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9. 19.
추석 전날, 송편 빚기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읽어야 할 책이 많았고, 그래서 도서관을 간다는 핑계로.
햇볕은 따가웠다. 구름은, 둥글게 둘러싸 있는 바다와 산과 숲과 건물들의 저 먼 가장자리에서만 피어올라 있을 뿐, 하늘의 가운데는 파랗고 하얬다. 청바지 안이 축축해질 정도만큼 더웠다. 중부 지방은 호우주의보가 내렸다고 했다.
- 육지에 비오믄 제주도는 덥주게.
제주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상의 관계학이 이 날도 들어맞았다.
30분을 걸어서, 몇 년만에 찾아온 제주시립 탐라도서관은 휴관이었다. 도서관으로 들어서면서, 남학생 하나와 마주쳤다.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민망함을 보이는 그 학생의 마주친 눈빛을 보고, 도서관 울타리 안의 그 조용함과 함께, 도서관이 휴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도서관을 돌아보니 도서관 경내에 있는 사람은 나까지 모두 여섯 사람. 한 아주머니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고 있었고, 나머지 넷은 ‘야외학습장’ 나무 그늘에서 깊게, 움직임 없이 고요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 중 둘은 야외학습장 탁자에 책이며 노트며 필기구를 펼쳐놓은 채였다. 조금 습하긴 했지만, 노트를 팔랑팔랑 넘기도록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야외학습장 숲 속의 그늘은 깊고도 아늑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건 풀벌레의 소리 약간, 비둘기와 참새의 울음소리, 비둘기의 간간한 날갯짓 소리, 귓바퀴를 따라 계속해서 흐르던 바람소리뿐이었다.
음료수를 자판기에서 하나 뽑아들고, 적막한 도서관 건물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워물다가 문득,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의 한 장면을 떠올렸었다. 박해일과 배종옥이 문 닫힌 동물보호센터의 앞마당에 있는 장면이었다. 그 동물보호센터는, 그곳에서 수의사로 일하던 배종옥을 박해일이 자신이 일하는 잡지사의 사진기자로 섭외하러 갔던, 그 둘이 처음 만난 곳이었다. 박해일이 찾아갔을 때 배종옥은 개의 제왕절개 수술을 하고 있었고, 박해일은 그녀의 수술을 도왔었다. 몇 마리의 강아지가 태어났다. 그 다음 만났을 때 그 둘은 충동적으로 그 강아지들을 보러 가자는 핑계로 그곳을 찾아갔다. 그들이 찾아간 그 저녁 무렵, 그곳은 쉬는 날이었다. 조용한 동물보호센터 앞마당에서, 아직 서로 낯선 그들은, 약간 당혹스러움과 민망함이 든 얼굴로, 담배를 피웠다. 박해일은 귀여운 동생의 모습으로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했다. 학교 다닐 때 이것을 잘 해서 힘쓰는 애들이 자길 못 건들었다는 유치한 자랑을 하면서.
그것은 그 둘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곳에 찾아간 것은, 아마도 서로 가까워지고 싶은 호감에, 둘만이 그나마 가지고 있는 공유된 것을 찾으려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둘만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두 사람의 관계를 내밀하고 친근한 무엇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 둘의 공유의 확인은, 동물보호센터의 휴관으로 한편으로는 좌절되었으면서도, 동시에 둘이서 휴관인 저녁, 그곳을 찾았다는, 그래서 철봉에서 깔깔대며 놀았다는, 또다른 공유된 기억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예전의 기억을 다시 한 번 공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강렬한 공유를 다시 만들게 된다는 것. 동물보호센터의 닫힘은 그 둘 관계의 새로운 열림으로 전환한다.
낯선 상황들, 예상 못한 일들의 마주침. 이런 것들이야말로 사람의 기억과 관계를 만들어낸다. 예상 못한 도서관의 휴관처럼. 닫힌 동물보호센터 앞의 박해일과 배종옥처럼. 그래서 그것은 낯선 마주침의 연속체인 여행의 세계와 닮았다. 내 익숙한 동네에서 생기는 새로운 여행의 세계.
나는 요즘 예상 밖의 상황들과 자주 마주치고 있다. 그것들은 항상 적잖은 스트레스이고 저 멀리서 희미하게 찾아오는 두통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새로운 기억들과 공유들을 만들고 있다고도 할 것이다. 이런 일들이 사람과 관계의 성장이라면, 나는 그래도 한 발짝씩 더 나아가고 있는 것이거나, 한 길씩 더 깊어지고 있는 것이거나, 한 폭씩 더 넓어지고 있는 것일 게다. 그래서 그런 전진 혹은 성숙 혹은 확장은 스트레스와 저 멀리서 희미하게 찾아오는 두통들을 새로운 즐거움으로 변환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즐거움으로, 내가 이 세상의 길들을 계속해서 여행하고 있다고, 나는 믿고 싶다.
자연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나를 키우는 구나.. 어찌나 그리 자연스러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