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친한 그녀에게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추천해주었다. 소설은, 작가가 직접 심리상담을 받았던 2년간의 시간을 픽션을 재구성한 것이었다. 누구라도 궁상맞은 사람들은 그 소설을 한번 잡으면 손에서 놓기 힘든데, 그 소설은 폐부를 푹푹 사정없이 찔러대기 때문에 바닥을 구르고 손에서 땀을 절절 흘리고 가슴을 부여잡으며 읽는 매저키즘의 맛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에게 책을 추천받은 그녀는 쉽게 읽을 수 있으리란 호언장담과는 다르게, 몇날며칠을 절절 매며 책을 읽더니 오늘부터 심리상담을 시작했다고 했다. "나를 방치하는 것은 이제 그만, 치유할 수 있다면 치유하고 살아야지"라고 하면서.
나도 그 책을 처음 읽으면서 (돈이 있다면) 심리상담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요즘도 여전히 언젠가 내 발로 정신과를 찾아가겠구나 싶지만.
나는 좀 두렵다. 내 감정의 옷장을 열어보니. 기쁨의 넝마주와 희망의 이미테이션이 구겨진 채 뒹굴고 있었고, 그래도 어디다 내다 팔 값어치 있는 건 슬픔과 외로움 뿐이었다. 점쟁이 말대로 글을 쓸수록 상태가 안좋아진다는 비극적이고 우스운 운명일지라도, 나를 나답게 해주는 건 내가 따라할 수 없는 기쁨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슬픔이며 외로움이며 그 발버둥 끝에 겨우 건지는 위로였다. 그 상실과 부재들을 해소해버리면 나는 그저 주저앉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릴 것 같다. 사람들 속으로 분해될 것 같다.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이것이 또다른 방어기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방어기제 따위 버리고 내 감정의 옷장을 좀 더 풍부히 채웠으면. 남성 이성애자 중심의 정신분석학 이데올로기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면 믿어줄텐데. 어째. 힘겨워보이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