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하면 <더 퀸>은 당연히 전기 영화일 줄 알았다. 아니면 거대한 위기를 해결하는 영웅성을 보여주거나 고귀한 휴머니티를 보일 줄 알았다. 혹시 여왕이 대표하는 영국의 가치를 보이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의 배경은 고작 일주일이고 여왕이 한 것은 다이애나에게 추모하는 뜻을 전한 것뿐이다 앞으로 할 얘기는 <더 퀸>이 픽션임을 인정하고 하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그 당시의 여왕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영화 속의 여왕에 대한 이야기다.
- 우리가 어떤 정치적 문제를 접하게 될 때 그것은 혼자 오지 않고 수많은 사정들을 달고 온다. 솔직히 말하면 그 사정들은 많은 부분 ‘개인적인 사정’이다. 우리가 정치적 결정을 할 때 얼마나 ‘공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는 얼마나 ‘사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것일까. 공-사(공과 사를 구분하긴 하지만 분리할 수 없다는 고민에서 ‘공-사’의 표현을 쓰자)로 이룬 세계에서 사는 우리에게 이는 늘 봉착하는 문제다. 우리는 그리스의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공공의 영역에 드러나 있고 어느 순간 혹은 ‘항상’ 공적인 결정을 한다. 혹은 해야 한다. 우리가 명쾌하지 않고 지저분한 사연들을 지닌 존재라고 더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이애나가 죽었을 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다이애나에 대한 애증과 자신에 대한 원망, 아들과 손자에 대한 걱정들이 섞인 복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수가지 감정을 나열한다고 해도 그 감정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시시때때에 섞이고 변하는 것, 통제할 수도 처분할 수도 없는 것이 이런 감정들이니까 말이다. 누구도 사적인 감정을 온전히, 안정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여왕에게 다이애나의 죽음은 그저 전 며느리가 죽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녀가 슬픔을 정리할 찰나도 없이 그것은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다이애나는 황태자의 전처이자 동시에 ‘국민의 공주’이다. 죽은 다이애나에게 여왕이 어떤 처우를 하느냐에 따라 ‘왕가의 전통’과 ‘국민감정’ 사이의 여왕의 행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가 왕가의 전통과 국민감정 사이의 문제가 되면서 그녀의 개인적인 감정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여왕은 노련하게 정치를 할 줄 안다. 여왕의 긴 통치 동안 그녀는 끊임없이 그렇게 훈련되었을 것이다. 정치적 덕성-virtue-는 어느 정도 꾸며진 것이 필요하다. 'virt-'는 ‘virtual' 등의 용례에서 보이듯이 가상, 가장을 뜻한다. 통하는 언어와 행위만이 정치적 행동이다.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섞이지 않는다면 그 말은 더 이상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정치적 언어가 아니다. 그저 던져지는 말이 아니라 말하는 주체, 말을 듣는 객체, 그리고 그 사이의 관계 그리고 전망을 두고 꾸며지는 언어인 것이다. 이 때 언어는 레토릭이 된다. 또한 행동이 공공의 영역에 드러날 때 그것은 (정치적) 행위가 된다.
여왕이 ‘그녀에게 화가 나기도 한다.’거나 ‘다이애나는 대단한 게 없다’라고 한다면, 설사 그것이 여왕의 진심이라도 정치적으로는 옳지 않다. 여왕이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연설을 들으며 블레어 총리의 부인이 ‘진심은 하나도 없다’라고 했을 때, 블레어 총리가 ‘진실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저걸 한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대답한 것은 사적인 언어와 공적인 언어의 간극을 보여준다. 또한 다이애나가 죽었을 때 여왕이 끝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거나, 감정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슬픔을 표현하며 성급히 조기를 달고 왕실 비행기를 이용해 다이애나를 운구했다면 둘 다 왕실의 권위와 입헌군주제의 정체를 해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과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은 ‘은폐’다. 다이애나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가 실은 너무 힘들고 슬픈 여왕은 아무도 없는 시냇가에서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녀의 정치적 발언은 모든 방송에서 하는 6시 뉴스로 생방송되는 데 말이다. 정치적 존재로서의 우리는 슬픈 존재다. 더 정치적일수록 더 슬플지도 모른다. 더 은폐해야 할 것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가끔은 기자회견하다가 울고 싶지 않을까, 너무 한것 아니냐고 기자에게 땡깡부리고 싶지 않을까, 김한길과 천정배에게 치사하다고 삐지고 싶지 않을까.
우리의 몸은 공공의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긴장하는 공간이다. 공공의 영역에서 말과 행위를 할 때 그것은 사적인 것과 같진 않지만 또 분리되지도 않는다. 공공의 영역이 단순히 정치적 사고 기계와 각본에 의한 연극무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기와 신중함, 협상과 노련함이 필요하다. 이러한 종류의 가장들이 결국 덕성virtue를 만드는 것이다. 몸을 통해 진행하는 공적인 언어와 행위, 그리고 사적인 것들 사이의 긴장 때문에 덕성이 필요한 것이다.
덕성을 강조하는 정치는 자칫 보수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덕성은 약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이론이라면 ‘약자를 억압하는 것이 나빠’라고 하면서 쉽게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치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결국은 기존의 권력구조 위에서 이룰 수밖에 없다. 이상을 현실화 시키는 언어가 정치의 언어라면 약자일수록 오히려 공-사의 긴장을 강하고 더 절실히 느낀다. 약자의 몸은 긴장들이 만나는 각축장이다.
약자들이 기존의 권력구조를 넘어서 말하고 행위해 결국 그것을 통하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통하는 언어와 행위를 만들지 못하면 변하는 것은 없다. 심지어 폭력을 써서 기존구조를 바꿀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폭력과 전쟁에 의해서 독립한 많은 탈식민 국가들이 이름과 구성원만 바꿀 뿐 결국은 같은 종류의 제도와 권력으로 약자들을 억압해오지 않았던가. 통하는 말과 행위를 만드는 것이 약자의 전망이어야 한다. 가야트리 스피박의 ‘협상의 정치학’도 결국은 이 긴장을 극복하는 길에 대한 모색이다. 권력이 없는 자에게서, 언어가 없는 자에게서, 대변하지 못하는 자에게서 말을 만들고 행위를 만들어야 한다. (여왕 얘기하다가 왜 여기까지;)
공공에 드러나는 모든 순간에 공-사의 긴장을 느낀다. 하지만 기존의 많은 서사들은 이 긴장을 드러내지 않고 공-사 중 어느 한 쪽에 포섭되는 모습을 그린다. 드라마 ‘주몽’에서 주몽의 많은 사적 서사들-어머니에 대한 욕망, 해모수와 금와 양쪽으로 분열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예소야와 소서노에 대한 마음, 대소에 대한 콤플렉스-은 그저 부여, 한나라와의 경쟁이라는 공담론에 포섭되어 목적을 강화할 뿐이다. 또한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복수하기 위해서 정치를 한다’ 등의 정치극화에서 흔한 스토리는 반대로 사적 감정 속에 정치를 없애버린다. 공-사의 긴장은 극화하기 역시 재미가 없기 때문일까.
나도 이러한 서사 속에 은폐한 긴장들을 드러내 보려고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스캔들>이라는 소설인데 문학상 심사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나와 몇몇 지인들만 아는 소설이다. 재밌는데, 원하면 보내주겠다. 소설을 어떻게 끝낼지 한참 고민하다가 의미 해석의 범위를 넓게 볼 수 있는 행위로 끝냈다. 소설을 쓰면서 이 외롭고 멍청하고 우유부단하고 이기적인 인간이 사자 입속 같은(전경린의 탁월한 비유를 빌려왔다) 이 복잡하고 위험하고 비루한 세상에서 위대함을 발휘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우리가 살 길은 사자한테 물려가도, 아니 사자 입 속에서 태어나도 정신을 차리는, virtue를 갖는 길 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