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치유카페 글인데 ... 한번 보시고 판단 좀 부탁드립니다. 결국 서로를 이용한다는 거에 불과하다는?것이라면 이성애랑 뭔 차이가 있는지..아 그리고 뭔말인지 모르겠어요 ㅠㅠ
가톨릭 신자이자, 동성애 성향을 지닌(homosexually-oriented) 사람으로서, 나는 동성애와 동성행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자세에 대해 교회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 그리스도를 믿는 뭇 교회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가톨릭은, 의미 희석된 복음으로써 동성애자들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기를 거부했을 뿐더러, 멸시섞인 적대심의 메시지로써 그들을 인간이하의 존재로 폄하시키는 태도도 거부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나를 사랑하고 있으며, 동성애자로 살고 있는 나와 같은 모든 남성과 여성을 사랑한다. 가톨릭 교회는 우리를 성인(成人)으로 바라 보면서, 우리도 역시 우리 삶을 성화시키고,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에 다가가는데’(가톨릭 교회 교리서 2359) 성령과 협력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 준다. 가톨릭 교회는 확고한 자세로 우리를 성인(聖人, sainthood)의 삶으로, 그리고 우리를 그러한 삶으로 데려다 줄 좁은 길로 부르고 있다.
나는 그러한 가르침의 가치를 쉽게 깨닫지는 못하였다. 21-28세의 기간동안, 나는 게이 활동가(gay activist)로서의 삶을 살았다. 나는 오늘날 게이 사회에서 제공하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들을 받아들이고 전파하였다 : 즉, 행동적인 동성애라 할지라도, 그것이 ’안전하게’ 그리고 ’충실하게’만 실행된다면 동일한 가이드라인을 따르는 이성 행위보다 나쁠 것이 없다 …, 동성애를 논박하는 성서나 그외의 도덕적 가르침들은 단순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이고, 아마도 ’동성애 혐오자들(homophobes)’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 어떠한 교회라도 나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할 아무런 권한도 없다 … 등 나는 ’성공적인’ 게이의 삶을 이루어 나가는 온갖 것들을 빠르게 축적해 나갔다. 나는 오랜 기간동안 관계를 가져온 애인이 있었고, 콘도를 구입했으며, 업무에 있어 빠른 승진의 길을 탔고, 게이 리조트들을 돌며 휴가를 보냈다. 내 친구들은 게이였고, 나의 인간 관계도 게이였으며, 나의 직장도 게이-친화적이었다. 그래서, 나의 삶은 젊음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나의 심장은 마치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쉴 새 없이 두근거렸고, 찾아낸 모든 새로운 즐거움들은 더욱 날카로운 고통만을 가져다 줄 뿐이었다. 게이의 세계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을 그토록 오랜 기간동안 생활하던 나는 그것은 결코 나를 채워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28세 되던 이른 봄, 나는 나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렸고, 나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의미는 도데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한 탐험은 간헐적이나마 나를 가톨릭 신앙으로 이끌었고 나는 그 이후로 계속해서 감사로이 그러한 신앙을 살아가고 있다.
동성애 성향(homosexual orientation)과 정결(chastity)에 대한 교회 가르침은 나의 인생여정에 있어 위대한 해방자 역할을 해 주었다. 그 가르침들은 널리 알려져야 마땅할 것이다.
동성애 성향에 대한 가톨릭 교회 가르침의 독특함이란, 너무도 많은 다른 입장들을 성격짓는 결정주의(determinism: 동성애는 비가역적이며, 동성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평생 살아야 한다는 숙명주의 - 역자주)를 거부한다는 데로부터 흘러 나온다. 동성애 성향을 갖는 남성과 여성들은 (’압박받고 있다’는데 근거한) 칭찬이나 (내재적인 ’죄스러움’에 근거한) 비난,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자동적인 후보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다. 이는 존중심으로 가득한 가르침이다. 가톨릭의 가르침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서 인식하며 우리가 본능에만 매어 있는 단순한 짐승들이 아님을 인정해 주고 있다.
동성애자들이 정결로 불리움 받았다는 가톨릭 교회의 일관된 자세는 그 가르침에 담긴 은총의 독특한 표현에 공여하는 바가 크다. 바로, 사랑에 대한 교회 가르침 때문이다. 현 시대의 문화는 거짓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우리가 요리를 ’사랑하고’, 애완동물을 ’사랑하며’, 야외 풍경을 ’사랑하고’, 우리 부모와 자녀들을 ’사랑하며’, 배우자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경우,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바에 맞갖게 그(것)들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는다. 우리는 (대상 그 자체를 사랑한다기보다) 그 맛 때문에 요리를 사랑하고,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애완동물을 사랑하며, 그 아름다움 때문에 야외 풍경을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부모, 자녀, 배우자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온갖 조건들로 묶어 놓으며, 그것을 자기 이익으로 물들이지 않는가? (특별히, 부부가 인공적인 피임법을 서로의 결혼 생활 안으로 들여 놓는 경우가 그렇다.)
이는 정결에 충실하기 전의 삶과 그 후의 삶 사이의 확연한 대비(對比) 안에서 내게 명료하게 다가온다. 나의 파트너와 동성 행위를 하던 시절에, 우리는 우리의 성행위들을 ’사랑만들기(making love)’라고 부르곤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는 것 외에는,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의 파트너도 동의한 바, 우리는 서로를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며, 정결에 충실한 이후의 나의 체험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다른 이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우리 자신 그대로의 깊은 감정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지길 원하고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유형의 감정적 충실성이란, 성행위가 우정의 일부가 되어 버릴 위기에서 고초를 겪는다. 정결한 사랑은 종종 어려움을 수반할 수 있으나, 그만큼 진리안에서 충만히 살아갈 수 있다. 나는 가톨릭 교회가 그것을 가르치기에 매우 충분할 정도로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음에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나는 동성애자들이 그러한 가르침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커리지(Courage)라는 단체에 대해서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커리지에서의 여러 해의 나날들에서, 나는 내가 실행적인 게이였을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진실되고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커리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증거는, 사랑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理解)를 향해 우리 문화가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친구사이 상담팀 차돌바우 입니다.
sinclair님 께서 보신 부분이 정확하네요.
솔직히.. 퍼온글은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무시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듯 합니다.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전문가인냥 떠드는 사람이 많거든요.
무시하는게 상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