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전세계 게이 아이콘으로 회자되는
더크 보거드 Dirk Bogarde. 네, 맞습니다. 그 유명한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등장하는 구스타프 아센바하 역할을 했던 배우가 더크 보거드이지요. 미소년 타지오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던 병약하고 늙은 작곡가 말입니다.
한때 영국 게이 커뮤니티에서는 더크 보거드를 비난하기도 했어요. 커밍아웃하지 않는다고 말이에요. 사실 그는 죽기 전까지 커밍아웃하지 않은 게이였던 거지요. 그가 죽은 다음에야 그의 가족들은 그가 게이였다는 것을 시인했어요.
하지만 그가 정말 용기가 없던 걸까요? 용기가 없었다면, 어떻게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아센바하 역을 할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찍기 10년 전에, 바로 그의 운명을 뒤바꿔놓은 '희생자'라는 전대미문의 게이 영화의 주인공 역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더크 보거드의 운명을 바꾼 영화가 바로 '희생자Victim(1961)'입니다. 그는 한때 그만그만한 잘 생긴 외모로 그만그만한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쌓던 배우였어요. 하지만 '희생자'를 찍고 나서 그의 배우 인생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지요. 바로 동성애자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영화 직후 캐스팅 제의도 덜 들어오고, 들어온다고 해도 비중이 작거나 심약한 남자 역이었지요.
그만큼 당시 '희생자'는 파격적인 게이 무비였습니다. 게이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초기에는 상영 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에서 성인 남성들간의 성행위는 70년대 이전까지 '불법'이었으니,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지요. 네, 이 기괴한 게이 스릴러물인 '희생자'를 로저 이버트는 별 네 개 중에 만점을 주고 위대한 영화 100선 안에 넣었지요.
여하간 더크 보거드의 연기 인생은 이 영화로 내리막길을 걷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랬던 걸까요? 실제로는 이 영화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더크 보거드는 그만그만한 배우로 종지부를 찍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장들께서는 더크 보거드를 이 영화를 통해 알아봐주기 시작했지요. 바로 영국 영화의 거두 조셉 로지의 영화들에 전격 발탁되기 시작했어요. 흉내낼 수도 없을 정도로 치밀한 걸작 '하인'의 하인역을 맡아서 광기 어린 연기를 십분 발휘하는가 하면, 이후에도 조셉 로지의 영화에 호출되지요.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 죽음'은 물론 또 우리의 파스빈더께서는 '양지로의 여행'에서 그를 캐스팅했고, 릴리아나 카바니는 자신의 걸작 '비엔나 호텔의 야간 배달부'에 샬롯 램버팅과 함께 더크 보거드를 주인공으로 발탁하게 됩니다.
이렇듯 '희생자'를 선택한 그의 운명은 외려 반전의 기회를 제공했지요. 그만그만한 영국 배우로 남았을 운명이 영화 한 편을 통해 전세계에서 각광 받은 배우가 되는 방향으로 움직였으니까요.
더크 보거드는 평생 독신이었습니다. 그는 과연 누구를 사랑했을까요? 네, 그의 매니저였던 Anthony Forwood라는 게 정설입니다. 더크는 그의 매니저와 함께 유럽에 분포된 집에서 꽤 오래 동안 묵기도 했어요. 나중에 매니저는 여배우와 결혼을 해서 아들을 하나 두게 되지요. 더크 보거드는 말년에 특이하게 자기 매니저에 대한 감동적인 회고록을 쓰기도 해요. 물론 매니저와의 사적인 관계에 대해서 털어놓지는 않고요.
문뜩 더크 보거드의 인생도 꽤나 재밌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그의 연기는 '물기'가 없지요. 좀 건조하게 깊은 맛이 납니다. 얼마 전 아마존에서 '희생자Victim' DVD를 구입했는데, 아직도 시간에 쫓겨 보지 못하고 있어요. 이 전대미문의 게이 스릴러, 아흑.
P.S
저랑 함께 저희 집에서 요 영화 DVD를 함께 보실 분은, '바텀 특별법' 구설수에 시달리고 있는 입 큰 매니저 가람군이나, '판문점에 세계 게이 본부 건설' 공약을 내세웠다가 친구사이 대표 선거에서 팽당한 매니저 개말라에게 연락주시면 됩미다. 물론 쌍꺼풀 없는 20대 XY여야 합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