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자주 들르게 되는 어느 이반 술집 화장실에 놓여진 잡지를 보게 된 일이 최근에 있었다.
퀴어 플라이 창간호에 어떤 사람이 아주 멋진 말을 아주 멋지게 써놨다.
동성애자는 언어가 없다... 라고 그는 말했다.
못 알아듣는 말, 소통이 되지 않는 말... 그렇기에 언어가 없는 것이라 했다.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쓴 글을 쭉 훑어 읽어보면 너무나 쉽게-그 말을 하게 된 이유를-와 닿기 때문이다.
(결코, 내가 독해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란 얘기)
정말 배운 사람들의 글은 이렇게 다르구나 싶을 정도로 그의 글은 나를 매료시켰다.
(그가 배웠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그런 표현은 어딘가 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개나 돌고래의 말을 나는 못 알아듣지만, 그들에게 언어가 없다고 말하기엔 분명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예를 들면 동물의 예를 드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래서 그냥 동성애자... 그냥 사람들...의 예로 다시 말하련다.
동성애자인 내가 하는 말을 이성애자들은 잘 못 알아듣지만,
그렇다고 내가 가진 언어가 생명력을 잃게 된 건 아니다.
사실.. 그들끼리도 소통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뉴스를 보면 내 말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정치야말로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며, 관계야말로 [언어]에 관한 것이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끼리도 그리 소통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가 한 말은 이렇게 수정돼야 하지 않을까?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언어가 없다... 라고 말이다.
아니,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서로의 언어를 죽이고 있다...라고 표현하는 게 좀 더 수긍하기 쉬울 듯하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입을 막고 사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손사래를 치며 상대의 말을-막무가내로-막기도 하고,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의 귓구멍을-필사적으로-막고 산다.
그렇게 될 때 언어는 죽고 없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죽어가는 건 언어만은 아니다.
동성애자를 향한 이성애자의 편견을 폭력이라 부르며,
우리는 사는 동안 그것에 맞서 싸우는 것이 필요한 일이며 옳은 것이라고도 한다만...
우리 내부에서 발생하는 소통의 단절은 어찌 바라볼 것인가? 라는 의문은 남는다.
이런 의문은 순서상 무엇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가를 묻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그런 의문이 [나]는 편견의 폭력에서 자유 한가?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면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 같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내 언어를 죽인 건 나다.(어쩌면 과장이 아닐 수도 있다.)
개선의 시발점은 나이어야 함을 또 한 번 절감하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