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 Lilies, John Greyson, 1996
B급 정서와 캠프 미학으로 무장한 독특한 퀴어 영화.
독특하네요. 기발한 아이디어예요. 저번에도 다른 퀴어 영화를 소개하면서 언급했던 건데, 이 영화도 텔레필름입니다. NTSC 방식의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을 해서 텔레비젼에 상영하고, 그것을 키네코 과정을 통해 필름으로 다시 컨버팅하는 거지요. 방송국에서 제작하는 영화. 헌데 놀랍게도 이 발칙한 퀴어 영화를 방송국에서 껴안을 수 있는 구조가 있다는 게 부러울 따름입니다. 주교bishop의 정체를 비롯해서 대단히 반카톨릭적인 정서를 함유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우선 이 영화의 형식이 재밌습니다. Bilodeau 주교가 교도소에 와서 신자 수감자들을 위해 고해성사를 행하는 순간, 갑자기 고해실에 열쇠가 채워지고, 느닷없이 고해를 보려던 죄수 시몬이 위협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돌연 성당 안은 갑자기 연극 무대로 변해버리죠. 죄수 신자들이 성당 안을 그사이 엎어버리고 연극 무대로 바꾼 다음 자신들이 후닥닥 옷을 갈아입고 배우로 출연한 겁니다. 고해실 창문으로 성당 앞이 보입니다. 무대에는 호모에로티즘의 성경이랄 수 있는 성 세바스찬 연극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것도 낯 뜨거운 사랑의 밀어를 동반한.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연극은 계속 되고, 갑자기 화면은 연극에서 과거 회상 장면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연극 장면, 과거 회상 장면, 그리고 주교와 시몬의 모습이 번갈아 변주되는 형식이 꽤 인상적입니다. 이 영화는 주교에 대한 시몬의 50년만의 복수극입니다. 50년 전, 시몬과 발리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잠시 잠깐 시몬이 자신의 성 정체성과 본심을 버리고 부유한 여성과 사랑하는 척하는 연극을 하지만 발리어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시몬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지요. 마침내 발리어와 시몬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남편에게 버림 받은 어머니는 발리어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합니다. 백합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숲속에서.
하지만 어머니를 울며 죽이는 이 광경을 몰래 훔쳐본 젊은 성직자 Bilodeau. 사실 Bilodeau는 시몬과 발리어에게 못되게 구는 척하지만 마음은 온통 시몬에게 가 있지요. 그를 사랑했던 겁니다. 시몬과 발리어의 행복을 질투한 나머지 시몬에게 도망가자고 말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NEVER!'. 질투에 눈이 먼 Bilodeau 때문에 발리어는 죽게 되고, 시몬은 살인 사건과 연루되어 50년 동안 감옥에서 썩게 된 것이 이 연극의 내용이며, 회상에서 밝혀진 진실이지요.
영화 'Lilies'는 캠프 미학을 총동원하고 있어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여자들은 다 드랙 분장한 남자들이고, 피에르&질의 도상을 그대로 베껴온 듯 보이는 세바스찬과 시이저 이미지, 욕조에서의 섹스(썅, 짤렸더군요), 감옥 등 영화 곳곳에 배치해놓은 장면들 상당수가 전형적인 게이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 어떻게 보면 데릭 저먼을 참조한 흔적들도 볼 수 있고요. John Greyson 감독이 누군인가 싶어 검색을 좀 했더니 캐나다에서 꾸준하게 B급 퀴어영화들을 만들어왔더군요.
하지만 이 영화는 형식은 재밌되,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 다소 상투적이기 때문에 그다지 힘이 없습니다. 비록 주교과 카톨릭을 호모섹슈얼 때문에 고민과 질투를 하는 성직자 이미지를 동원해 비판하고 있는 당돌함을 가지고 있더라도, 내용 자체는 클리셰하지요. 사랑하는 호모 둘 사이에 끼어든 여자, 아버지 바람기 때문에 상처받은 어머니의 게이 아들에 대한 헌신적 이해 등 의미가 확장될 만한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또 씬의 비약들을 설득력있게 끌어가는 힘이 다소 딸리는 게 사실이지요. 그게 이 영화가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물론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게이들의 찬사야, 듣기 좋은 이야기만 늘어놓았으까 그럴 테고요.
하지만 전 이 영화가 좋습니다. 리얼리티가 빈곤하게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리얼리티를 흔드는 맛이 있거든요. 연극적 과장, 현실과 연극의 모호한 경계 자체가 가지는 힘이 있을 테니까요. 아쉬운 건 아무리 텔레필름이지만 기왕지사 캠프미학에 접속된 마당에 호모에로틱한 맛을 더 살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
희한하게도 미국에서 '백합'은 여성적인 남자의 은유로 곧잘 사용되기도 한다네요.
P.S
지금 열린우리당 의원이기도 한 이 모 씨와 오래 전에 점심을 같이 한 적이 있어요. 당시 그는 성공회대 총장이기도 했습니다. 세계성공회 준비회의가 한국에서 열렸고, 그 컨퍼런스 주제 일부가 호모섹슈얼이어서 제가 발제를 했었거든요.
식사 중에 그가 정말 궁금한 듯이 묻더군요.
"왜 성직자들 중에 게이들이 많은 걸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실제로 많거든요."
미국의 경우 성직자의 30% 정도가 호모섹슈얼이란 통계가 나와 있어요. 꽤 애매한 질문이더군요.
"아마 게이여서 성직자가 됐거나, 성직자여서 게이이거나 아니면 둘 다거나."
제 대답이었습니다. 그것보다 제가 더 의아해하는 건 '이성애 성직자'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 반면, '게이 성직자'는 늘 구설수에 오르는 현상입니다. 어차피 카톨릭에서 성직자의 성욕은 대상 자체를 지워야 하는 원죄의 흔적 아니던가요? 게이 성직자란 말을 뱉는 순간 이미 성직자의 성욕을 인정하는 이 역설부터 치유하는 게 더 빠른 길이겠죠. 그러면, 당시 그 모 씨가 나한테 했던 질문에 답할 용의가 있습니다. 물론 다시 만날 일도 없겠지만.
2005-01-17
성직자에 게이가 많은 것은 게이들이 깊이 사색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는...
게이들이 일반보다 예술같은 것에 감각이 더 뛰어난 것처럼 철학이나 종교같은 인생을 성찰하거나 수도하는 것에 더 깊이가 있는듯...
나도 예술은 별로지만 그래도 일반보다는 낫겠지...
인생을 돌아보거나 고찰하는데는 재능이 있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