과 교수들의 힘을 받으며 더욱 더 심화 되었는데 이 줏대 없는 역사학적 관점에서 더욱 주관적인 논쟁만 산만하게 벌어지기 전에 서둘러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레위기와 동성애

 

많은 신학자들이 레위기 20장의 성결법과 그 내용을 압축하여 옮겨 놓은 디모데전서 1:19절에서 동성애 금지의 근거를 찾고 있습니다.

 

그 많은 나열된 죄의 항목 중 남색 하는 자는 죽이라는 조항만 골라내어 하나님께서 그러한 행위를 매우 <특별하게> 미워하시는 것처럼 과장하여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먼 봉사가 아닌 바에야 하나님께서 이웃집 아내(자신과 결혼하지 않은 여자)와 결합하는 것을 비롯하여, 근친상간과 짐승과의 교합, 그리고 심지어는 월경중인 여자와의 결합이나 부모에게 악담을 한 것조차 모두 한결같이 죽이라고 말하고 있는 앞뒤 구절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의 판단 기준대로라면 부모에게 욕 한번을 한 것이나 남자간의 결합을 한 것이나 똑같은 죄질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율법의 의로 따지면 하나님 앞에 의로울 사람이 없다는 것은 성경을 조금만 연구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은 하나님의 율법의 비추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형제를 정죄하는 외식 자들이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들의 악한마음을 드러내시는데도 말입니다.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자도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살인하는 자와 똑같으며 형제를 향해 라가(바보)라 한자도 역시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다 >

 

상황이 이러한데 누가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정결함을 운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저 자신이 옳다 여기는 바를 지킬 뿐이지 형제에 대한 심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야고보서 4:11)

 

우리는 자신의 삶은 은혜로서 대충 잘못을 눈감아주며 좋게 적용해 버리고 자신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편견을 더해 율법을 적용하는 이중 잣대를 버려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율법 아래 거하는 자마다 저주 아래 있으니 단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가 율법으로 형제를 대하려면 자신도 모든 율법으로 말미암아 먼저 의로워져야 할 것이며 (그러나 사도바울의 선언처럼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다 했으니 만약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율법의 최고수였던 사도바울을 초월한 자입니다.) 자신이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한다면 역시 형제에게도 은혜를 적용해야 합니다.

 

기억해 보십시요! 간음한 여자를 불러내 모세의 법(동성애를 정죄한 레위기 20장의 바로 그 법)에 따라서 그를 돌로 처 죽여야 마땅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돌을 버리고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동성애자들을 마치 자신보다 <더욱 특별한 죄인>처럼 취급하며 자신을 율법의 거룩한 수호자로 자처하는 자들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도 결국 돌을 던질 악독자 들입니다.

 

우리는 동성애자들이 우리보다 더욱 특별한 죄인이라는 생각(동시에 자신은 더 의롭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율법과 행위로 말미암아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똑같은 선상(저주 받고 죽어야 할 선상)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은혜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역시 하나님 앞에 모두 수평선상(아들을 믿는 의로 구원받는 선상)에 서 있다는 사실을 벌써 잊은듯합니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윤리적 우월주의에 빠진 바리새인들처럼 교만하여 중심을 살피시며 모든 선 악간을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괴상한 비교의식과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는 마음을 가지지 맙시다.

 

우리들 중 율법을 가지고 형제를 판단할만한 자격을 가진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으니 말입니다.

 

 

우상숭배와 동성애

 

우리가 이쯤해서 우리의 모든 죄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덮어 주시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권장하는 것은 아니므로 동성 간 결혼이나 동성 간 섹스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견해에 정면으로 부딪히게 됩니다.

 

정말 그러합니까?

 

우리가 신약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신약으로 넘어가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약의 4복음서에서는 안타깝게도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언급할 이유를 찾지 못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러한 추측은 뒤로 하고 위대한 선생 사도바울의 발자취를 쫓아가보면서 그의 생각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채택해야 할 태도를 찾아보도록 해보겠습니다.

 

표면적으로 바울의 서신 서들을 살펴 볼 때에는 바울 역시 동성 간의 성행위는 부끄러운 것이며 그것은 순리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피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로마서 1:26-27)

 

사도바울은 그러한 생활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여> <하나님을 미워하고 비방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의 말씀을 빌려 이런 자들을 사형하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급한 결론에 다다르기 전에 레위기 20장을 읽을 때처럼 눈뜬 봉사가 되지 않으려면 앞뒤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1장 26절의 앞부분을 살펴보면 이들이 단순히 동성 간에 섹스를 나눈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이방신을 섬긴 것, 즉 우상 숭배를 하는 것으로 인해 동성섹스를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바알 사제들을 비롯한 여러 우상을 섬기는 남자 사제들은 성전 안에서 신도들을 상대로 섹스를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과 <열왕기상 15장 12절>도 우상숭배와 함께 남색을 거론하고 있어 더욱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성간의 섹스와 달리 동성 간의 섹스는 당시의 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우상 숭배자들 사이에서 주로 (후천적으로 배우게 되는 것으로써) 뚜렷하게 비 우상 숭배자들과 구분지어지는 경계선이 되었고 그 당시에 남색은 결국 우상숭배를 상징하는 어떤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동성 간 섹스는 그 당시 우상 숭배자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므로 사도바울이 이들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 함께 거론해야만 했습니다.

 

구약의 여러 곳에는 <나무와 돌 아래서 저들이 음행하였으며> 라고 표현된 성경구절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이 표현들은 모두 우상숭배와 성적 연관성을 함께 지적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사도바울이 언급한 우상 숭배자들과 달리 동성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미워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비방하지 않는 자들, 즉 우상 숭배자가 아닌 자들에 대해서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경우 사랑 없이 행해지는 육체적 쾌락을 미워했습니다.

때문에 남색을 간음이나 창녀와의 음행과 함께 묶어 늘 지적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0) 음행하는 자며 남색 하는 자며’

 

‘(고린도전서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 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미국의 대표적 크리스천 작가인 필립 얀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외 다수 저)는 그가 게이 교회에 참석했다가 그들이 드리는 뜨거운 사랑과 열정에 찬 예배를 보면서 엄청난 혼란을 느끼게 되었다고 자신의 책 속에 그 심경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매우 신실한 사역자로써 여김 받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돕고 살리는 일을 한 동료 사역자가 단지 커밍아웃을 한 이후 사람들에게 사단의 자식처럼 정죄 받는 것을 목도한 내용, 그리고 그 동료 사역자가 수많은 정신치료와 약물치료와 기도를 오랜 시간동안 행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았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통을 털어놓았던 내용들을 함께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동성애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이 진술한 것처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1:28)

 

우리는 비슷한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했던 베드로의 경험을 따라가 보면서 도움을 얻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더럽고 무식한 이방인들>은 결코 성도가 될 수 없다 라는 고정관념에 굳게 사로잡혀 있었던 자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줄기찬 설득으로 인해 베드로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보따리의 환상) 주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도 자신들처럼 방언과 예언을 터지게 하시는 것을 보고 거룩한 성령을 이방인에게도 부어 그들을 <자신의 거룩한 성도>로 삼으신 하나님께 겸손히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됩니다.

 

‘(사도행전 10: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베드로가 경험했던 것처럼 그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이방인이 절대로 거룩할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을 것 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도 구원에 참여케 해주셨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람들을 외모로 취하시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실한 마음을 보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베드로처럼 이방인이던 동성애자들이던 어떠한 종류의 사람들을 가리켜 함부로 속되고 더럽다고 말할 자격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소돔의 진짜 죄는 동성애가 아니다?

 

많은 교사들이 소돔은 동성애의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유황불로 심판을 받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늘날 성령께서 하시는 일과 매우 상반된 주장입니다.

 

오히려 동성애자들은 지금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께 축복의 불(성령)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정죄가 두려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의 수를 헤아려 보면 그 수는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을 것입니다)

 

사실 소돔뿐만이 아니라 고대의 모든 도시에는 동성애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아니 만연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라는 단어 자체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도시 중 하나가 소돔이었으니 소돔이 동성애자들로 말미암아 특별히 죄악의 성으로 지목되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소돔은 다른 도시들처럼 우상을 숭배함으로 로마서에 기록된 대로 이성에 대한 것이든 동성에 대한 것이든 성적인 문란함이 가득한 곳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유다서 1:7)

 

그러나 소돔이 특별히 다른 성들에 비해 하나님의 눈에 띤 죄목이 있었다면 그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돔에 대한 견해를 들어봅시다.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권능을 베푼 가버나움 마을이 회개치 않자 소돔도 너희보다는 낫겠다! 라고 이야기하시며 화를 내십니다.

 

그렇다면 가버나움은 어떠한 도시였습니까? 그 도시는 예수님께서 많은 치료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마태복음 8:5,14, 9:1, 요한복음 6:55) 예수님을 끝까지 냉대한 도시였습니다.

 

‘(마태복음 10: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다른 학자들이 어떻게 소돔을 바라보던 간에 분명 예수님은 소돔의 죄가 손님을 냉대한 악함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통적으로 손님을 천사처럼 여겨 대접하는 것을 덕으로 여겼고 예수님 역시 손님과 이웃에 대한 친철함에 대해 늘 강조하고 계십니다.(소자에 대한 냉수 한 그릇, 꾸러 온 자에게 묻지 말고 줄 것,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도 줄 것 등)

 

소돔에서 롯이 천사들을 맞이했을 때 온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천사들을 내 놓으라고 윽박지릅니다.

 

그때 롯은 고민 끝에 자기 딸들을 군중에게 내어주고자 하는데 만약 몰려든 자들이 일반적인 학자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정욕에 불타는 동성애자들이였다면 왜 롯은 여자인 자기 딸을 손님 대신 내주고자 했을까요?

 

롯이 성난 군중 앞에서 될 성 싶지도 않은 제안을 할리가 없으며 자기 딸들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순결한 여자임을 군중들에게 강조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소돔의 군중은 남자든 여자든 외부인에 대해 학대를 자행하는 자들이었으며 그것이 성적인 학대로 이어질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롯은 그것을 염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소돔의 죄가 동성애다.’라고 주장하는 말도 안 되는 견해는 이쯤해서 접기로 합시다.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

 

시편에는 다윗의 이러한 외침이 있습니다.

 

‘(시편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 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

 

이러한 고백이 나올 수 있게끔 만든 경험, 즉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깊은 우정의 상징이 된(그러나 실은 그 당시 문화적 상황 속에서 동성애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옳은)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에 대해 여러분은 자세히 알고 계십니까?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서 정서적으로 다윗과 매우 깊은 연합의 상태에 있었고 (마치 아담이 하와를 향해 이는 내 살이요 뼈라고 말한 것과 같이)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어 다윗을 끝까지 보호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친구 이상의 특별의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8: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통하여)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 하였더라’

 

‘이 말을 듣고 사울은 요나단에게 버럭 화를 냈다. 이 몹쓸 <화냥년의 자식>놈아! 그래 네가 이새의 아들<다윗>놈하고 <단짝>이 된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네 망신이 어미 망신이 될 줄 알아라.’

 

위와 같은 비난은 성경 전체를 통해 부적절한 성적 관계에 대한 책망의 방식으로 일관되게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과 요나단의 깊은 관계를 알고 심하게 질투를 느낀 것입니다.

 

‘[공동번역](사무엘상 20:34) 요나단은 화가 나서 자리를 떴다. 그리고 축제 이틀째 되는 날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아버지가 다윗을 욕하였으므로 마음이 몹시 아팠던 것이다.’

 

여러분께서는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이웃이나, 형제를 사랑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무엘하 1:26) 나<다윗>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는 가슴이 미어지오.

형은 나를 즐겁게 해 주더니. 형의 그 남다른 사랑,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었는데.’

 

요나단은 다윗의 즐거움을 위해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깊은 관계까지 정서적이고 육체적인 연합(결합)을 시도했을 것이라는 예상은 조금도 억측이 아닙니다. 이미 위에서도 사울의 말을 들어보면 다윗과 요나단이 그런 관계였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단과 다윗도 동성 간에 깊은 사랑을 나누고 혹은 동성애 관계를 했기 때문에 사단의 자식이라 비난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에서는 다윗을 두고 말하기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말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도 다윗을 사랑하셔서 그의 혈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6. 본성과 양심에 근거한 율법

 

 

이러한 저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 해석은 그렇지 않다! 라고 때를 쓸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땅에는 그만큼 율법의 누룩이 가득히 퍼져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저는 쐐기를 박는 성경적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제공하고자 합니다.

 

의문에 속한 법을 폐한 예수님께서 우리로 늘 살아있는 생생한 하나님의 지혜(성령의 법) 가운데 우리를 두셨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동성애에 대한 확실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가르친 가르침 중에는 남자가 머리를 기르면 그것이 자신에게 욕이 되는 것을 본성이 가르친다고 말한 구절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14)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하지만 재미있게도 구약을 살펴 볼 때 일부러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기르는 남성들도 있었는데 삼손과 같은 나실인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도리어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것을 하나님 안에 거룩한 것으로 여겼으며 실제로 삼손의 긴 머리에는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삼손의 본성(양심)은 사도바울의 본성(양심)과는 다른 것이었습니까?

 

분명 그렇습니다! 삼손의 본성은 그것을 욕되다 하지 않고 도리어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중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습니까? 많은 윤리적 거부반응들이 그것을 제지하려 하고 있지만 문화적 변화의 대세는 제제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대에 따라 바뀌어 가는 본성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우리를 자극하는 다른 본성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사도바울의 시대와는 다른 본성입니다.

 

이런 것을 사도바울은 이방인들은 본성으로 행할 때에 자기 양심이 자신에게 율법이 된다 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본성(양심)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 때의 지침과는 달리 예배당에서(구교가 아닌 신교) 도리어 머리에 무엇을 쓰면 여자든 남자든지에 상관없이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 거슬림이 되는 새로운 율법(룰)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본성에 근거한 가르침은 시대마다 달라집니다. 그리고 성경을 잘 알고 있던 사도바울 또한 이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본성에 근거한 양심의 율법을 제정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르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감에 있어 자신의 양심의 거리낌 바 된 것이 마음에 남아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며 사도바울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거리낌 바 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 장애물을 미리 제거하여 원활한 예배를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시 문화에서 남자가 머리를 기르는 것은 대중적으로 매우 큰 거리낌이었을 것이며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은 것 역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튀는 행위>였습니다.

 

마치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교회당 안에서 모자를 눌러쓰고 앉아 어떤 사람이 예배드리는 것을 볼 때 예배드리는 많은 성도들이 그것이 눈에 거슬려(혹은 신경이 쓰여) 예배에 집중하기 힘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시 그때 그 문화 속에서 사도바울은 고민한 것입니다.

 

바울은 리더로써 교인들의 일치감을 불러내기 위해 쓸데없는 일에 관심이 분산되는 것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2000년 전 고린도 교회에 그 나름의 유익한 율법을 제정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르친 이 율법도 영원히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상황들에 똑같이 적용될 수 없을 것임을 성령의 법 안에 있었던 사도바울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 당시 동성애가 학대적인 섹스와 노예 상인, 우상숭배에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사도바울이 남색을 경계하는 율법을 만들어 가르쳤다 할지라도 그러한 시대적 양심에 따른 율법적 지침이 영원한 지침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의문(한번 기록되어 굳어진 형태의 가르침)을 따르지 말고 영의 생생한 가르침을 따르자고 외치던(로마서 7:6) 사도바울은 더욱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과 관련된 논쟁에서 이러한 자신의 신앙적 관점을 드러냅니다.

 

당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모든 교회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룰(율법)을 제정하는데 이는 성령으로 인해 나타나는 은혜와 지혜를 최소한 해치지 않으면서도 교회의 일치감을 끌어낼 수 있는 선상에서 제시되었습니다.

 

사도들은 각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논쟁거리(그러나 실상 비생산적이고 쓸모없는 논쟁들)들을 잠재움으로써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생명적 경주에 참여케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도행전 15: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 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 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그래서 사도들은 우상의 제물은 먹지 말라고 온 교회에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그가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그는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도리어 믿음이 강한 자는 <사도들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제사에 바쳐진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바울 자신도 포함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이러한 담대한 믿음과 자유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새로운 지식과 깨달음(성령의 법)을 근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가 <알고> <확신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는 대체 무엇을 안 것일까요?

그는 만물이 다 깨끗하다는 것과(로마서 14:20)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사실 신은 하나님은 한분밖에 없다는 것을 안 것(고린도전서 8:5)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도 하나님의 것이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우상에게 바쳤다 할지라도 사실 진짜 우상은 존재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깨달음에 이른 것은 아니고 어떤 사람은 낮은 믿음 안에서 그것을 먹는데 거리낌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먹든지 먹지 않던지 주를 위해 하는 것이면 마음의 동기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다 선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선언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정의된 한 가지 행동 외에 다른 행동으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한 동기 안에서 다양한 행동패턴이 나오는 것을 다 이해하고 받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그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쯤해서 여러분이 본성과 문화적 배경과 상황적 양심에 따라 우리의 생활적 지침은 분명 바뀔 수 있으며 획일적이고 변하지 않는 문자적인 율법의 적용(의문에 속한 생활)이 도리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납득했을 것이라 여깁니다.

 

또한 사도바울이 모든 교회에게 비방과 오해를 받아 가면서도 헬라인에게 헬라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자유자에게는 자유자처럼 다가가 한 영혼이라도 건지려 했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성도 안에 존재하는 <율법위로 온 완전케 된 율법> 즉 사랑의 계명과 성령의 생명의 법인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고유의 문화들을 존중하셨고, 시대적 본성이 다른 것을 인정하셨으며, 그 시대의 수준과 양심에 맞추어 말씀하시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의 고유문화와, 시대적 본성에 따라서, 하나님은 그 민족 수준에 맞는 율법의 말씀들을 주셨고 부모가 아이를 돌보듯,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모세 때에 받은 그 율법 말씀 그대로를 문자적으로 지킨다면, 지금의 문화와, 시대적 본성과 양심에도 어긋날 뿐더러, 또한 그렇게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도 아닌 것입니다.

 

레위기의 성결 법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가지 율법을 주셨는데, 부정한 음식을 먹는다던지(돼지고기, 지느러미나 비늘이 없는 물고기 등),곰팡이가 피어있는 집에 들어갔다던 지, 여자가 월경을 하는 등, 이러한 자들은 부정한 자들이어서 정결케 되지 못한 채 성소에 오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오늘날도 문자적으로 지켜서, 식사모임이나, 회식 때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돼지 삼겹살이나 혹은 아구찜이나, 추어탕(지느러미나 비늘이 없는 물고기) 같은 것을 먹고 다음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던지, 집구석 어딘가에 곰팡이가 피어있는 지도 모른 채, 주일성소를 지킨다던지, 여자가 월경 중에 예배를 드렸을 경우, 구약의 율법대로라면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해야 하는 부정한 죄인들인 것입니다.

 

‘(레위기 15:31)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이 부정을 타지 않도록 하여라. 그들 가운데 있는 나의 성막을 부정하게 하였다가는, 그것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율법주의자들은 이러한 부정한 죄인들을 하나님이 그저 증오하고 미워하신다고만 생각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처벌하실 것에만 관심이 있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들조차 두려움으로 떨며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며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는 어린 자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혹여 잘못된 음식이나 균에 감염된 것을 먹어서 몸이 상할까봐 염려하시고, 또한 곰팡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그 당시의 위생상식과, 낮은 지각수준으로 인해 병이 걸릴 것을 우려해서 곰팡이가 집에 피면 밖으로 나와 있으라고 명하셨으며, 여자들도 월경을 시작하게 되면 몸이 약해지면서 공공의 장소나 성소같이 예배드리는 곳에서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있기가 불편할 터인데,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남자들에 의해서 여자들의 인권이 무시될 것을 우려하여(그 당시 여자의 인권이라는 것은 한 남자의 소유재산, 즉 물건처럼 취급되어졌습니다) 월경 때에는 쉬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큰 뜻을 그 당시 그 누가 알기나 하였겠습니까?

 

사실 오늘날에는 과학이 발달하고, 위생과 건강에 관해 지식이 많아져서 돼지고기이던,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아구찜이던, 추어탕이던, 독이 들어있는 복어든 성경의 레위기에서 먹어서는 안 되는 부정한 음식들을 위생적이고 안전하고 청결하게 만들어 먹을 수가 있게 되었고, 집에 곰팡이가 피면, 모두들 집밖으로 도망갈 필요 없이 페브리즈 한번 뿌리면 싹 사라지게 만들 수 있으며, 여자가 월경을 하더라도 생리도구들이 발달하여, 좀 더 활동하기가 수월해져서 월경을 이유로 굳이 교회를 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쓰여 있는 내용이 모두 진리이므로 문자적으로 따라서 해야 한다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위해 우리가 우리의 문화 안에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새로운 계명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을 지키지 못하고 다시 옛 구약의 법인 율법아래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율법에 흐르는 정신은 문자적인 명령과 복종, 그리고 두려움이 아니라 바로 자비와 사랑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가야 합니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노인이든 어른이든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것, 그것이 사랑이며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며 사랑할 때 연합이 일어나는 것이며 미움은 분리하는 것이라는 깨달음 안에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지혜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주신 과학이라는 선물을 통해 동성애가 후천적이라기보다 선천적인 것임이 점차 밝혀지고 있습니다. 아직은 후천적이라는 시각 속에서 동성애를 연구해 온 것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선천적이라는 시각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많고 우리 역시 그 결과를 더욱 신중하게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사회 통계학적으로 볼 때에도 모든 시대에는 10-20% 정도의 동성애자들이 늘 존재해 왔으며 많은 경우 양성애자의 형태를 띤 사람들이 함께 존재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동물들 중 동성애를 나누는 개체들이 많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며 동성애 자체를 동물들의 본능 속에도 심어놓으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동성애를 선악 간에 나누려 하지 않으신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어미 뱃속에 있기도 전부터 우리의 형질을 조성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우리가 성경 그대로 믿고(시편139:16) 동성을 사랑하게끔 창조된 사람이 있다 하면 우리는 그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까?

 

기도가 부족해서 의지가 부족해서 너는 죄인의 길을 선택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선천적 창조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가 여기 있습니다.

 

‘(요한복음 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제자들은 그의 특별한 출생의 원인을 자신의 죄나 죄의 유전에서 찾으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특별한 조성에 대해 이제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녀가 부모를 떠나 하나 될 것이라 선언하셨으나 사도바울은 자신이 독신의 부르심이 있고 또한 예수님도 말씀하시길 스스로 고자 된 자도 있으며 모두가 그리될 수는 없지만 그런 자도 있음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9:10)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창조하실 때 각자를 고유하게 만드시고 각기 기능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일반적인 법칙이 있으나 그것에 모두가 편입되지 않는다 해서 그들이 정죄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께서 직접 선언하셨던 것처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라는 질서를 만드셨듯이 모든 창조 질서도 결국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보편적 질서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 무조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은 유치하기 그지없는 수준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를 독특하게 창조하신 대는 어떠한 목적과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성애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도바울은 동성애가 하나님의 일반적인 질서에서 벗어난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로마서 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사도바울 스스로 지킨 독신 또한 하나님의 일반적 질서에서 이미 벗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로마서 1장 27절의 진정한 의미는 동성애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생활 구조가 남자 중심적인 사회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버림받거나 사랑을 잃을 때 여자가 당해야 할 비참함과 아픔에 대해 사도바울이 지적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버드대학교 앨프레드 킨제이 이학박사가 내놓은 미국의 권위 있는 성 보고서인 <킨제이 보고서>에서도 나와 있고, 또한 동성애자 커뮤니티에 접수된 많은 사례가 있듯이, 오늘날도 많은 수의 중년이나 노년 부부 중에서도 현재 배우자에게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이성에 대한 회의감이나 증오가 깊어진 사람 중에 동성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동성연애를 하는 남편들이 많이 있는데, 진정한 사랑보다는 현실에 대한 회피나, 육체적 쾌락만을 쫓아가서, 가정이 깨어지고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앞서 말했듯이 사도바울은 이성이든 동성이든 육체적 쾌락만을 위해서 사랑 없이 행해지는 관계를 비판하는 것이지, 동성애 자체를 비판한 것이라는 생각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쾌락주의적인 후천적인 동성애자가 아닌 선천적이고 경건한 동성애자들도 그들의 특별한 출생과 삶의 경향성으로 인해 한탄하고 정죄만 받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특별한 삶을 통해 당당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신 계획일 테니 말입니다.

 

한번은 어떤 크리스천 형제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본인이 성경에 나오는 자유를 잘 알고 있고, 성경지식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기뻐서 믿음으로 말이 통하겠거니 하고 자유와 사랑의법과 동성애의 관한 주제로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형제가 경악하면서 동성애자들은 나쁜 죄인들이고 속히 그들의 행동(?)을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흥분해가며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길, 물론 쾌락만을 추구하여 사랑 없이 행동하는 동성애자들도 있겠지만, 모든 동성애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며, 만나본 게이 중에서는 남자를 좋아하긴 하지만, 육체적 쾌락만을 즐기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형제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무조건 동성애자는 지옥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격과 마음과는 아무상관도 없이 말입니다. 그 형제는 자기의 의로 인해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형제가 갑자기 담배를 피기 시작했습니다. 본인은 자유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고 하나님이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담배 피우는 것은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또 성경에는 담배를 금하는 구절도 없으니 굳이 본인은 거리낄 것이 없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형제에게 성경에 있는 이런 구절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 하니라’

 

제가 말하기를 “형제님! 위에서 뜻하는 하나님의 성전은 우리의 몸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 더럽힐 수 있는 것은 담배입니다.

 

담배는 우리의 폐를 더럽게 하고, 발암물질인 타르, 니코틴(중독성),일산화탄소 등 이외에 수천가지의 물질이 들어있습니다.

담배로 우리의 몸을 더럽힌다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담배는 폐암을 유발시키는 원인이며, 다른 암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그 외에 위암, 췌장암, 유방암(여자에게 해당),갑상선암 등 여러 암 발생의 원인이 됩니다.

 

형제님께서 자유해서 담배 피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정죄를 받지 않는다 해도 자유의 본래 목적은 사랑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지, 육체의 쾌락의 기회로 삼는다거나, 자신의 건강을 잃으면서까지 자유를 쓰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행동이며,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비록 율법으로는 정죄 받지 않더라도 사랑의 법에 의해 형제님은 하나님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형제님도 하나님의 성전인 자신의 몸의 건강을 해치는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시지요? 이렇듯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라도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데(갈라디아서 2:16), 하물며 형제님께서 다른 지체들의 성 정체성이 어떻든 간에 함부로 그들의 인격과 마음도 모르면서 죄인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 아닐까요?”

 

이런 저의 논리적인 얘기에도 형제는 내 말을 듣지 않고, 그저 본인이 기성교회에서 배운 대로 동성애자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며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저는 씁쓸함을 뒤로하고 형제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난의 사건

 

제가 성경을 통해 깨달은 것은 그것입니다.

바로 사랑이란 진심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 마음속에 존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한 질그릇 속에 들어온 보배로운 하나님의 마음이며 고린도전서 13장 후반에 나타나는 온전한 하나님의 형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매우 재미있는 사건 하나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아들 오난이 그의 형수와 성관계를 맺다 죽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난을 죽인 것은 레위기에 근거한 윤리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늘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마음으로 사랑을 행하는지 아닌지를 보십니다.

 

오난은 아들이 없는 형수를 위해 성관계를 맺다가 형수가 행여나 아들을 얻게 될까봐 그것을 염려해 질외사정을 합니다.

 

‘(창세기38:9) 그러나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고 오난은 형수와 한 자리에 들었을 때 정액을 바닥에 흘려 형에게 후손을 남겨 주지 않으려 하였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크리스천들이나, 신앙인들은 유대인의 이러한 통례를 허용하진 않습니다. 아들을 얻기 위해 형수랑 자는 일은 도리어 우리나라에서는 불륜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당시 문화권에서 자식 없는 과부의 설움은 어떠한 것이었겠습니까? 평생을 정절을 지키며 남편도 없이 타인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근근이 살아가며 홀로 늙어가야 할 처지가 아니겠습니까? 키우는 자녀가 없는 그의 존재는 이미 그의 가족 구성원 안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오난은 형수의 아들이 아버지 재산에 대한 장자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런 그의 형수를 사랑하지 않는 이기적인 마음이 하나님의 화를 산 것입니다.

 

여기서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레위기의 윤리관이나 동성애자를 비난하는 구실로 늘 쓰이는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간의 이상적 결합관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단지 이것뿐입니다. 모든 문화와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께서 한 인간의 삶을 깊이 사랑하시어 그 사람이 처한 문화와 인식의 테두리 안에서 그의 감정을 최대한 보호하고 지키시려 노력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며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동성애 참고자료 및 문헌

 

 

<창조적 본능에만 따라 살 것이라고 믿고 있는 동물들에 대한 동성애 보고>

 

예1)

미국의 동물학자인 부르스 바게밀의 10년에 걸친 연구결과에 따르면 동성애를 하는 동물은 적어도 470종 이상이라고 합니다.

작게는 벼룩부터 딱정벌레, 갈매기, 펭귄, 돌고래, 해마뿐만 아니라 타조와 기린, 그리고 오랑우탄, 원숭이까지 육해공 동물 전역에 걸쳐 있습니다.

 

예2)

1930년대 영국의 에든버러 동물원에선 사육사들마저 이성 커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임금펭귄 두 쌍이 나중에 알고 보니 암컷끼리와 수컷 끼리로 이루어진 동성 커플이었던 적도 있다는군요. (한겨례21)

 

또 서양에선 옛 부터 숫양은 정욕의 대명사처럼 쓰였는데, 1997년엔 미국 캐럴대의 앤 퍼킨서 교수는 암컷과는 관계를 맺지 않고, 수컷끼리만 관계를 가지는 숫양이 전체의 10%에 이른다는 놀라운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예3)

미국의 연구진이 유전자 조작을 통해 기온이 상승하면 동성애 상태로 변할 수 있는 과실파리를 만들어냈다고 미국 과학원회보가 17일 보도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호프 시티 국립의료원 신경과학과의 기타모토 도시히로 박사 팀은 과실파리의 신경단위인 뉴론에 기온에 민감한 변형 유전자를 주입한 결과 과실파리가 기온 변화에 따라 이성애와 동성애 상태를 오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기타모토 박사는 '변형 유전자가 주입된 수컷 과실파리를 따뜻한 기온 속으로 옮겨놓을 경우 이 유전자가 신경단위인 뉴론에서 이어지는 전달체계를 교란시켜 다른 수컷을 갑자기 유혹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유전자 조작 과실파리는 기온이 섭씨 30도 이상 오를 경우 암컷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고 주의를 수컷 파리에게로 돌렸으며 다른 수컷이 접근해올 경우 역시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유전자 변형 과실파리는 그러나 차가운 기온 속으로 다시 옮길 경우 원래의 이성애 상태로 되돌아갔다고 연구진은 밝혔습니다.

이 같은 연구결과는 뉴론의 활동이 수컷들 간의 관계를 제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기타모토 박사는 '이번에 발표된 수컷대 수컷의 관계는 기온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비정상적인 개발의 결과는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1만3천600개의 유전자로 이뤄진 과실파리의 유전자지도는 2000년 해독됐는데 과실파리의 유전자는 인간과 유사해 과학자들의 주된 연구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10절과 디모데전서 1장 9절-10절에 대해>

 

고린도 전서를 보면,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하는 사람들,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부드러운 남자’(희랍어로 말라코이malacoi)나 ‘침대의 남자’(희랍어로 아세노코이타이 arsenokoitai)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 을 열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중 이 두 단어, "부드러운 남자" 와 "침대의 남자",가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 공동체를 정죄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증거로 사용된다.

 

이 단어들에 대한 보통의 번역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심각하다. NRSV는 "말라코이"를 "남창"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도 비슷한 번역을 따르고 있다.

 

"말라코이"의 문자적 의미는 "부드러운 남성"인데 이는 일반적인 남성의 이미지의 기준을 벗어나는 행위나 모습을 나타내는 남자를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겁이 많거나, 게으르거나, 수동적이거나, 퇴폐적이거나, 사치스럽거나, 여성적이라는 이유로 남성적이지 않는 어떤 남자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아르세노코이타이"를 번역한 영어판 성서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더욱더 심각하다. 대부분 동성애적인 표현인 단어들인 "소도마이츠," "동성애자," "동성 강간자들” 등으로 번역되었다.

 

디모데 전서 1:10절의 악행에 대한 리스트에서 우리는 같은 언어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린도전서의 행악 자들에 대한 리스트와 매우 비슷하다.

 

여기에서 영어 성서들이 "아르세노코이타이"를 역시 동성애자들과 연결시켜 번역하고 있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주 명확한 사실은 "남자"와 "침대"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 복수형태를 가지고 있는 "아르세노코이타이"를 바울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느냐는 것을 알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단어를 사용하는 그 어떤 고대 그리스 문서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바울이 스스로 만들어 썼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단어를 쓴 어떤 다른 문서도 없으므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의 "아르세노코이타이"를 번역한 영어 성서들이 번역가들의 편견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위험할 정도로 성서의 본문을 LGBT 사람들을 정죄하는 논조로 번역해 놓았다는 것이다.

 

출처 : 동성애와 신약성서

양승애 (시카고 신학교 신약성서학 교수)

 

 

<저명한 성경학자 “바울은 동성애자들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

 

세계적인 암호 해독가이자 성경연구가인 마이클 우드씨는 바울이 동성애를 비판하기는커녕 공개적으로 옹호했다고 지적했다.

해독 불가능한 REDOC-2 암호체계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 마이클 우드씨는 성경학계에서 기원전 1세기경 신약성서 저자들이 사용한 단어 및 기호의 뜻을 보다 정확히 해독하는데 이바지해 왔다.

 

최근 그는 동성애에 대한 신약성서의 입장이 기존의 생각과 충격적으로 다르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현재, 같은 견해를 가진 신학자 및 성경학자들도 늘고 있는 추세이다.

 

“사도바울의 글을 정확하게 직역하면, 그가 동성애를 비난하기는커녕, 당시 종교적 관점에 맞서 동성애자들을 옹호했다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 자신의 저서 <pauline Paradoxes Decoded>에서 광범위한 문서를 제시하고 있다.

(참고링크:http://michaelwoodcrypto.com/)

 

또한 우드씨는 홈페이지를 통해 <소년강간범과 율법>이라는 매우 중요한 부분도 공개하고 있는데, 이장에서 그는 기존의 성경해석과 달리 사도바울이 arsenokoites(아르세노코이타이)라는 희랍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왕국에서 제외된다고 한 것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소년강간범이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세인트 멜리터스 대학교의 크리스 틸링박사도 arsenokoites를 동성애가 아니라 소년강간범으로 해석한 마이클우드씨의 분석이 언어학적으로 정확하다고 한다.

 

“우드 씨는 1~2 세기 희랍어, 히브루어 문서에서 arsenokoites가 실제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방대한 양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arsenokoites는 고대뿐만 아니라 마틴 루터 시절은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년 강간범>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어를 전공한 윌리엄 버그 박사의 말이다.(프린스턴 대학교)

 

비록 기존의 성경연구가들은 바울의 편지에 동성애가 세 번 언급된다고 주장하지만, 우드씨는 동성애가 단 한 번 밖에 언급되지 않는다고 한다. 즉, 기존의 성경연구는 arsenokoites를 두 번에 걸쳐 오역했다는 것이다.(고린도전서 6장 9절, 디모데전서 1장 10절)

 

즉, 합의에 의한 성인간의 동성성교가 언급된 곳은 한 군데 밖에 없는 것이다. 우드 씨는 바울이 동성애를 언급한 것은 오로지 동성애자들을 당시의 종교관점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를 입증할 문서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우드 씨의 저서 <pauline Paradoxes Decoded>에는 동성애 관련 사항 외에도 수많은 수수께끼들이 해독되어 있다.

 

우드 씨는 이 책에서 바울의 율법(희랍인들의 동성애 금지법뿐만 아니라)을 모두 분석했다. 사해문서의 편집자이자 저명한 성경학자인 제임스 샌더 씨는 율법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성경학에 있어서 가장 난해한 수수께끼 였다고 밝혔다.

 

우드 씨는 자신이 바울의 율법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공통점을 발견했을 뿐만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한 문장으로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우드 씨의 단독문장 해결법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대로 하면 모든 게 해결 되요. 정말 놀랍습니다. 우드 씨께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의 책을 읽고 나서 바울의 편지와 관련된 부분을 모두 다시 읽어 봤는데, 단 한 군데도 모순 된 곳이 없었어요. 우드 씨가 정말 놀라운 일을 해냈습니다.”

 

“학계에서는 율법에 대한 바울의 시점에 대해 혼란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도 희랍인들의 동성애 금지법 즉, 레위기의 동성애 금령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잘못 해석해 왔지요.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레위기를 근거로 동성애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바로 바울이 동성애자들을 공개적으로 옹호했다는 뜻을 담고 있어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마이클 우드 씨는 성경 암송 대회에서 수많은 상을 탔었고, 젊은 시절에는 해독이 불가능한 REDOC -2 시스템을 개발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후일 그는 암호해독학과 성경을 접목시켜 획기적인 발견을 통해 오늘날 세계적인 성경학자들의 시각을 바꾸고 있다.

 

우드 씨의 암호해독학에 대한 열정과 종교관이 융합된 계기는 바로 사해문서였다. 그는 암호해독의 경력을 이용해 풀리지 않던 고대의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사해문서를 해독하면서 획기적인 사실을 발견한 우드 씨는 성경과 암호해독학을 접목하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까지 밝혀낸 고대 수수께끼들은

<The jerome Conspiracy>,<The Hidden Bible>, <The Jesus Secret>,<Breaking the Roman Code>,<Paul on Homosexuality> 등의 저서에 소개되어 있다. 또한 그는 최근 저서 <Pauline Paradoxes Decoded>는 사도 바울이 집필한 종교율법 중에서 암호같고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들을 풀어냈다.

 

출처 : 북미, 미국 타비소 줄로 기자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다?>

 

제일 먼저 "후천성 면역 결핍증 환자 중 남성 동성애자가 많고, 성적 지향은 선천적이지 않다"는 주장의 경우 대한에이즈예방협회 홈페이지만 들어가도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데 남성 동성애자보다 이성 간 성 접촉으로 감염된 사람이 더 많으며, 성적지향의 선천성 여부는 아직 입증되지 않은 것입니다.

 

"2011년(1~12월) 888명의 내국인 HIV 감염인이 새로이 확인됨 감염경로가 확인된 감염인은 총 522명으로 남성 481명, 여성이 41명이고, 모두 성 접촉에 한 감염으로 확인됨. - 남성(481명) : 이성 간 성 접촉 263명(54.7%), 동성 간 성 접촉 218명(45.3%) - 여성(41명) : 이성 간 성 접촉 41명(100.0%) 누적HIV감염인 현황. 감염경로가 확인된 6,964명 중 성 접촉에 의한 감염은 6,907명(99.2%)임.- 6,907명 중 이성 간 성 접촉은 4,175명(60.4%), 동성 간 성 접촉은 2,732명 (39.6%)임"

 

‘성적 소수자는 전염성 있는 질병을 옮길 수 있고, 성 문화를 문란하게 한다’ 는 주장 역시 사실과 다릅니다. 특히 동성애자가 전염성 있는 질병을 옮긴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WHO는 1992년 동성애를 질병 목록에서 삭제한바 있습니다.

또한 성 문화를 문란하게 한다는 것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추측성 발언으로 동성애자 및 성 소수자에 대한 인권을 침해하고 차별을 조장한다고 보여집니다.

또한 에이즈는 '콘돔'을 사용할 경우 100% 예방되며, 국내 에이즈 관련 단체들도 에이즈는 바이러스가 원인이지 동성애가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는 다는 점, 오히려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동성애자에게는 자신이 아우팅(자신의 성 정체성이 자의가 아닌 타인에 의해 밝혀지는 것) 됨으로 인해 발생하는 인권침해를 우려해 검사를 기피하게 되고, 이성애자는 에이즈를 자신과 관련 없는 질병이라고 생각해 검사를 기피하게 되면서 에이즈에 대한 국가의 관리를 어렵게 만든다는 점 등을 바탕으로 본다면 이 같은 내용은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동성애자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심어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처 : 대한에이즈예방협회

 

7. 죄의 개념은 누가 창조했는가?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웃을 비판하는 마음을 가득 가지고 삽니다.

 

‘옳지 않다.’라는 개념은 우리 마음속에 늘 존재하는 선과 악의 윤리적 판단기준에서부터 나오는 결과물입니다.

 

선하다는 개념이 있는 곳엔 필연적으로 악하다는 개념도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악의 개념을 끄집어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 죄라는 것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들이 심각하게 묻지 않아서 그렇지만 사실 창세기 어디를 살펴봐도 죄라는 개념은 하나님이 창조하여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는 개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이 죄의 항목을 구체적으로 명시해 주었다고 믿지만 사도바울의 주장처럼 율법은 우리가 죄 아래 거하고 있었던 것을 드러낸다고 했을 뿐 율법이 죄의 개념 그 자체를 새로이 창조해 낸 것은 아닙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율법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 안에 죄라는 개념이 들어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라는 놈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대충 생각하는 것과 같이 이것은 악하다고 절대 주권자에 의해 이미 결정지어졌기 때문에 그 행위를 범한 자는 무조건 악하다는 지배적 논리와 순환논리의 오류가 아닌 어떠한 부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제적인 힘을 지칭하는 단어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지 않게 이끌고 하나님과 멀어져서 자신을 믿고 의지하게 만드는 생각의 구조(이것을 성경은 죄의 능력 혹은 죄의 권세라 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언제부터 들어와 조성되었습니까??

 

바로 선악과를 선택해 먹은 때 부터였는데 선악과를 먹은 이후 사람은 죄의 개념에 본격적으로 붙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개념이 아니라 철저히 사람과 마귀가 만들어낸 합작품입니다.

 

사람은 선악과를 먹은 이후(자신이 하나님만큼 지혜롭다 믿기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보다 자신의 옳고 그름(선악)에 근거하여 판단기준을 세우기 시작했고 이것을 마귀가 옹호하고 도우면서 결국 하나님의 지혜를(생명나무) 떠나 사망에 이르는 죄의 능력이 발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 마음에 선이라는 개념과 함께 악이라는 개념도 함께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결국 악의 개념은 하나님이 애초에 불어넣어 창조한 적이 없는 사람 안에 수치심(자기 양심에 근거한 정죄감)이라는 느낌을 낳게 했고 그들은 결국 잎사귀로 몸을 가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왜곡시켜 바라보기 시작했고 스스로 만든 악한 개념 속에 하나님을 대입시켜 마귀가 하나님이 그들을 죽일 거라는 말에 동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결국 스스로의 죄책감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아름답고 선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하신 것처럼, 근원적인 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악하게 보는 거짓된 눈(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인간의 거짓지혜)이 우리 심령에 생기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선포와는 다르게 우리가 선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악할 수도 있다는 거짓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영혼의 타락이 시작된 것이며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 자체가 바로 타락입니다.

타락이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어떤 행위 자체라기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하나님과 교제가 끊김으로써 근본적인 생명적 친교에서 떨어져 나와 서서히 죽어가는 상태 그 자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의 기준을 어떤 행위에 두려하지만 그런 가치판단은 시대마다 늘 다르게 적용됐고 비중은 달라지며 기준도 많이 틀렸습니다.

 

이러한 모호한 성경해석과 가치판단에 대해 우리가 가진 지나친 선의 실천과 그에 대한 자만감에 대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질타하시고 계십니다.

 

‘(마가복음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사실 사람이 자기의 행동과 다른 사람의 행동을 비교해서 혹은 성경의 어떠어떠한 구절을 찾아내어 지키는 것을 근거로 자기 기준에 따라 누군가는 선하고 누군가는 악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그런 판단 기준 자체에 이미 예수님께서 동의하실수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은 이런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계속 드러내게 합니다.

 

스스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지정하고 항목별로 정리해 지키며 하나님 앞에 자기 의를 세우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정한 교제와 자유케 하는 성령의 교제에 참여치 못하게 하고 계속 수치심과 양심의 걸림을 만들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이 죄의 능력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인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로마서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과연 하나님은 우리의 그 어떤 특정 행위가 미워서 우리가 그것을 행할 때 우리로부터 멀어지려 하시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Never 입니다.

 

하나님의 본래 마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도 서슴없이 찾아 나서시는 그런 마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옹졸한 사랑과 수치심이 하나님조차 옹졸하게 만들고 그분의 사랑을 평가 절하해 스스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자꾸 멀어지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 스스로 수치심을 느낄 때도 사실 하나님은 그를 바로 정죄하거나 벌하지 않고 아담아 하고 간곡한 말투로 그를 찾으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타락했다는 증거는 이 따뜻한 음성을 듣고도 하나님이 진노하셨을 꺼라 나름대로 상상하며(이 생각은 이미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자기시각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죄인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으로부터 내려지는 타락된 가치판단 - 즉 율법에 근거한 판단기준임)하나님을 피해 달아나게 하는 이 마음속 수치심이 그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가 죄의 개념 아래로 떨어진 순간부터 우리는 마귀음성에 더 친숙해지고 그에게 종노릇을 하는 두려운 노예생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 행위는 악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묶고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 시각이 늘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듦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행위가 아니라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악하고 부정적으로 볼수록 주님 앞에 더 나가지 못함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온전한 사랑 가운데 거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선악과) 아래 거하지 않고 성령과 그리스도(생명나무) 안에 거하는 자는 성경이 증거 하는 것처럼 주의 영 안에서 자유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한 믿음의 모험을 하는 자는 하나님께로 접붙여져 그분의 생명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온 세상 사람들은 애굽(이집트)에서 종살이하다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처럼 자기의 신분(제사장과 나라)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이 세운 죄와 사망의 법(로마서 8:2)의 개념아래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온 인류가 죄의 권세 아래 여전히 묶여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진정 주님이 우리영혼을 단순히 사후에 구원받게 해주신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통틀어 죄의 권세아래서 영원히 해방케 하셨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진정 죄와 잘못된 양심의 기준에서 나와 새로운 기준과 방향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제가 던질 수 있는 도전은 이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죄라는 개념이 들어와 하나님과 아담(사람)을 효과적으로 갈라놓기 이전에 그들은 어떤 마음을 받아들이고 살았습니까?

 

그들은 생명나무(예수 그리스도)를 먹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평화롭고 아름다운 교제를 하나님과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영 속에 다시 회복되었음을 저는 알고 있고 또한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다른 표현으로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여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능력이 생명의 성령의 능력으로 대체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죄하는 법아래 속하지 않았으며 완전한 생명력으로 옮기어졌으며 새로운 가치기준으로 살게 되었고 이것이 우리를 복된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 바로 성경의 약속입니다.

 

여러분은 창조 때의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하였던 그때의 우리의 삶의 기준이 무엇이었을지 그것을 바로 궁금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의의 시각이며 의의 열매(생명나무)입니다.

 

우리는 다시 새롭게 살기 위해서 눈을 부릅뜨고 성경구절을 암기하고 마음이 내키는 항목을 찾아내 맹목적인 실천을 하기 이전에 옛 창조의 때처럼 아름다운 내면적 형상을 재발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해 가야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생활에서 겉으로 들어나는 행동의 변화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심령의 변화)가 최우선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율법에서 벗어나, 즉 성경의 조항적 항목으로 자기만의 룰을 세워놓고 실천하며 스스로 만족해하는 초등학문적인 삶에서 벗어나 새 계명을 주신대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알게 해달라는 기도로부터 시작하여 죄로부터의 분명한 구원이 우리 영혼에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8. 선악과를 주신이유

 

[질문]

- 하나님은 모든 걸 아신다면서 왜 아담이 시험에 들도록 선악과를 만드셨나?

- 하나님이 우리에게 병 주고 약주는 쇼를 하신 것인가?

- 하나님은 우리를 직접 시험하시는가?

- 하나님은 왜 비효율적이게도 첫 인류를 저주하셨는가?

 

[답변]

먼저 물리적 시간대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우선 우리는 본질 하나님(I AM WHO I AM)을 우리의 공간적 개념 안에(3차원-점, 선, 면으로 이루어진 공간) 가둬 둘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 공간과 시간적 개념을 창조해 내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은 3차원보다 더 높은 상위 공간(삼천상, 3차원 이상의 세계)에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아래 있는 우리가 그분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우리의 인식 안에서 그분을 묶어 두려 해도 그것은 소용없는 논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락된 방법은 본질 하나님이 어디에 계셨느냐가 아니라(when, where) 우리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함께 동행 하시는 그분의 영(Spirit of God)의 속사정(heart)을 우리가 파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대 안에서 그렇게 행하신 목적과 의도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면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도 하나님의 마음은 어디에서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존 신학에 의존해서 하나님이 선악과를 주신 의도를 사단에게 시험받게 하고 그리고 후에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하셨다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고난을 통해 거룩함을 얻는 자녀를 얻고자 한다고 생각하거나 은혜(예수님을 통한 치유)를 기다리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둘째 시각은 약간 다른데 (하나님께서 이해하시는 것이 동시간대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나님께서 아담이 죄를 지을지 모르셨으며(혹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아실수도 있지만 본인 스스로 일부러 능력을 제한함으로 모르시게 돼서)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한 그 일을 보시고 후에 구원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병을 주고 다시 약을 주겠느냐 라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이 두 시각이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는데 두 시각 다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신본주의고 어느 쪽이 인본주의고의 말들은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일단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시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면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스스로 시험치 않으신다고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베드로가 당할 시험을 아셨듯이 하나님도 아담을 사단이 시험하실 줄 아시고도 선악과를 만드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줄 미리 예견(先見)하신다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우리에게 시킨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의지와 뜻의 방향성을 분명히 아시기 때문에 사람보다 넓은 지혜와 지각으로써 그 될 일들을 분명하게 아시는 것뿐입니다.(시편 139:3, 마태복음 6:32, 요한1서 3:20, 요한복음 21:17)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굳이 그런 일을 행하셔야 했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시키신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리 될 줄은 알고 계셨고 이점이 우리 모두가 간과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성경이 기록하기를 아담을 통해서는 모든 인류에게 죄가 들어왔고 두 번째 아담(예수)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생명이 들어왔다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처음 지으신 사람에게 축복을 더 주질 못할망정 왜 만들지 말지 인류의 조상을 죄의 종으로 만들 장치를 해 놓는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왜 다시 구원자를 보내는가? 이것은 마치 어떤 음모가 숨겨진 자작극 같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점이 바로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점입니다.

 

진정한 축복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를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소모적인 논쟁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베드로는 밀알 까부르는듯한 시험을 받는 게 더 나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 이른 것처럼 시험에 들지 않도록 그 피할 시간과 장소를 베드로에게 명했을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의 연약함은 언젠가는 사단의 시험에 기필코 들고야 말겠지만 말입니다)

 

사단의 시험으로 베드로의 자만심은 처절하게 꺾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아닌 첫 아담 안에 존재했던 연약함은 무엇이었으며 왜 하나님은 그 연약함으로 인해 아담이 스스로 시험에 들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왜 최초의 인류를 하나님을 사랑 하도록 만 만들면 되지 그렇지도 않을 수 있게 만들어서 인간 스스로 죽음에 빠지게 했느냐고 많은 사람들이 항의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점이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인 것입니다.

 

이 연약함은 다른 피조물들이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악과를 주신 것은 구원, 치유 이런 목적 이전에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라도 잠시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이치입니다.(본래 진리는 어린아이들에게 속한 것입니다. 머리가 복잡하게 스스로 잘난척하는 지식 자들에게 도리어 천국문은 열리지 않는 법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린 아이에게 몸에 해로운 사탕이나 콜라를 주거나 혹은 몸에 좋은 음식을 준다고 합시다.

 

아이에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물론 좋은 판단력으로 아이가 옳은 선택을 꼭 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만 어찌되었든 이것을 우리는 자유의지를 사용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의 판단력을 의심해서 매일 건강하고 좋은 음식들만을 주면서 그중에서만 선택하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그는 매일 좋은 음식(생명나무)을 먹을지라도 근본적으로 부모의 강요로 인해 아이의 자유의지와 판단능력이 성장할 기회가 통째로 박탈당하는 셈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의지의 상태를 축복이라고 착각하고서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심으신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자꾸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에덴에 생명나무만 있고 선악과가 없었다면 아담과 하와는 당연히 영에 좋다는 그 생명나무만 늘 먹어야 했겠지만 그들은 새장에 갇힌 앵무새의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든 아니든 그저 그렇게 동행해야만 하는 조건에 갇혀 있어야 한다면 이곳에 도무지 자원하는 심령 안에서 나오는 진실한 사랑이라는 것이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진실로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정말 그렇지 않는 길도 여신 것입니다.

 

성경이 지지하는 것을 쭉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무조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자원하는 심령 가운데 하나님과 사랑으로 함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기 전까지 사람은 아들이란 칭호를 감히 쓰지도 못했으며 짐승과 같은 <종> 이란 단어만 사용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또한 우리가 주를 따르기 위해 지는 종 된 십자가조차도 성경은 사랑을 통해 나타나는 자발적인 것임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성경은 빛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좇아가게 되어있고 어둠을 사랑하는 자는 사망에 이른다고 기록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가 로봇처럼 시체처럼 그저 종처럼 하나님 곁에 머물러 있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망도 생명도 맛볼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당신이 너무 좋다 해서 억지로 당신의 집에 감금해 놓는 것, 그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바깥세상은 절대 보여주지 않고 ‘자기 집이 모든 것이다.’라고 속이며 가둬놓는 것과 같은 일을 하나님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를 바보처럼 로봇처럼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가 스스로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다른 것을 포기하면서도 <나>를 선택하는 진실 되고 뜨거운 사랑은 평생 꿈꾸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사랑한다면 먼저 자유를 줘야 합니다.

정말 자신이 좋은 사람은 결국 자신의 집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신 것뿐이며 그런 사랑이 모든 이치에 부합 합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것은 아담과 하와 이야기의 끝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은 아담이 애초부터 생명(성령, 지식)이 없어서 죄를 지었다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 그 코에 생기(생령)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와 생명적인 동행을 계속 하셨던 것으로 기록되었으며 그에게 생명지식(생명나무)을 늘 공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빠진 것은 영생하시는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사랑의 관계>였습니다. 그들에게 없었던 것은 생명(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태어난 아들의 영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생기)을 체험한 자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늘의 빛 비추심과 은사를 다 맛보고도 하나님을 배신하고 돌아선 자들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받고 성령체험을 하고 한때 하나님을 사랑했어도 결국 하나님을 떠나고 돌아서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들이 그 마음에 즐거워하는바(어둠)를 결과적으로 쫓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예수, 생명지식, 참 지혜)와 함께 선악과(행위에 근거한 율법, 양심, 윤리의식, 자기 의)를 제시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셨다 해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의무가 아닌 사랑의 관계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함으로써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떠나든지 선택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꿈꾸시던

<두려움 안에서 나타나는 순종> 이 아닌

<사랑 안에서 나타나는 자발적 순종과 동행>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개, 돼지나 여타 동물들과 그저 똑같은 존재이며 어떤 이유로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의 신분에 참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9. 나의 이야기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저의 삶이자 간증들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살면서 사랑과 자유의 실제적인 적용들에 대해서 참고하시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마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저의 구체적인 경험들을 거리낌 없이 최대한 설명해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저는 한국의 감리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또한 저의 고모님, 고모부, 외할머니께서도 모두 목사님이셨고, 주변 환경이 다분히 기독교적인 배경가운데서 저는 생활하고 성장하였습니다.

 

자연적으로 부모님을 따라 교회도 참석하여야했고, 음악을 좋아하시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저와 형제들은 어렸을 때부터 모두 악기를 배웠기에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나 성가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타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그러하듯이, 저도 주일학교나, 목사님 설교를 통해 성경말씀을 듣고 배웠고, 또 나름대로 율법들을 실천하면서 거룩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술이나,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아니하였고,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였으며,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를 나갔습니다.

 

혹여 죄라고 생각되어지는 일들을 행하였을 때에는 그것을 용서 받기위해 홀로 산에 올라가서 눈물을 뿌리며 통곡을 하면서 회개기도를 하고 밤이 되어서야 내려오곤 하였습니다.

 

이렇듯 나의 마음속에는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섬김의 마음과 두려움이 있었고, 나중에는 꼭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군대를 가서도 나의 열정적인 신앙생활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매일 밤 자기 전에 화장실에 가서 홀로 기도를 하고 내무반에 와서 취침을 하였고, 새벽 기상 전에도 홀로 도서관에 가서 기도를 마치고 왔습니다. 이러한 저의 습관적인 패턴을 눈치 챈 다른 장병들이 저에 대한 호기심으로 밤마다 어딜 가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같은 내무반 장병들이 휴가를 갔다 오거나 하면 여자를 만났던 경험을 영웅담처럼 쏟아내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주로 헌팅을 하거나, 집 창촌 같은데 가서 성경험 했던 일들을 늘어놓곤 하였습니다.

 

주위 장병들은 모두 눈이 커져가지고 좋아라 하면서 그런 얘기를 듣곤 하였지만, 신앙적인 의분(?)이 가득했던 저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 마다 심령이 상하고 썩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하는 장병들에게 개인적으로 다가가 그런 행위는 간음이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다고 충고하곤 하였습니다.(그들은 대부분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듯이 보였던 저에게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군대 내에서 그토록 저를 괴롭히던 선임이 한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너무나도 미웠던 것입니다. 얼마나 미웠냐면 내가 차라리 그 사람을 죽도록 패버리고 영창을 가버리던지 해야지 결심 할 정도로 날마다 저의 마음과 생각은 미움으로 고뇌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절을 알고 있었고, 기도를 해도 이런 미움이 해결되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저에게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는데, 저에게는 남성혐오증 증세가 있었던 것입니다. 정확한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남자들에게 왕 따를 당하거나, 구타를 당하거나 했던 경험들이 축적되어서 남자들을 싫어하고 혐오하게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동성애자들, 즉 게이에 대한 혐오증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저 또한 성경에 쓰여 있는 동성애자에 관한 말씀들을 읽으면서 하나님도 그들의 존재를 혐오하고 미워한다고 생각하였기에 내가 동성애자들을 혐오하고 미워하는 것을 신앙적으로 당연하게 여겼고 TV에서 성전환수술을 했던 트랜스젠더 하리수나, 혹은 커밍아웃을 한 홍석천 같은 사람들이 나오면 저주를 퍼부으면서, 염산 맞아 죽어야 마땅한 작자들이라고 속으로 욕을 하곤 했습니다.

 

이렇듯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형제들을 증오하고 미워하며 살면서도 내가 옳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일서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예배도 많이 드렸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는 예배시간이 지루했고 또 목사님들의 설교는 왜 이렇게 길고 지루한지 빨리 예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의무감처럼 교회는 참석해야했기에 나의 쳇바퀴 돌듯 의무감에 찬 신앙생활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나는 신앙생활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고, 하나님이 진짜로 존재하시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선지자들이나 사람들과 직접 대화도 하시고, 천사들을 보내기도 하시고 여러 기적들이 나타나는데, 왜 내 삶에는 그러한 것들이 없을까?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고 존재하신다면 나에게도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고 마침내 나는 하나님께 제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만약 1년 안에 제가 알 수 있게 저에게 나타나 주지 않으신다면 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저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정말로 나에게 나타나 주실까? 의심이 들었지만, 정말 살아 계시다면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나타내 주실 것이고, 만약 성경이 거짓이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저는 기다려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기도를 시작한지 삼 개월 째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저는 우연히 인터넷사이트를 통해 어떤 평신도 교회를 알게 되었고 또한 그곳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는 기존에 제가 드렸던 지루했던 예배와는 달리 단 한순간도 지루함도 없이 생기가 있었고, 방언, 예언, 치유와 같은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배가 끝나고 예언이나 방언 통변을 통해 대언기도를 받게 되었는데, 그 교회의 교인들은 나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입술을 통해 저를 축복해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이제 너는 걸음마 아기로서 긴 여정의 바다의 항해에 첫발을 내딛었다. 바로 여기가 너의 집이며 너의 가족들이니라. 내가 너를 나의 일꾼으로 크게 쓰겠노라”

 

예언의 은사는 고린도전서 14장에 기록되어있는 은사로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 방언이나, 통변과 같이 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은사에 대한 부분은 민감한 부분이라 기회가 되면 좀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들은 음성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는 없으나, 아무튼 그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밖에는 인정할 수 없는 사건들이었고, 저는 이곳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유와 사랑의 진리의 복음들을 듣고 깨닫고 경험하면서 나의 진짜 믿음의 항해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종교적인 율법생활에 정죄 받으며 억눌린 신앙생활을 하였던 나에게 자유의 복음은 정말로 죄와 사망의 구속에서 나의 영혼을 해방시켜주었고, 내 영혼은 뛸 듯이 기뻤으며,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의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믿음의 초보단계였던 나에게 자유한 생활이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 말씀처럼 너희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사랑의 종노릇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유의 경험은 반드시 거쳐야 되는 관문이었지만, 아직 너무나 영적으로 어렸던 저는 자유를 육체의 쾌락 쪽으로 더 많이 사용하게 되면서 사랑을 실천하기도 이전에 많은 과오와 오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평소 먹어보지도 않던 술도 마셔보았고, 담배도 펴보았으며, 춤도 못 추는 주제에 악마의 자식들만 간다고 여겼던 나이트클럽도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돌처럼 여기며 쳐다보지도 않으려 했던 여자들도 만나보았으며 기회가 되면 잠자리도 하였습니다.

 

내가 자유를 경험하면서 확실히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정죄하시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전에 내가 그러한 행동들을 했다면 바로 죄라는 생각에 짓눌려서 산 기도를 가거나 기도원에 들어가서 밤새 회개하고 그랬을 터인데 정말로 마음에 아무런 정죄감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의 자유 했던 행위에 대한 대가와 열매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좋지 않은 것들을 먹었을 때에는 몸의 건강을 잃어가고 있었고, 사랑 없이 육체의 쾌락을 위해 만났던 여자와의 관계는 상처와 집착을 낳기도 했습니다.

 

어떠한 자유는 나를 유익하게 만들었지만, 어떠한 자유는 나를 타락시켰습니다.

 

‘[공동번역](고린도전서10:23) 누구나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해서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 고 말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쯤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이렇게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것 봐라, 자유! 자유 주장하더니 저렇게 생활을 문란하게 만들고 쾌락만을 쫒게 되지 않느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존재이니 그래서 법이 필요한 것이고, 율법으로라도 제재를 해야 저렇게 안 좋은 열매라도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

 

최근까지도 제가 많은 종교, 종파의 목사들과, 신학박사들과 논쟁을 하면서 가장 많이들은 얘기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자유를 허락한다면, 그러면 맘대로 사람을 죽여도 되고, 남의 아내를 가로채도 상관없고 죄가 아니라는 얘기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좀 더 저의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자유한 생활과 수많은 경험들 이후 저에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내 자신의 본모습(내안의 영)에 대해서 철저하게 더 볼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자유를 사용하기 이전에 율법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을 때에 얼마나 내가 나의 영적수준을 높여 놓았고, 내가 성자라도 된 양 교만하게 착각하고 있었고 또한 내가 얼마나 가식적이고 위선자였는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무감으로 혹은 하나님이 두려워서 억지로 선한행위들을 스스로 설정하고 살아갈 때는 내가 마치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인양, 올바르고 도덕적인 사람인양 착각하며 살았는데, 아무런 법의 제재 없이 자유를 사용해서 내가 원하는 것만을 선택하고 살아보니,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는커녕 온갖 세상의 쾌락만을 더 바라고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제 이야기의 중요한 포인트를 눈치 채셨습니까?

 

바로 이러한 깨달음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사람들이 진실로 자기의 포장된 선한 겉모습이 아니라, 숨겨진 내면의 진짜 악한 모습을 보고 깨닫고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였던 이사야조차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정한 죄인인지를 깨달아서 벌벌 떨며 치를 떨었을 때처럼 말입니다.

 

‘(이사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 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더라’

 

그래서 이렇게 자유는 사람들의 숨겨진 진짜 내면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자유를 통해 안 좋은 열매가 나타나더라도, 그 사람이 자신의 본모습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유라는 도구를 통해 차라리 그것을 보여주기를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도 한 교회의 리더이며, 목회자로서 저의 양들을 양육하고 있지만, 나의 양들, 성도들이 잘못되기를 원하는 목회자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들에게 자유를 잘못 주어서 그들이 실수하고 다칠까봐, 혹은 하나님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 갈까봐 엄격한 규칙과 율법으로서 그들을 교회에 로봇처럼 잡아가두느니, 저는 차라리 그들이 자유를 가지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유를 주어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어있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유를 주던 율법을 주던 하나님을 떠나가게 마련 인 것을 제가 오랜 기간 동안 목회하면서 목도하였던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나의 자유사건들 이후 저는 처절하게 깨어졌고, 철저히 회개하였으며, 진실로 거듭남을 경험하였고, 나 자신의 악한 본모습들을 진실 되게 볼 수 있는 시간들이 되었으며, 율법적으로, 의무적으로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했을 때와는 달리 내 안에서는 참된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제가 회개하였다는 것은 크리스천들이 소위 말하는 율법을 범하고 죄를 지었다고 말하면서 겉 행위들을 뉘우쳤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가 겉모습으로는 온갖 선한행위와 도덕적인 모습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는 있었지만, 나의 내면의 진짜 모습은 아무런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는커녕 사실은 온갖 악한 것만을 더 사랑하던 위선자의 영혼을 가지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거듭난 이후, 앞으로는 이 세상의 정욕이나 쾌락에 시간을 쏟기보다는 더 가치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진심으로 하게 되길 원했고, 정말 신기하게도 그렇게 나의 마음을 유혹했던 세상의 정욕이나, 쾌락적인 일들이 더 이상 나에게 유혹거리도 아닐뿐더러, 그것을 죄라고 여기면서 노력하며 뿌리칠 필요도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자유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고 그렇게 행한 일에 대해서 아무 정죄감을 받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런 일에 유혹을 받을 일이 왜 생기겠습니까? 어떤 일에 마음이 더 끌리고 유혹을 받는다는 것은 오히려 제재와 규칙으로 금지할 때 더 범하고 싶은 법입니다.)

 

하지 말라는 계명들은 도리어 그 규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자극해 더욱 많은 범죄를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한 예로 네덜란드는 성매매 합법국가입니다. 합법화된 공창제도, 마약의 합법화, 낙태의 합법화, 안락사 허용 등 다른 나라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문제들을 허용하고 있고 있습니다. 흔히들 낙태를 허용하면 그 나라 낙태율이 세계에서 제일 많지 않을까 혹은 마약을 허용한 나라엔 마약중독자가 제일 많지 않을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실제로 낙태를 법으로 허용한 네덜란드에 네덜란드 여성이 낙태하는 경우는 드물고 마약(일정한 마약)허용이 합법화된 이 나라엔 마약을 금지한 나라보다 마약중독자 수는 훨씬 적으며, 공창제도가 있는 이 나라에서는 성매매가 불법인 나라들보다도 성범죄율이 현격히 낮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확인된 사실입니다.

 

오히려 현재 성매매가 불법인 우리나라의 성범죄율이 OECD 국가 중 2위로서 여성 치안 불안국으로 분류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이런 저의 자유의 경험들은 저를 깨어지게도 하였고, 회개하게도하였고,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거듭나게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경험했던 특별한 사랑의 경험에 대한 얘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제가 앞서 말하길 저는 전형적인 남성이자 마쵸(macho)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남성혐오증자이면서, 게이혐오증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자유를 경험하면서, 본격적으로 믿음과 사랑의 항해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동성애자(게이) 한사람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게이인줄 몰랐지만, 그가 저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고 게이인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치 남자가 여자를 대하듯 저를 이뻐해 주며, 연인처럼 대해주고 좋아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에게 드러내진 않았지만, 저는 그가 저에게 대하는 태도가 역겨웠고, 징그러웠으며, 토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 머릿속에는 하나님도 게이들을 사랑하시고 있고 동성애 자체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 문제에 대해서 기도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여라 네가 그를 역겨워하고, 징그러워하고, 미워하는 것은 곧 나 예수를 그렇게 대하는 것이며, 네가 눈에 보이는 남자 형제 한 명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나 예수를 사랑한다 하느냐? 나도 남자니라 네가 남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네가 나를 신랑처럼 여기고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다 거짓 이니라”

 

그러시면서 적극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기를

“주님, 저는 주님의 사랑을 따르고 싶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지금시점에서 진실 되게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그 형제에게 뽀뽀도 해주고, 섹스도 하여라, 넌 자유한 아들이 아니더냐? 그리하면 그 형제가 네가 진실로 자신을 사랑한다고 여길 것이고, 너는 그에게 복음을 전할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저는 무척 난감하였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명령이 아닌 것을 저는 압니다. 하나님의 제안일 뿐이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실천하고 싶은 사랑의 명령 같은 일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그 형제를 마음과 행동으로 적극적으로 사랑해주었고, 지금은 그 형제가 저의 사랑을 믿고 또한 복음을 받아들여서 귀한 주님의 일꾼으로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고 있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변화는 저에게 일어났습니다.

저에게 있던 남성, 게이 혐오증이 거의 사라져서 더 이상 남자들을 대할 때 적대적으로 보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대할 때도 예전의 딱딱한 남자대 남자의 관계로서가 아닌 주님의 신부로서 진실 되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육체는 남자이지만, 나의 영은 주님의 신부이고, 예수님의 여자이니까요.

 

이 글을 읽고 저를 욕하며,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문란하다느니,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겠냐느니, 온갖 판단과, 비판을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자유와 사랑의 조화와 생명적인 규범들로 인해 성적인 문란이나 타락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와 법은 우리를 더욱 더 고차원 수준의 신앙생활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경륜의 비밀들을 깨달아 가도록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각자의 믿음대로 자기가 하나님께 옳다고 여기는 바를 실천해 나가면 될 일이지 그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려는 자가 있다면 성경의 이 말씀을 다시 주목해서 봐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14:1)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습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비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그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할 수 있으시니,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날이 저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날을 더 존중히 여기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요,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며, 먹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먹지 않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다 주님이 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입이 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마십시다.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또 확신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부정한 것입니다.

 

그대가 음식 문제로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좋다고 여기는 일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

 

하나님이 이룩해 놓으신 것을 음식 때문에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먹음으로써 남을 넘어지게 하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

고기를 먹는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그 밖에 무엇이든지, 형제나 자매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대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섹스 자체는 훌륭한 사랑의 도구이며, 선한 것입니다만, 그것이 부정하고 문란하고 더럽다는 생각은 바로 인류에게 죄를 깨닫게 해준 사단이 심어준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 좋은 사랑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자에게는 좋은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자신만의 쾌락의 도구로서 죄라고 생각하며, 정죄 받으며 사용하는 자에게는 악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로마서 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또 확신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부정한 것입니다.’

 

앞서 사람들이 반문한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해보려합니다.

 

“자유를 허락한다면, 그러면 맘대로 사람을 죽여도 되고, 남의 아내를 가로채도 상관없고 죄가 아니라는 얘기냐?”

 

한번은 저의 아버지와 생명의 성령의 법과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목사님이시고 성실한 사역자이셨지만, 저와 교회에 대해 염려하셨고, 나의 자유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법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사실 젊었을 적 자유를 외치던 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던 적이 있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당시 한 남자 성도가 자유를 주장하면서 어떤 유부녀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유부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자 칼로 찔러 죽이고 말하기를 자신은 자유해서 죄를 범한 게 아니니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 것을 보고 그 교회에 회의감을 느껴 나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저는 그 상황이 안타까웠습니다. 제가 말하는 자유란 앞서 말했듯이, 자신의 유익이나 쾌락만을 쫒아가는 방종이 아니라 자유를 바탕으로 아무 걸림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건을 두 가지의 관점으로 설명해보았습니다.

 

첫째는 자유의 기능으로 인해 그 남자의 본성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 남자가 율법적인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한다고 착각하며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자유를 통해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셔서 여자를 자신의 유익으로 취하려했고, 심지어 살인까지 하려하는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남자가 비록 자유를 남용해서 살인까지 저질렀지만, 결국 본인의 욕심으로 인해 나쁜 결과를 불러왔고, 자유가 자신의 육체의 기회나 쾌락만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쫒아서 사랑을 행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고 탕자처럼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길 바랍니다.

 

둘째는 목회를 하는 입장에서 방법론적인 얘기인데, 자유를 외치던 그 교회가 자유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생긴 자유의 남용과 과오 그리고 진리의 오류적인 판단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자유의 근본 목적은 그저 자유를 계속 지켜 나가게 하는 것이거나 생명을 파괴하는 악한 일을 변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수가 얼마든지 용납되는 자유함 안에서 성령님께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 내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 안으로 데려가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우리는 자유 자체를 숭배하는 잘못된 개념에서는 벗어나야 합니다.

율법과 의무로부터의 해방은 예수님께서 보혈의 피 값을 치르고 얻어내셨을 만큼(갈라디아서 2:10-20)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과의 영광스런 연합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자유에 대해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자유를 통해 진정으로 사랑의 종노릇 하는 데까지 가는 것을 모든 교회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 교회가 만약 자유를 통해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면, 유부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쾌락이나 유익을 위해 취하려 하는 것은 욕심이며,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는 것 또한 당연히 사랑을 행하는 것이 아니며 죄를 짓는 일이기 때문에 당장 그런 일을 멈추도록 그 남자에게 훈계하고 막았어야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앞서 말한 목회를 할 때에 방법론적인 문제에 있어서 제가 이런 일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택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처음에는 양들에게 자유를 주고, 결과나 열매들을 지켜보다가 그 사람의 인격적 성숙도에 따라서 나름대로의 규칙이나 율법을 허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사도바울 스스로는 사랑과 자유에 능통한 선생이었지만, 단단한 음식이나 밥을 먹는 성숙한 성인이 아닌, 젖먹이 같은 어린아이 수준이었던 고린도 교회에게 많은 규칙과 율법을 주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즉, 그 남자가 자유를 사용하여서 남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교회에서 무슨 제재를 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 남자처럼 인격이 성숙하지 못하여서 자유를 방종으로 삼고 오히려 남에게 피해나 줄 것 같은 사람이라면 교회에서는 규칙이나 율법을 사용하여서 그 남자가 살인까지 저지르지 못하도록 가르치고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반문합니다. 저렇게 자유를 방종으로 삼아 살인까지 저지른다면 무서워서 어떻게 살겠느냐, 차라리 법으로 제재하여서 저런 일들을 모두다 미연에 방지 하는 게 낫겠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한 가지는 알고 한 가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Fire)은 유익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큰 화재와 재난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재가 일어날 일만 염려해서 불을 영원히 사용하지 않고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화재가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인류에게 주는 유익함이 더욱 많기 때문에 우리는 불을 사용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류를 믿고 사랑하셔서 지구를 다스리라고 맡기셨고 로봇이나 종처럼 생각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양자로서 자유를 사용할 권한을 주셨는데 그 누가 함부로 하나님의 권한을 넘어서서 사람에게 주어진 자유를 박탈하려 합니까?

 

저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어서 차라리 탕자같이 되더라도 진정한 자유의 아들, 양자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 율법으로 그들을 규제하고 로봇처럼 판단능력을 상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종의자녀로 가둬두는 것보다 백배, 천만 배 더 옳은 일 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사고나 재난을 각오하더라도 자유를 빼앗기보다는 차라리 끝까지 열매를 볼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 저는 오히려 인류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뜻도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서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자유한 아들들이 한사람이라도 더 나타나길 바라실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물론 자유를 함부로 사용하여서 일어난 일에 대한 대가나 열매는 당사자가 감당해야 할 것이며, 책임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것 또한 자유한 아들들의 사랑의 의무이며, 하나님께서는 자유의 선물과 더불어 책임감까지도 요구하고 계시니까 말입니다.

 

결국 자유와 사랑의 법도 각자 사람의 믿음과 수준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며, 사도바울 말씀처럼 어떠한 사람은 우상에 바쳐진 제물이라도 먹을 믿음이 있어서 먹으면 될 것이고, 그것이 부정하다 여기면 안 먹으면 될 것입니다.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믿음과 수준대로 잘 판단하여서 실천해나가면 될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자유로 인해 남의 아내를 가로채도 죄가 아니며 상관없겠느냐?”

 

앞에 사건이랑 같은 질문이긴 하지만, 이번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남의 아내를 가로채는 게 옳으냐, 옳지 않으냐의 율법적인 대답(Yes or No)을 원하신다면, 저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남의 아내를 가로채야 할 만큼 절박한 사정이 있다면(단지 육체적 쾌락이나 정욕만의 문제가 아닌), 혹은 남의 아내를 정말로 너무나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당사자가 결정해야할 문제이고 본인이 결과를 책임지고 하나님 앞에서 판단 받아야할 문제이지 제 삼자인 우리가 옳다 그르다 왈가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앞의 사건처럼 그 남자가 단지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유부녀의 남편의 마음이나 상황은 아랑곳 하지 않고, 또한 유부녀도 그 남자를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살인까지 저지르는 행위는 아마 누가 봐도 옳지 못한 행위이고 하나님께서도 멈추라고 하실 것이 자명합니다.

 

그리고 그가 자유를 사용하여서 남의 아내를 빼앗았다면, 그가 알고 했던 모르고 했던 그는 어떠한 대가를 치루 게 될 것입니다. 그 아내의 남편에게 폭행을 당할 수도 있고 현행법에서는 간통으로 감옥에 가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가 이 모든 것을 알고도 기어이 그런 일을 해야겠다면 차라리 저는 그러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당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나 열매는 혹독히 책임질 각오를 하라고 덧붙여 조언해 주겠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이웃집 아내에 대한 욕정이 넘쳐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실로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제가 아는 사실은 사람의 판단기준과 하나님의 판단기준은 다르기 때문에 그 사람의 행동만 가지고 부도덕하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동기와 행위에 대한 심판은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각 사람마다 하시는 일이지 사람들이 심판자가 되어서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그 남자의 동기가 사랑하는 것과 상관없이 세상적인 쾌락이나 욕정에만 치우쳐서 하나님의 뜻과 벗어난 것이 확실할 경우에는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사랑하는 쪽으로 선택해 갈수 있게 되기를 조언해주고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벽을 뚫는 남자”라는 뮤지컬을 기억하십니까?

 

그 뮤지컬의 이야기는 우체국 공무원인 듀티율이 자신에게 벽을 통과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어떤 의사가 듀티율의 병을 진단하고는 사랑을 하게 되면 벽을 통과할 수 없다고 주의를 줍니다.

 

듀티율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업이 검사인 남편의 지나친 의심과 폭력 속에서 거의 감금 생활을 하는 옆집여자 이사벨을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됩니다.

 

이사벨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물건처럼 취급하는 남편의 억압 속에서 하루하루를 괴로움과 희망 없이 살아가다가 벽을 뚫는 남자 듀티율을 알게 되면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을 남편보다 진심으로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남자 듀티율과 그녀는 함께 하고 싶었지만, 유부녀인지라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이 사실을 남편이 알게 되면 두 사람 모두 무사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 함께 살 때보다 듀티율을 만날 때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였습니다.

 

뮤지컬의 마지막은 주인공 듀티율이 벽을 뚫는 능력을 이용하여 이사벨의 남편의 비리를 알게 되어서 법정에서 그를 유죄판결을 받게 만들고 결국 듀티율이 승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듀티율과 이사벨은 남편의 구속 없이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만, 사랑을 하게 되면 벽을 뚫는 능력이 사라진다는 의사의 말을 잊고 있던 듀티율이 벽속에 갇혀버리면서 이야기는 슬프게 마무리됩니다.

 

이 뮤지컬을 보면서 관중들은 과연 주인공 듀티율이 남의 아내를 가로챘기 때문에 의분을 느끼며 주인공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오히려 악한 남편에게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된 두 사람의 사랑을 기뻐하고 있었을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남자도 남의 아내를 가로챈 것은 사실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상황 속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동기들과 속사정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단지 율법적인 흑백질문으로는 죄냐, 아니냐, 옳냐, 그르냐를 따질수 없는 문제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이 옳다 그르다의 흑백적인 단답형의 질문이나 대답을 하기에는 삶의 문제들은 많은 다양성과 관계들의 복합적인 부분들이 존재하므로 더 이상 이런 유치한 질문들은 내려놓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한 수녀가 임신 중인 산모의 태아를 낙태시켜서 교회에서 파문되고 출교를 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앞서 사람들이 저에게 반문한 질문 “자유를 허락한다면, 그러면 맘대로 사람을 죽여도 되냐?” 와 비슷한 맥락으로 저 수녀에게 “낙태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인데 죄냐, 아니냐?” 란 흑백논리적인 율법적인 질문을 던질 수가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그 수녀에게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낙태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여서 죄라는 생각을 가진 카톨릭 주교에 의해 Marianne라는 수녀와 낙태를 허용한 st.joseph's 병원이 통째로 출교를 당한 사건이 미국 아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일어났습니다.

 

행위자체만 놓고 보면 수녀는 낙태를 하였고, 갓난아기를 살인한 것은 맞지만, 임신 11주 산모가 임신중독증으로 혈압이 극도로 올라 사경에 빠져서 그냥 두었으면 산모와 아기 둘 다 죽게 될 상황이었던 것을 오히려 수녀의 지혜로운 판단으로 산모라도 극적으로 살렸던 사실 자체에는 그 가톨릭 주교가 별 관심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규칙이나 율법을 어긴 것 같은 행위, 그 이면에는 당사자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든지, 다른 속사정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러한 동기나, 마음을 알려하기보다는 단지 행위자체만 보고 죄냐, 아니냐, 옳냐, 그르냐를 판단하려하는 생각은 유치하기 그지없고 초등학문적인 생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로 성적인 문제, 섹스나 결혼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해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너무나도 흑백적인 단순논리에 갇혀서 사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유부남인데 아내 외에 다른 여자가 매력 있어 보이는데 그 여자랑 섹스를 해도 되냐, 안되냐, 죄냐, 아니냐, 주로 이런 단답형의 질문들이 관심사들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참으로 복잡하고 간단하지가 않은 것을 잘 알고 계실 것 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과 감정에는 정말 많은 어떠한 이유들과 원인들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유부남, 유부녀의 90퍼센트 이상이 자기의 배필 외에 다른 사람이랑 성경험이 있거나, 없더라도, 그런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은 통계적으로도 알려진 공공연한 사실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정말 거룩할 것만 같고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을 것만 같은 성직자들도 사실은 인간이기에 보통사람들처럼 성적인부분에 관심이 많고 심지어 온갖 비도덕적인 사건에 연류 되어 매스컴에 화두가 되거나 비하인드 스토리가 되는 일은 이제는 비일비재한 일들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온갖 종교나 도덕적인 겉 치례, 혹은 어떠한 고귀한 직책이라는 겉옷의 허울을 모두 벗어버리고 그냥 어린아이들처럼 사람 대 사람으로서 솔직하게 이러한 터부시되는 깊숙한 문제들을 직면하여서 얘기해야 우리가 고민하는 숙제들이 하나님 안에서 해결될 것입니다.

 

저도 영적으로 어리고 사랑으로서 사람의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에는 단지 예쁜 여자를 보거나 포르노에서 매력 있는 여자를 보게 되면 갖고 싶다, 자고 싶다, 이러한 단순한 감정이 전부였습니다.

 

사실 자유와 사랑을 깨닫기 전에는 포르노를 보거나 자위행위를 하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하며 터부시했었으니 내가 여자랑 섹스하고 싶다는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본능이며, 또한 그 감정 안에는 더 복잡한 마음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많은 얘기를 하며 교제하면서 하나님은 내 안의 많은 감정들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게 도와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매력적인 여자의 허벅지를 볼 때에 관심이 많이 가는 편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주로 여자의 가슴 쪽에 많은 관심을 갖더군요.

 

저는 이상하게도 여자의 가슴이 크던 작던, 그쪽으로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고 얼굴 외모도 별로 따지지 않는 편이었지만, 허벅지가 두껍고 예쁜 여자에게 많은 관심이 가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이러한 부분에 대해 설명해 주시기를 허벅지는 주로 축구선수처럼 남자의 힘을 상징하곤 하는데, 제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나 남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거나, 관심을 못 받는다고 느껴서, 그런 부분을 채움 받고 싶어서 허벅지에 관심이 가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자들이 주로 여자의 가슴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가 엄마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을 경우가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재밌는 말씀들도 주셨는데, 사람의 배를 잘 쓰다듬거나, 복부 쪽에 관심보이는 사람들도 간혹 있는데, 어렸을 때 배고픈 경험이 많았거나, 아니면 현재 무언가 채움을 받지 못해서 나타나는 감정의 증상들이라고 하셨고, 뽀뽀나 키스행위에 목말라 하는 사람은 그 숨겨진 감정 뒤에 외로움이 많아서 사람들과 더 많이 얘기하고 싶다는 육체의 표출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백퍼센트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육체의 성적인 표현 뒤에 숨겨진 사람들의 감정이나 마음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사랑을 배우면서 사람들을 더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고 내가 외모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때 제가 관심 갖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계속 생각나고 만지고 싶고, 섹스하고 싶다는 욕구가 매일 들었고 저의 욕구불만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견딜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와 대화를 해보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여자와 많은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서로의 관심사를 알게 되었고 그녀도 나처럼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교제하면서 어느 날 그 여자는 음악의 작사를 담당하였고 저는 작곡을 하면서 같이 음악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정말 신기한 일은 저의 욕구불만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마음에는 알 수 없는 기쁨과 환희가 가득하였습니다.

 

저는 그 여자와 스킨십도 하지 않았고 섹스도 하지 않았지만, 그 여자와의 진실한 교제와 대화는 오히려 섹스보다도 더 큰 만족감과 쾌감을 주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의 지혜들은 단지 법칙과 율법에 매여서 섹스를 해도 되냐, 안 되냐, 죄냐, 아니냐의 문제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며, 더 건강하고 생명적인 방향으로 인도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생각처럼 섹스하는것이 옳냐, 그르냐에 대한 것으로만 생각이 치우쳐 있었다면 나는 결코 욕구불만을 해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한한 사랑과 지혜의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유부남, 혹은 유부녀라 할지라도 나의 배필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이 생겼다고 해서 불륜이니, 배신이니 하며, 사랑하는 이를 매도하기 보다는, 서로의 감정과 마음들을 얘기하고 나누면서 솔직하게 진실에 접근하려 하고 하나님 안에서 해결 방법들을 찾아 간다면, 서로가 더욱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반드시 찾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에 대해 많은 의미를 두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교회에서는 결혼을 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 인양 설교하는 것도 많이 보았습니다.

 

또한 결혼의 근거로 창세기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구절의 말씀을 많이 인용하기도 하는데 앞서 말했듯 사람마다 부르심이 다르고, 믿음이 다르기 때문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생육하고 번성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그리하면 될 것이고, 독신을 원해서 자녀가 없이 살더라도 만족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될 일인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독신으로 살았고, 예수님도 결혼을 하지는 않으셨으니,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 크리스천은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혹자는 일부일처제가 옳다, 그르다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시는 분이 계시는데, 저는 사실 결혼제도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해서 서로 돕는 배필인 동역자나 부부를 허락하신 것이지 세상으로부터 만들어진 합의에 의한 결혼제도를 주신 것이 아니셨습니다.

 

이것에 대한 답은 창세기에 있습니다.

 

‘(창세기 19:30) 롯은 소알에 사는 것이 두려워서, 두 딸을 데리고 소알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서, 숨어서 살았다. 롯은 두 딸들과 함께 같은 굴에서 살았다.

하루는 큰 딸이 작은 딸에게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아무리 보아도 이 땅에는 <세상 풍속대로 우리가 결혼할 남자>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아버지께 술을 대접하여 취하시게 한 뒤에, 아버지 자리에 들어가서, 아버지에게서 씨를 받도록 하자.”

 

이 구절에서 롯의 두 딸이 이 세상 풍속대로 결혼할 남자가 없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즉, 결혼제도는 롯이 살던 곳, 소돔과 고모라 같은 악한 문명도시에서 유행했던 제도라는 얘기입니다.

 

사실 그 제도는 남자를 위해 만든 제도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여자는 사람의 존재가치로서 존중받기보다는 남자의 소유물이나 재산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결혼제도를 통해 여자를 남자의 소유물처럼 만들게 된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결혼제도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고,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배필이 아닌 각 사람이 자기 뜻대로 찾은 배필과 결혼하다보니 이혼도 하게 되고 재혼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지어주신 배필은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문화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사도바울도 굳이 결혼을 원하면 해도 되지만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36) 어떤 이가 결혼을 단념하는 것이 자기의 약혼녀에게 온당하게 대하는 일이 못 된다고 생각하면, 더구나 애정이 강렬하여 꼭 결혼을 해야겠으면, 그는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하십시오. 결혼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니, 그런 사람들은 결혼하십시오.

 

그러나 결혼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먹은 사람이, 부득이한 일도 없고, 또 자기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어서, 자기 약혼녀를 처녀로 그대로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였으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약혼녀와 결혼하는 사람도 잘하는 것이지만,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더 잘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요지는 각자 믿음대로 실천하되 결혼을 원하는 사람은 결혼을 하면 될 것이고, 독신을 원하는 사람은 독신으로 살 것이며, 일부일처제로 만족하면 일부일처제로 살아가면 될 일이고, 능력이 좋아서 일부다처제가 가능하면 그리 살면 될 것입니다.

 

언젠가 TV 다큐 ‘아마존의 눈물‘이라는 프로에서 원주민 야노마미족들의 생활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한 부족 안에서 여자가 있고 그 여자의 남편이 여럿인 일처다부제의 독특한 문화권이었는데 남편이 많다고 해서 여자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것도 아니었고 각자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서로 협력해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또한 성경에도 아브라함은 사라를 비롯해 다른 아내들이 있었고, 야곱도 레아와 라헬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내가 수도 없이 많았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구요.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사람들입니까?

 

그러니 이제 사람을 어떠한 틀과 규제에 묶어두고 일부일처제가 옳다느니, 무슨 제도가 옳다느니 하는 유치한 초등학문적인 이야기는 그만 멈추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해나가는 고민가운데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제 저의 이야기에 결론을 내려 볼까 합니다.

 

저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려하고 있으며, 날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사랑하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 이 고민은 제가 죽을 때 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어떤 날은 저를 방종과 타락가운데 두어서 하나님께 징계와 훈계를 받기도 하며, 어떤 날은 사랑을 잘 실천하여서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혹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서 게으르다고 다그치시기보다는 사랑으로 같이 고민하시며 나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을 따르려는 방향성을 가진 나와 우리교회가 부족함이 많고 또한 과오가 많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독려하셨고, 무한히 사랑해주시면서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세상에 어떠한 모든 종교의 좋은 율법과 규칙이 있다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율법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며, 만약 어떠한 법이 사람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고 올무가 되게 한다면, 과감히 그런 율법을 버리고 더 좋은 법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최상의 법은 바로 예수님께서 제정하사,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법인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것을 저의 삶의 간증을 통해 결론적으로 말씀드렸고 당당히 소개하였습니다.

 

‘(로마서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10. 글을 마치면서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의 진리를 알지 못해 고통 받고 있고, 억압되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펜을 잡기 시작하였지만, 제가 주님 안에서 깨달은 진리와 성령 안에서 경험했던 자유와 사랑의 모든 일들을 이 책 한권에 표현하고 담기에는 지면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생명의 성령의 법안에 살면서 자유와 사랑의 새 계명을 실천해 나가는 일은 평생을 두고 배우고 깨닫는 것이고, 개인마다 천차만별의 인격과 또한 부르심이 있고 각각 다양한 상황과 환경에 처해있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이나 세상적인 어떤 룰(Rule)안에 살 때처럼 애초부터 획일적인 선을 그을 수도 없고 한계를 정할수도 없습니다.

즉, 수천, 수 만가지이상의 경우(case)와 경험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기에 앞서, 저의 신앙과 논점들이 뭇 사람들의 판단, 시빗거리나 될까, 이단시비에 휘말리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진실 되게 최선을 다하여서 내가 아는 진리를 담대히 선포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건, 나의 처음 바램대로, 이 세상에서 잘못된 교리나 혹은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과 인격을 오해하고 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나, 오늘날 대다수 주류의 사람들에 의해 소외되어버린 소위 죄인 취급받는 비(非)주류들의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비관하거나, 심하게는 자살까지 하는 현실에서, 더 이상 그러한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하지만 이글을 쓰는 저자도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지식과 지혜가 한계가 있고, 또한 자유와 사랑의 삶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하여도 실수하고 넘어질 때도 많으며, 늘 부족한 것 투성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날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엎드러집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바라는 것 한 가지는, 부디 여러분이 가진 성경지식이나 생각에 비교하여서 저의 의견이 잘못된 것 같고, 옳지 않다고 판단 하셨을지라도, 비판만하며, 깎아 내리시기보다는 저에게 메일로 조언과 권고의 말씀들을 보내주시어 지적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래야 이 부족한 주님의 종도 더 배울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지각과 지혜 속에서 제가 몰랐던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저는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위해 토론하고 변론하는 것을 좋아하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더 찾아 갈 수 있고, 결국 진리에 도달 할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책을 쓸 수 있게 저와 늘 함께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너무나도 사랑하는 왕 같은 제사장 교회 식구들, 그리고 하늘나라에 있는 사랑하는 나의 멘토 이금훈 형제, 또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세계 각지에 있는 왕 같은 제사장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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