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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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1회 퀴어문화축제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대학로에서 열렸다.

각 단체들 회원이 대부분이었고, 개인이나 친목 모임 등에서 온 사람들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폭우가 쏟아졌지만 퍼레이드는 강행되었고 많은 이들은 비를 쫄쫄 맞으면서, 처음으로 한국에서 동성애자 자긍심 행렬이 열렸다는 사실에, 허나 하늘도 무심하게 그토록 모질게 폭우를 퍼부었단 사실에, 빗물 속에 찔끔찔끔 눈물을 섞어 흘려보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구경꾼들 사이에 있던 동성애자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두려움,
아스팔트로 쏟아져 나와 자기 존재를 찬란히 증명하고 싶지만 여전한 두려움이 발목을 부여잡고 있었던 게다. 미상불 군중 속에 섞여 보이지 않게 존재의 갈증을 느꼈던 이들, 바로 그랬을 게다.

1회 때는 원하는 사람들에게 유성 페인트를 쓰게 했었다. 얼굴에 바르는 페인트.
그날 쏟아졌던 폭우는 유성 페인트가 무색하게시리, 사람들 얼굴에서 희치희치 페인트를 벗겨내고 말았다. 꼭 이맘 때쯤이면 전화 오는 친구가 있다. 조금 전에 그는 또 전화를 해서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1회 퀴어문화축제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젊은 친구, 그는 행사가 다 끝나고 난 날 오열을 터뜨렸었다. 아마 그때 그 친구도 희치희치 벗겨나가던 페인트 사이로 유골처럼 보얗게 드러나던 100여 명의 행진 참여자들의 살갗을 보았을 게다.

하지만 2회 퀴어문화축제 때부터 상황은 완연 달라지기 시작했다. 홍대 대학교 운동장에서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 수가 적어 걱정이 들었는데, 홍대 앞 정문 거리로 나서면서부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구경꾼을 자처하는 우리 동성애자 친구들이 두려움을 떨쳐내고 아스팔트 위로 와르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수는 갑자기 증가했고, 많은 이들은 2년간의 학습이 이처럼 놀라운 장면을 연출했을 거라고 웃음지으며 속닥거렸다.

두려움, 그건 무경험과 낯섦에서 기인한다.
퀴어문화축제는 일반 축제와 달리 조직위에서 사전에 기자들을 교육시킬 뿐만 아니라 당일 날에도 철저히 사전 준비를 시킨다.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찍지 말 것, 표식이 있는 사람들을 찍었을 때는 그 사진을 폐기할 것, 이 모든 게 지켜지지 않을 시엔 응분의 대가가 치뤄질 것 등등.

이런 조건 후에 남는 건 혹시 길거리를 지나치다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자기를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자기 존재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에 대한 일차적인 두려움.

이는 무경험과 낯섦에서 기인한다. 한 번쯤 썬글라스라도 끼고 아스팔트 행진에 나서본 사람은, 외려 조롱꾼들과 구경꾼들을 조롱하는 희열를 느끼곤 한다. 이런 희열, 자기 존재를 과시하며 배당받는 즐거움은 결코 어두운 게이 바나 인터넷 단말기 앞에서 보증될 수 없는 기쁨이다.

이태원에서의 퀴어문화축제, 종로에서의 퀴어문화축제(불행히도 가족의 병환 때문에 내가 유일하게 빠졌던)가 치뤄지는 동안 우리 동성애자들은 점점 이런 기쁨에 감염되기 시작했다. 행사가 치뤄지기 몇 주 전부터 의상을 체크하고, 같이 갈 사람들을 물색하고,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궁금해한다. 마스크를 끼든, 야구모자를 쓰든, 썬글라스를 쓰든, 사람들은 점점 더 아스팔트로 쏟아져나오고 있다. 백 명 남짓으로 시작된 동성애자 거리 퍼레이드는 이제 오 백 명 이상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백날 뭍에서 수영 연습을 하는 것보다 한 발 물 속에 발을 담그는 게 더 중요하단 옛말이 있다. 두려움을 살해하자. 비록 처음이니 썬글라스를 쓰고 야구모자를 쓰더라도, 물 속에 생애 처음으로 발을 담그듯 아스팔트 위로 발을 내밀어보자. 심장은 콩닥거리고, 스멀거리며 땀이 돋아날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우리에게 찾아오는 게 있다. 우리의 존재가 가벼워지고 팽창하면서 공짜로 얻어지는 웃음, 작은 웃음, 행복의 말풍선이다.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태양 아래 아스팔트 위에서 웃음지을 권리, 어두운 술집에서나 벌였던 우리의 끼와 작렬하는 웃음 소리를 세상 속에 노출시킬 삶의 권리.

6월이 되면 어느덧 아스팔트가 생각나고, 해피투게더 노래가 떠오르고, 썬글라스가 외려 섹시하게 느껴지고, 이제 점점 더 해가 갈수록 웃음짓는 맨얼굴들이 많아질거란 생각에 기분이 한껏 달떠오르곤 한다.

세상에! 올해는 퀴어문화축제에 국회의원도 오고 모 정당의 의견그룹에서도 참가한다고 한다.

모던보이 2004-06-13 오후 22:43


비 오는 거리, 이승훈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