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 레] 2003-05-21 (경제) 17면 04판
정부와 업체들의 ‘정보 인권’ 침해가 위험수위에 이르고 있다. 정부는 통신 및 인터넷 정책에서 정보인권 불감증을 드러내고 있고, 덩달아 업계에선 가입자 신상정보를 활용해 가입자 몰래 부가서비스에 가입시켜 요금을 받아내는 등의 인권 침해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효율성에 치우쳐 있는 정부나 사업자는 물론, 심지어 피해자인 국민들조차 이를 인권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있어, 피해 발생 때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태가 방치될 경우 애써 추진한 정보화가 삶의 질을 높이는 효과를 반감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고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예컨대 리눅스나 매킨토시 컴퓨터 사용자들은 현재 전자정부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한다. 서비스와 홈페이지를 마이크로소프트(MS)의 소프트웨어 한가지 규격에 따라 설계해, 다른 업체 소프트웨어 사용자들은 접근할 수조차 없게 만든 탓이다. 부처 담당자들은 “적은 예산으로 개발하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 정보통신부 관계자는 “리눅스나 매킨토시 사용자 비율이 5%도 안 되는데 이들까지 챙겨야 하느냐”고 반문할 정도로 불감증이 심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 또는 정보 접근권에서 볼 때, 이런 차별은 명백한 인권 침해라고 지적한다. 진보네트워크센터 장여경 정책실장은 “정보시대를 맞아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고는 일과 생활 자체가 어렵게 됐다”며, “따라서 인터넷 이용을 차단하는 것은 행복추구권을 박탈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정통부가 추진하는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도 같은 지적을 받고 있다. 상지대 홍성태 교수는 “이는 사회적 약자들이 그들의 언어로 의사 표시를 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민등록 정보를 실명제 서비스에 활용하는 것 역시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자기 정보 통제권을 침해하고, 개인정보를 부당하게 이용하는 행위에 해당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법무법인 지평의 이은우 변호사는 “정보통신산업협회 등이 개인정보를 수집해 실명 확인 서비스를 하는 것은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을 위반한 것일 뿐 아니라, 국민의 자기 정보 통제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성애 사이트 등 커뮤니티 사이트들이 청소년 유해 매체물로 지정돼 폐쇄되고 있는 것도 표현의 자유 및 정보 공유권 차단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인권 침해 사례로 꼽힌다. 이런 잣대로라면, 왼손잡이, 키 작은 사람들, 장애인 등 소수와 비주류들의 모임 사이트도 모두 폐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통신업체의 잇단 가입자 신상정보 노출과 부당 이용, 네티즌들의 전자우편 주소를 수집해 거래하거나 스팸메일 발송에 사용하는 것은 인권 침해 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은우 변호사는 “이런 침해 사례를 들어 프라이버시 보호를 주장하면 바보 취급을 할 만큼 침해가 일반화하고 있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정부와 사업자들은 물론, 피해 당사자인 국민조차도 이를 인권 침해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대부분 단순한 불평, 불만 사항으로 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육행정 정보시스템(네이스)이 인권 침해 소지를 갖고 있다”며 개선을 권고한 국가인권위원회의 판단은 정보화에 인권을 접목한 국내 첫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한 학생이 정신과 상담을 받았거나 친구와 싸움을 벌인 사실이 네이스에 입력되면, 평생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인권 차원에서 접근한 것이다. 실제로 성장기에 정신과 상담을 받은 자료들이 평생 ‘딱지’처럼 붙어다니는 경우를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일부에선 개인정보를 다른 목적으로 쓰지 않고, 보안체제도 잘 갖추면 될 것이라는 반론도 하지만, 나중에 합법적인 방법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까지 막을 수는 없다. 이런 사례는 통신요금 연체자 관리를 하면서 축적한 정보통신산업협회의 데이터베이스나 주민등록정보를 게시판 실명제 서비스에 이용하는 것에서 이미 입증되고 있다. 건국대 한상희 교수는 “인권 침해 지적을 받고도 비용 문제를 내세워 그대로 운영하려는 정부의 태도 자체가 정보 인권이 얼마나 위협받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섭 정보통신전문기자 js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