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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호][인터뷰] 더 해보는 친구 인터뷰 #3 : 나미푸
2022-11-07 오전 11: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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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0월 

 

 

 

'더 해보는 친구 인터뷰'는 다시 새로 시작하는 친구사이 구성원 인터뷰입니다.

(기획의도 등은 https://chingusai.net/xe/index.php?mid=newsletter&page=2&document_srl=620205 참고)

인터뷰 대상은 친구사이(소모임, 사업팀 등 모두 포함)에서 활동 중이거나 활동했던 퀴어 당사자 모두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분께서는 언제든 신청해주시면 됩니다.

 

* 인터뷰 신청 링크: https://forms.gle/h2BsEmMNBsoQko2e7

 

 

 

[인터뷰] 더 해보는 친구 인터뷰 #3

나미푸(가진사람들 운영자 겸 오픈테이블 공동진행자 / 

전 친구사이 대표, 지보이스 단장)

 

 

1. 들어가며: ‘가진사람 나미푸’
2. 어린 시절에 가진 것: 당당함, 승부욕, 젠더 플루이드
3. 살면서 갖게 된 소수자 3종 세트

4. 미국 유학 시절의 배움
5. 누가 뭐래도 친구사이
6. 지독한 워커홀릭: 그의 열정과 허망함
7. 마무리

 

 

      8월 말 친구사이 워크샵에서 친구사이 원로(?)인 나미푸와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사이 구성원 인터뷰를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그는 흔쾌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술자리에서 그냥 한 말인지, 진지하게 참여하고 싶은 것인지 헷갈렸다. 마음에 담고 있다가 적절한 시기에 연락을 취해서 여전히 인터뷰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나미푸는 또 한 번 흔쾌했다.
  그와의 인터뷰가 정해지자 숙제가 많아졌다. 그는 2006년 9월에 지보이스로 친구사이에 처음 나왔다. 만 16년 동안 온갖 일을 했고, 여러 기록을 남겼다. 똑같은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그의 글과 말을 미리 읽었다. 최근의 기록을 보면 그는 주로 HIV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인터뷰를 통해 그가 가진 것을 최대한 알아보고 싶었다. 나미푸는 인터뷰 공간으로 자신의 집을 열어주었다. 크고 검은 개가 있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1. 들어가며: '가진사람 나미푸'

 

 

플로우(질문자, interviewer) 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미푸(답변자, interviewee) 안녕하세요. 미미(반려견)가 짖어서 놀랐죠. 이 집 정말 온갖 사람들이 거쳐 갔어요. 여기서 친구사이 형들 동생들도 많이 먹고 갔어요. 환영합니다.

 

플로우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 인터뷰는 앞선 두 번의 인터뷰와는 다르게 준비했어요. 앞의 두 사람은 각각 작년과 올해 친구사이에 데뷔(?)한 사람들의 이야기였어요. 반면 나미푸 형은 친구사이 나오신 지 16년이 되셨고, 그만큼 활동 기록도 많이 남아 있어서 그냥 일반적인 질문을 드리는 건 기존 기록의 반복이 될 것 같았어요. 남아 있는 기록을 먼저 보고, 그걸 바탕으로 궁금한 것들을 좀 여쭤보려고 합니다.

 

나미푸 준비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제가 말이 좀 많아서, 나중에 정리하는 게 힘드실 수도 있어요. 그래서 미리 틀을 잡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플로우 네, 그래서 주제를 미리 준비해 왔는데요. 오늘의 주제는 ‘가진사람 나미푸’입니다. 당연히 ‘가진사람들(친구사이 내 HIV/AIDS 감염인들의 자조 모임-작성자 주)’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친구사이에서 나미푸님이 최근에 활동하신 기록만 보면 HIV 감염인, 즉 PL(‘People Living with HIV/AIDS’의 약자-작성자 주)로서의 정체성만 주로 보이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것 말고도 가진 게 많은 나미푸라는 사람의 모습을 더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나미푸 좋습니다. 

 

 

2. 어린 시절에 가진 것: 당당함, 승부욕, 젠더 플루이드

 

 

플로우 기록들을 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건, 나미푸님은 당당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어떤 부분이든 숨겨야 하는 상황을 오히려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았고요.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사람과 관계 맺는 습관이 쌓여서 형성되는 태도라고 생각해서, 나미푸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궁금해졌습니다. 

 

나미푸 이건 굉장히 명확해요. 전 어릴 때부터 완전 FM 같은 사람이었어요. 저희 엄마가 학교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 아니었어요. 전라남도 완전 시골에서 자란 여자였고, 여자아이를 학교 보내지 않는 환경이었던 거죠. 엄마 머릿속에는 자식들을 키울 때 시킬 게 가득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과외를 했거든요.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한국에 있었는데, 그때까지 전 과목 과외 선생님이 항상 있었어요.

 

플로우 과목별로 선생님이 한 분씩 계셨다고요? 

 

나미푸 아니요. 전과목 공부를 봐주는 선생님이 한 분 계셨어요.

 

플로우 스카이캐슬에 나오는 김주영 쓰앵님 같은 분이 그때도 계셨네요. 

 

나미푸 그렇죠. 어쨌든 엄마가 못 배웠기 때문에 저를 공부시켜야 했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과외 선생님도 있었고, 피아노도 배워야 하고 태권도도 배워야 하고 웅변학원도 가야 하고, 여하튼 ‘뭔가를 해야 한다’라는 게 굉장히 명확했어요. 항상 뭔가를 배우고, 그걸 잘 해야 하는 게 일상이었던 거죠. 저는 특별히 당당해서가 아니라 그냥 당연한 걸 하는 거예요.

남들이 볼 때는 (제가 하는 이야기들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거라서 당당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데, 저는 반대로 ‘아니 PL이 왜 PL 얘기를 왜 못 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이 얘기를 해야만 해’라는 생각이 있으면, 전 그걸 FM처럼 해야 하는 거예요. 나를 드러냄으로써 어떤 일들이 발생할지 아는데 그걸 안 할 수가 없는 사람인 거예요.

 

플로우 네. 형은 번민하는 자아가 거의 없는 느낌이었어요. ‘이걸 내가 해도 될까, 할 수 있을까’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없거나 매우 짧은 게 아닌가 싶었죠.

 

나미푸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그냥 하는 것 같아요. 게이 커뮤니티에 나와서도 그랬죠. 누가 봤을 때 ‘너는 되게 당당하구나’ 이렇게 볼 수 있는 것 같긴 해요. 제 삶의 이야기니까요. 사실 저는 이 모든 게 제 일이 아니었으면 안 했을 수도 있을 것 같고, 그게 제 한계기도 해요. 저는 제 일이니까 당연히 내가 목소리를 높여야겠다고 생각해서, HIV 이슈나 ‘켐섹스(chem-sex)’라고 알려진 커뮤니티 내 약물 복용 및 성관계 문제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까 번민하는 자아 말씀하셨는데, 제 일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목소리를 내는 게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그런 자아가 작동하는 것 같긴 해요. 그 이슈를 나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과정이 필요한 거죠. 그게 시간이 걸리다 보니, 관심은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이슈들도 많아요. 어쨌든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저로서는 ‘해야 하니까 하는 일’이어서 말도 하고 활동도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보기에 저의 표현 방식이나 태도가 당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네요.

 

플로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다 보니 궁금해졌는데, 전 과목 과외 선생님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다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잖아요. 뭘 좀 못할 수도 있고, 또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해야 할 일이 빽빽하게 주어진 상황 자체를 억압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느낌은 전혀 없으셨나요?

 

나미푸 신기하다. (잠시 침묵) 물어보시니까 생각을 좀 해봤는데, 이거는 부모님의 교육 방식 덕분인 것 같아요. 하기 싫다고 하면 절대 안 시켜요. 어렸을 때 태권도를 했는데, 전 그게 싫었어요. 태권도 하는 남자애들 땀 냄새가 나고, 태권도장에 가면 또 그 이상한 냄새가 나잖아요. 그게 섞여가지고.

 

플로우 네. 그 고무 매트 냄새랑 땀 냄새랑.

 

나미푸 냄새나서 안 그래도 싫은데, 거기서 누가 나한테 호모라고 자꾸 그러는 거예요. 그때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플로우 (웃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벌써 어마어마한 끼가......

 

나미푸 그러니까요. 그땐 호모가 뭔 말인지도 몰랐어요. 그때 요플레 같이 떠먹는 요구르트 중에 ‘꼬모’라고 있었는데 그 얘긴 줄 알았어요. 어쨌든 그런 놀림이 싫으니까 태권도 안 가고 싶다고 했고, 그 뒤로 진짜로 안 갔어요. 엄마는 어떤 것도 저희한테 강요하지 않고, 모든 기회는 다 줬어요. 공부도 마찬가지였어요. 평생 공부하라는 말 들어본 적이 없어요. 이게 엄마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네가 결정해서 하는 일이다. 다만 엄마의 역할은 네게 이걸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일이다. 누가 억압을 안 하니까 제가 거기에다 반항할 이유도 없는 거예요.

 

플로우 그러네요. 작용이 있어야 반작용도 있는 건데.

 

나미푸 맞아요. 엄마는 진짜 좋은 사람이에요. 안 좋은 감정이 쌓일 게 없었어요. 내가 잘못하면 엄마는 제 손을 내밀라고 하고는, 엄마 손으로 제 손을 때렸어요. '어쨌든 너는 아직 어린아이고, 네가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는 그건 엄마랑 같이 잘못한 거니까 같이 아파야 한다'라고 하셨어요.

 

 

공부는 그냥 잘했고, 심지어 강요도 없었다니. 어느 위인전에 나온 천재의 어린 시절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나미푸의 말을 듣고 그 재능이 차분한 총명함은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나미푸의 재능은 자존심이었고 격렬한 승부욕이기도 했다.

 

 

나미푸 다만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저는 승부욕은 강했어요. 뭘 하면 잘해야 해요. 1등 해야 해요. 형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형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제가 1학년이었어요. 형은 맨날 100점만 맞는 사람이었어요. 초등학교 들어가자마자 네가 OO(형) 동생이냐는 소리만 들리는데 어린 나이에 놀랐어요. 집에서는 제가 훨씬 예쁨받았는데, 학교에서 형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지 몰랐던 거죠. ‘내가 쟤(형)보다?’ 이런 경쟁의식이 자연스럽게 들었고,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저는 지금도 여전히 누구랑 싸워서 승패가 갈리는 상황이 되면, 절대 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되게 세요. 초등학교 때 전교 회장을 했는데, 그것도 형이 회장을 했었기 때문이었어요. 형이 준비할 땐 집에서 아빠도 막 도와주시고 했던 것 같은데, 제가 나갈 땐 하나도 도와주는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오롯이 혼자 뛰었어요. 

 

플로우 그래도 될 놈은 된다. 당선이 됐다.

 

나미푸 잘생겨서 그래요. (플로우: 아하하하) 진짜로. 여자애들이 다 찍었어요. 잘생겨서. 지금은 좀 (얼굴이) 그렇긴 한데...

 

플로우 (능청) 아 왜요. 지금도 여전히 아름다우세요. 

 

나미푸 (새침) 그럼요. 알아요. 어렸을 때 엄마가 의상실을 했거든요. 의상실이랑 집이 같이 붙어 있어서, 집에 있으면 엄마는 맨날 옷 재단하고 그랬어요. 엄마가 매일 아침에 제가 입고 갈 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렇게 세팅을 해서 줬어요. 거기서부터 태가 나죠. 얼굴도 하얗고. 그러니까 뭐랄까 되게, 특출났죠.

 

플로우 미모에 패션에, 꼭 이겨야겠다는 승부욕까지 더해져서.

 

나미푸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애들 등교할 때 교문에 매일 서 있었어요. 연두색 양복 입고. 아니 지금 생각하면 솔직히 초등학교 전교 회장 선거인데 뭘 그렇게까지 했나 싶기도 해요.

 

플로우 이런 에피소드를 들으니까 형이 왜 당당한 사람인지 그냥 바로 이해가 되네요. 

 

 

 

목사 아들 게이(2017), 나미푸 발언 중 

 

 “저는 제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요. 어렸을 때는 저를 여성이라고 정체화했어요. 왜냐면 집에서 딸처럼 키웠거든요. 제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가 딸을 임신했는데 출산 과정에서 죽은 거예요. 제 누나였죠. 그 후에 낳은 저를 머리도 땋아 주면서 키우셨어요. 그래서인지 저도 저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제가 여자라고 생각했고요.” (중략) “저한테는 오히려 저 자신을 남성으로 정체화하게 된 것이 더 큰 이슈였어요. 왜냐면 저는 이 성기가 엄청 불편했거든요. 내 몸에 불필요하게 붙어 있는 성기가 너무 이상하게 여겨지는 순간이 많았고, 털이 나고 그러는 게 이상하고 싫은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깔끔한 여자의 모습이 있었으니까요.”

 

 

 

플로우 ‘목사 아들 게이’에서 말씀하신 것 보니까, 어린 시절에 성별 정체성에 혼란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그 이야기가 좀 궁금합니다.

 

나미푸 저는 어릴 때는 제가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짓궂은 남자애들 가까이 오는 거 질색하는, 새침데기 여자애 같은 어린이였어요. 성기가 불편하다고 느낀 건 엄마랑은 관련이 없는 것 같아요. 엄마는 딸이 유산이 된 다음에도 어쨌든 아들을 낳고 싶었대요. 여자를 안 낳고 싶었대요. 엄마 삶이 너무 힘들었으니까 딸을 안 낳고 싶었는데, 유산이 되고 나니까 그게 또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처음 커밍아웃했을 때 '혹시라도 엄마가 자책하면 어떨까'하는 걱정을 좀 했죠. 어쨌든 제 정체성은 어렸을 때는 완전 트랜스젠더 여성이었던 것 같아요. 제 성기가 너무 불편했어요. 내 몸에 이게 붙어 있는 게 너무 싫은 거예요. 항상 딱 달라붙는 속옷만 입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여기저기 털이 나기 시작하는데 이것도 끔찍한 거예요. 면도기 같은 걸로 엄청 세게 밀다가 피도 많이 나고요. 

 

플로우 헉. 혹시 중요 부위도 그렇게 밀고 그러셨어요?

 

나미푸 네. 상처 많이 나고 그랬죠. 또 중학생 때는 땀냄새가 나는데, 내가 알던 내 몸의 향기로운 냄새가 아닌 거예요. 저 그때 진짜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내 몸에 그런 게 생기는 게 너무 싫었어요. 그때는 내 몸이 불편하다고만 생각했지 트랜스젠더라는 말은 몰랐어요. 그냥 게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어요. 
게이라는 말은 그 당시에 어디서 봤던 것 같고, ‘그게 나인가 보다’하는 생각은 했었죠. 고등학교를 미국으로 가게 되면서, 거기서는 내 몸이고 뭐고 상관이 없고 진짜 공부만 해야겠는 거예요. (대학이라는) 목표가 생기고, 자존심과 승부욕이 다시 발동하니까 몸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하루에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요. 자려고 눕는 게 아니라 그냥 공부하다 쓰러져서 잠들고 그랬죠. 그러다 대학 들어갈 무렵부터 생각하게 됐던 건, 어쨌든 게이인 건 확실했으니까, ‘내가 자고 싶은 사람의 모습은 여자가 아닌데, 근육 있는 남자인데, 그럼 나도 그런 모습이 돼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때부터 운동하고, 대학 들어가면서 게이로 정체화하는 과정을 거쳤어요. 

 

플로우 지금은 어떠신가요?

 

나미푸 지금은 꼭 제가 게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트랜스젠더 여성의 모습이 때때로 나올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젠더퀴어(타고난 성별과 스스로 느끼는 성별(성별 정체성)이 불일치하며, 성별 정체성이 남성도 여성도 아닌 경우-작성자 주)로 정체화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젠더 플루이드(젠더퀴어의 하위 범주. 성별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인 경우-작성자 주)라고 해서 상대에 따라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가끔 여장을 할 때가 있는데,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완전 섹시하게 해요. 지금 보면 안 어울릴 것 같잖아요?

 

플로우 (답이 정해져 있다고 느낌) 아니요.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나미푸 완전 잘 어울리거든요. 처음 할 때만 해도 엄청 말랐어서 여장하면 몸이 딱. (웃음) 

 

 

(사용)두리반 공연.jpg

 

세상에서 제일가는 girl이야

 

 

나미푸 아무튼 제 정체성은 좀 복잡한데 지금은 젠더퀴어, 그 중에서 젠더 플루이드고, 살아오면서 트랜스젠더 여성 등등 다양한 정체성을 생각하고 겪어 봤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또 젠더퀴어라고 하면 안 팔리니까, 전략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

 

플로우 시장성(?)에 맞게 정체성을 선택하시는군요.

 

나미푸 (웃음) 그렇죠. 여장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보자면, 나를 억누르고 있던 것(inhibition)에서 해방되는 느낌이에요. 내가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 평소에 지키고 있는 게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여장을 하면서 없어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가진사람들에서 크로스 드레서(CD) 모임도 했어요. 사명감 엄청 갖고, 모임 오신 분들 화장 다 해드렸어요. 그게 진짜 좋은 경험이었어요. 

 

 

(사용)가진사람들 여장 모임.jpg

 

‘가진사람들’ 여장 모임

 

 

나미푸 우리가 게이지만 남성이기 때문에 모르는 여성의 아주 작은 서사라도 깨달을 때, 그걸 계기로 자기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플로우 맞아요. 사실 게이들이 오히려 여성혐오를 하기 쉬운 환경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미푸 완전 그렇죠.

 

플로우 주변 친구들도 게이인 경우가 많고, 심지어 사랑하는 대상까지 남자니까 ‘여자가 삶에 왜 필요해’ 이렇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나미푸 네. 개인적인 관계 면에서는 그럴 수도 있고, 어쨌든 게이들도 사회적인 위치에서는 남자잖아요. 커밍아웃을 하지 않으면요. 사회적인 위치로는 여성에 비해 누리는 게 더 많은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면 그 역할 놀이를 좀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일반 남자들은 여성들에게 성적으로도 끌리고 정서적으로도 좋아하는데, 게이 남자들은 그런 것도 아니니까 더 여성 혐오가 있는 것 같아요. 게이들이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스스로 더 불행해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3. 살면서 갖게 된 소수자 3종 세트

 

 

플로우 ‘가진사람 나미푸’ 인터뷰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에 무게를 조금 더해볼까 해요. 형이 가진 이른바 ‘소수자성’에 대해 이야기할텐데요. 남들은 하나로도 힘든 소수자성을 여러 개 갖고 계셔요. 일단 성소수자(게이 또는 젠더 플루이드)고, PL이고, 또 미국에서는 아시아인이었어요. 이 세 가지가 형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가요? 

 

나미푸 일단 대부분의 소수자성은 내가 드러내지 않으면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인종은 그냥 드러나잖아요. 그런 점에서 미국 내 아시아 남성이라는 건 분명히 절박한 소수자성이었어요. 그걸 명확하게 경험하고 왔어요. 누군가가 ‘너 한국사람이라서 싫어’라고 말을 굳이 하지도 않아요. 명확하게 얘기하지 않지만 은근히 드러나는 것들이 되게 많아요. 영어로는 passive-aggressive(수동 공격적)라고 해요.

이를테면, 제가 나온 대학교 주변에 대저택들이 많았어요. 대저택들 청소 알바가 학교 알바 구인구직 사이트에 엄청 많이 떴어요. 

 

플로우 ‘우리 저택들은 청소도 명문대생이 해야 한다’, 이런 건가요?

 

나미푸 그렇죠. 저는 당시에 클럽을 하도 많이 다녀서 술값을 많이 썼거든요. 엄마한테만 손 벌리기 미안한 거예요. 한 번 청소 가면 200불씩 주니까, 꽤나 쏠쏠한 거죠. 근데 그때 알바할 때, 제가 무슨 말을 하면 잘 못 알아듣는 거예요. 괜히 나한테만 한 번 더 물어보고. 상황상 진짜 그럴 일이 아닌데도 그랬어요. 그때 진짜 많이 느꼈어요. 이게 학교 안에서만 있으면 못 느끼는 걸 밖에 나오면 느끼게 되는구나, 싶었죠. 

 

플로우 미묘한 차별이네요. 나머지 두 개(성소수자와 PL)는 어떠세요? 

 

나미푸 그 두 개는 드러나지 않는 소수자성인데, 저는 일부러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HIV 감염됐을 때도 주변 형들한테 바로 얘기했거든요. 어떤 소수자성이든 드러낸다는 것이 제 명확한 원칙이에요. 

그런데 드러냈기 때문에 힘든 게 너무 많아요. 드러냈기 때문에...... 단적인 예로, 저는 연애 안 한 지 8년 됐거든요.

 

플로우 PL 되신 이후에 연애를 안 하신 건가요? 

 

나미푸 네. PL 된 이후에는 안 했어요. 그게 어쨌든 드러냈기 때문이기도 해요. 제가 가진 PL에 대한 혐오 때문일 수도 있어요. 연애하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왜 쉽지 않냐면, 앞에서 말한 승부욕과 연결되는데, 전 지고 들어가는 게 너무 싫어요. 누구랑 대화할 때, 연애할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PL인 게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플로우 그렇죠.

 

나미푸 근데 연애를 하려면 내가 이걸 (무조건) 얘기해야 되는 상황 있죠. 저는 그게 너무 싫어요. 

사실 연애는 좋아하는 감정, 매력과 섹시함에 끌리는 감정으로만 시작하는 게 맞는데, 전 HIV가 그 중간에 끼어 있는 느낌이에요. 연애를 시작할 때 이게(감염 사실이)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요. 그렇지만 사회적인 감각으로는 맞지 않는 얘기잖아요. 당연히 말을 해야 할 것 같고, 그러다 보면 신경쓰이고, 전 또 지고 들어가고 아쉬운 소리 하는 게 싫으니까, 아예 연애 자체를 좀 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플로우 성소수자 정체성보다는 PL이라는 정체성이 지금 일상생활에 더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네요. 

 

나미푸 맞아요. PL을 드러낸 게 저한텐 여러 면에서 제일 큰 의미인 건 분명하고, 그것 때문에 개인적인 제한을 두는 게 많아지긴 했죠. 연애를 포함해서요. 

 

(사용)플래그 잡지 인터뷰(PL 커밍 아웃).jpg

‘플래그’ 잡지 인터뷰 사진(PL 커밍아웃 후)

 

 

 

 

그의 개인적인 소수자 3종 세트 이야기는 곧 사회적인 이야기로 옮아갔다.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보았던 뮤지컬 영화 ‘틱틱붐’이 생각났다. 뮤지컬 ‘렌트’의 작곡가 조나단 라슨(Jonathan Larson)의 자전적 이야기다. 렌트는 1990년대 초반 뉴욕을 배경으로 HIV/AIDS, 성소수자, 약물, 젠트리피케이션 등 온갖 사회문제를 다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틱틱붐’에도 이를 엿볼 수 있는 서사가 등장한다.

 

 

 

플로우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틱틱붐’이라는 뮤지컬 영화를 봤어요. 주인공 친구인 회계사가 ‘나 HIV 양성이야’라고 주인공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있어요. 극중에서 큰 전환을 일으키는 사건이죠. 그게 당시에는 시한부 선언이었던 것이고, 엄청난 비극으로 묘사가 됩니다. ‘지금은 저 정도까지는 아닐텐데’ 하면서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어요. 
소수자 3종 세트를 갖고 사신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상황에서, 사회적인 분위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다고 느끼시는지가 궁금합니다. 또 미국과 한국의 분위기 차이도 궁금하고요.

 

나미푸 미국에 살았던 건 예전이지만, 최근까지도 출장으로 계속 왔다갔다 해서 전반적인 흐름은 알고 있어요. 우선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면서 성소수자 이슈는 많은 게 ‘정상화’됐어요. 결혼이라는 제도는 이성애자 중심 사회에서 정상성으로 인정받고 있잖아요. 동성애자들이 이 정상 범주 안으로 편입되니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범주 안으로 들어오게 됐어요. 그러면서 오히려 약물이나 HIV 같은 이슈들은 주변으로 밀려난 것 같아요. 예전에는 게이 커뮤니티 전체가 고민하던 문제였는데, 오히려 드러나지 않게 된 거죠. 백인 주류 게이들의 일은 더 이상 아닌 거예요. 

 

플로우 문제가 표백이 된 셈이네요. 

 

나미푸 그렇죠. 그런데 분명히 문제가 존재하긴 해요. 최근에는 HIV 감염이 흑인 커뮤니티에서 폭증하고 있어요. 약물 사용도 마찬가지고요. 게이들 사이에서는 (약물 투여를 위해) 주사기 사용하는 사람들은 점점 배제하고, 그런 게 문화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동성결혼 합법화 이후 동성애자 커뮤니티가 단단해지긴 했으나, 그 주변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이게 제 느낌이에요.

 

플로우 한국은 어떤 것 같으세요? 

 

나미푸 한국은, 아직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함께 트라우마적인 경험을 한 게 없어요. 미국은 HIV가 나왔을 때, 내 주변이 전부 죽거나 병에 걸렸어요. 그럼 얼마나 이게 나에게 트라우마겠어요. 내가 이 커뮤니티에 속해 있다는 감각이 굉장히 선명해지고요. 한국은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커뮤니티성이라는 게 크게 존재하지 않는 것 같고, 깊은 의미를 갖는 공동체가 형성되지는 않은 거죠.

 

플로우 역사적으로 보면 집단적인 트라우마가 공동체성을 강화하는 건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강력한 커뮤니티를 위해서 그런 트라우마가 꼭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아니면 굳이 강력한 커뮤니티 없어도 좋으니까 그런 트라우마를 안 겪는 게 낫다고 보시나요? 

 

나미푸 어렵네요. 사실 지금 삶이 편한 사람들은 커뮤니티가 얼마나 절실한지 모르겠어요. 커뮤니티가 필요한 건 지금 당장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에요. HIV 때문에, 약물 문제 때문에, 자기혐오가 심해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건 개인이 절대 완전히 해결할 수 없어요. 커뮤니티가 개입해야 하고, 그러려면 강력한 공동체성이 필요하죠. 
그렇다고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일부러 만들 수는 없겠죠. 저는 이런 트라우마를 제외하고 커뮤니티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싶어요. 정리하면, 트라우마가 필요한 건 아닌데 강력한 커뮤니티는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플로우 최근에 성소수자 커뮤니티, 특히 게이 커뮤니티가 코로나19 때 이태원 클럽발 감염 사태를 겪으면서 사회적 혐오에 부딪혔잖아요. 그런 일이 커뮤니티를 강하게 했다고 느끼시지는 않나요? 

 

나미푸 그것도 결과적으로 굉장히 기여했다고 생각해요. 특히 사람들에게 질병에 대한 감각을 깨워준 건 큰 의미죠. 이 질병이 나에게 어떤 낙인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를 일깨워줬잖아요. 그때 우리는 우리대로, 인권단체들이 함께 모여서 상황에 잘 대처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또 금방 잊어버리고 지나가게 된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좀 아쉽습니다.

 

 

(사용) 3년 전 퀴퍼.jpg

 

2019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4. 미국 유학 시절의 배움

 

 

플로우 앞에서도 미국 생활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미국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되셨나요?

 

나미푸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맨날 엄마 아빠한테 미국 가서 살 거라고 얘기했대요. 저는 지방 소도시에서 자랐는데, 그 좁은 동네가 싫었어요. 내가 있을 데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어렸을 땐 제가 좀 더 오만했는데 또 정체성이 불안했던 아이여서, 모든 것이 저랑 불일치한다고 생각했어요. 내 성 정체성도 그렇고, 남자 중학교도 안 맞고, 내가 사는 도시도 나랑 안 맞는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무작정 떠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플로우 그렇죠. 난 여잔데 내가 왜 남학교에 와 있냐고!

 

나미푸 그런 것들이 다 안 맞으니까 여기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때 제 눈에 들어온 먼 나라가 미국이었던 거죠. 당시에 ‘600만 불의 사나이’라는 영화 보고 멋있는 미국 배우들한테 반하기도 했고. 문제는 그때가 IMF 때였어요. 97년, 98년 때였는데. 환율이 1불당 거의 2천 원 했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조건을 내걸었어요. 네가 외고에 합격하면, 거기서 잘하면 미국을 보내주겠다고 했어요. 

 

플로우 외고에서 잘하면 대학을 미국으로 보내준다고 하신 건가요? 

 

나미푸 아니요. 일단 외고 합격을 하면 고등학교부터 바로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한 거죠. 또 열심히 해서 합격을 했어요. 가보니까 진짜 너무 좋았어요. 저는 외국어 배우는 것도 좋고, 진짜 똑똑한 애들만 있고, 다 착하고. 거기서 잘 지내다가 약속대로 유학을 가게 됐어요. 제가 유학 간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네가 말하면 애들이랑 충격받으니까 떠나기 직전까지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 학교 떠나기 전날 얘기했어요. 반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애들이 다 울었어요. 그날 애들이 밤을 새워서 저한테 보내는 음성메시지를 3시간짜리를 녹음해서, 그 테이프를 선물로 줬어요. 점심시간 방송 때는 제가 좋아하던 이소라 노래도 틀어주고. 

 

플로우 환송을 제대로 받으셨네요. 미국 유학은 어디로 처음 가시게 됐나요? 

 

나미푸 처음엔 뉴욕으로 갔어요. 부모님도 미국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어요. 아는 분 중에 아들을 이미 미국에 보내놓은 분이 있었는데 거기가 뉴욕이었죠. 한인 목사님 집에 머물게 됐고, 부모님이 선교비 명목으로 제 (홈스테이) 비용을 내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그 목사님이 어느 날 저한테, ‘너네 아빠가 전라도 사람이라서’ 뭐 이런 얘기를 한 거예요. 전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저는 쭉 전라도에서만 살았으니까, 그런 (지역감정에 기반한 차별) 개념을 몰랐어요.

 

플로우 아니, 맥락 없이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고요? 

 

나미푸 네, 뭔가 맥락이 있었을 것 같긴 한데 그건 다 잊어버렸고, 그 말에 충격받았던 기억만 있어요. 또 뉴욕은 생활비나 학비도 너무 비싸고, 그 목사님도 점점 나를 자기 교회에 이용하려고만 하는 것 같다고 느껴졌어요. 새벽에도 매일 교회에 나갔거든요. 
그래서 ‘여길 뛰쳐나가야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혼자서 명문 고등학교들 다 알아보고 지원했어요. 영어를 못하니까 죄다 떨어졌죠. 그런 상황에서 그때 다니던 학교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L시(펜실베니아 주 소도시) 학교가 좋더라’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걔한테 그 학교가 어디냐고 물어봐서 바로 연락해서 지원하고 합격했어요. 부랴부랴 그 목사님 집에서 뛰쳐나오면서 짐가방 3개를 혼자 들고, 기차 타고 그렇게 학교를 찾아간 거예요.

그 동네(L시)는 완전 오래된 학교여서, 친구들이 다 초등학교 때부터 다 같은 학교를 나왔어요. 완전 백인 중심이고, 저는 이방인인 거죠.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러 카페테리아에 갔는데, 동그란 테이블에 열 몇 명이 다 앉아 있길래 아무 생각 없이 거기 가서 딱 앉았거든요. 제가 앉자마자 걔네 열몇 명이 바로 일어나서 다른 테이블로 간 거예요. 또 큰 충격을 받고. 울면서 막 밥 먹었어요. 그날 이후로는 점심을 맨날 혼자 먹었어요.

 

플로우 아, 어린 나이부터 정말... 

 

나미푸 그날 일어난 애들 제가 얼굴 다 기억했어요. 학교에서 잘나가는 애들, 한 가닥 하는 애들이었어요. 나중에 졸업할 땐 제가 다 이겨먹었어요. 학생회장 선거에서도 제가 이겼어요. 처음엔 걔들 무리에서 2명이 출마했는데, 도저히 저한테 안 되니까 2명이 합작으로 나왔어요.

 

플로우 아, 유력 후보들이 단일화를 했는데도요. 그때는 선거 승리 비결이 뭐였나요? 

 

나미푸 회장은 사실 2학년 때 부회장을 이미 했었기 때문에 그땐 인지도가 있었어요. 부회장 선거 전에는 저를 아무도 올랐죠. 

일단 저랑 같은 수업을 듣는 애들은 제가 뭐든 열심히 하는 애라고 생각해서 저를 좋아했어요. 거기에 제가 피아노 치고 노래를 좀 하다 보니 여자 합창단 반주를 했어요. 그리고 기독교 학교여서 아침마다 채플(교내 예배)이 있는데, 거기서도 노래를 몇 번 했고요. 점점 절 알게 되는 친구들이 늘어나면서 부회장 출마를 한 거죠. 다른 건 모르겠고 연설로 애들을 죽여놔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홍정욱이 썼던 7막 7장 이런 책을 읽었는데.

 

플로우 당시 유학 꿈나무들의 필독서 아니었나요. 7막 7장.

 

나미푸 (그 책에서) 홍정욱은 케네디 대통령 연설을 외웠다고 했는데, 저는 마틴 루터 킹의 ‘I have a dream’을 외웠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우고, 거기에 우리 학교 커뮤니티 내용을 좀 합쳐서 다시 달달 외우고. 실전에서 쫙 연설하니까 애들 다 감동 받고, 그렇게 해서 (당선)됐죠.

다음 해 회장 선거 때는 이 (기득권) 애들이 갑자기 선거운동 규칙을 바꾸자는 거예요. 연설은 없애고 토론으로 승부 보자고.

 

플로우 아니 무슨 정치 드라마 같네요.

 

나미푸 제가 영어가 완벽하지 않으니까 토론에선 밀리는 거죠. 어쨌든 룰 변경을 받아들이고, 대신 질문을 미리 달라고 하고, 마지막 발언 때 스피치를 간단히 할 수 있는 시간을 꼭 달라고 했죠. 토론 전날 또 밤새워서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다 외웠어요.

마지막 자유 발언은 한국스러운 걸 좀 차용했는데, 제 운동화가 구멍도 나고 좀 낡았었어요. 그걸 보여주면서 ‘나 부회장 하면서 이만큼 뛰었다. 나 회장 되면 더 열심히 뛰겠다’라고 해서 뒤집어 놨죠. 그래서 또 당선됐어요. 회장 되고 나서는 뮤지컬 주인공도 하게 되고.......

 

플로우 (슬슬 짜증) 안 하신 게 뭐예요. 대체? 

 

나미푸 아하하하. 근데 그때는 그게 아니면 대학을 못 갈 것 같았어요. 좋은 대학을 가려면 그런 모든 것들이 다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내가 가고 싶은데 못 갈 거라고 생각했죠.

 

(사용)고딩 뮤지컬.jpg

 

고등학교 뮤지컬 무대(위쪽 흰 옷)

 

 

플로우 그래서 원하던 대학을 가셨나요?

 

나미푸 이 얘기도 좀 길어요.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그 분야에서 좋은 A 대학이나 B 대학을 원래는 가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때 좋다는 학교들은 다 썼어요. A 대학, B 대학 다 포함해서 10곳에 지원을 했어요. 카운슬러(counselor, 대입 진로상담사) 선생님은 여러 개 될 거니까 골라 갈 수 있다고까지 말했는데, 아홉 군데에서 불합격 통보(rejection letter)가 오는 거예요. 저도 뭔가 이상했다고 생각했고, 카운슬러 선생님이 이건 말도 안 된다고 하면서 대학들에 직접 연락을 했어요. 대학교 답변이, 제 파일 자체를 열어보지도 않았다는 거예요. 지원자 파일이 (제출 필수 서류가) 다 차야 열어보는데, 어떤 서류가 누락되면 열어보지도 않는 거예요. 안 열어본 파일은 기한이 지나면 전부 불합격 처리가 되고요.

제 경우는 토플 점수가 안 왔다는 거예요. (지원한) 10개 모든 학교에서 토플 점수가 안 왔다고 했고, 이건 시험 기관 실수가 명백했어요. 그때 난리가 나서 엄마 아빠도 미국 날아오시고, 어떻게든 일을 해결하려고 토플 시험 기관에도 몇 번씩 전화하고 난리를 쳤죠. 그 기관에서는 시스템상 문제였다고만 하고요.
어쨌든 카운슬러 선생님이 다시 대학에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제 파일을 다 열어서 검토해달라고 했어요. 열어서 심사는 했는데, 대학 입장에서는 이미 선발이 끝난 상황이니까 합격을 시켜줄 수는 없었어요. 대기자 명단에 올려주는 게 최선이었죠. 몇 개는 대기자 명단에 올라갔고, 몇 개는 아예 떨어졌어요. 그런데 딱 한 군데, C대학이 최종 합격을 시켜줬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이 C대학을 갔어요. (원래 가고 싶었던) B 대학은 2년 뒤에 편입해서 가게 됐고요.

 

플로우 저는 B 대학으로 바로 가신 줄 알았는데, 대입 과정도 엄청나게 우여곡절을 겪으셨네요. 

 

나미푸 그 당시에는, 열심히 살았던 모든 생활이 허탈해지면서 존재가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어린 나이여서인지 죽고 싶다는 생각까진 안 했는데, 열심히 산 결과가 이거였나, 싶은 생각이 컸어요. 사실 C 대학은 그렇게 이름 있는 학교까진 아니어서 자존심도 상했고요. 
근데 막상 가보니까 C 대학이 정말 좋은 거예요. C 대학은 미국에서도 굉장히 자유로운 편이에요. 게이들이 1학년 때부터 커밍아웃하고 다니고 난리도 아니에요. (원래 지망했던) B 대학은 사실 좀 보수적이거든요. 처음부터 B 대학에 다녔으면 (지금의 저와) 또 달랐을 거예요. C 대학 다니면서 뮤지컬을 했는데, 그거 하면서 커밍아웃도 하고 지냈거든요. 

 

플로우 뮤지컬은 어떤 거 하셨어요?

 

나미푸 키스 미 케이트(Kiss me Kate) 했었고, 또 에덴의 아이들(Children of Eden) 이란 작품의 주인공도 했었어요. 작가가 유대인이었는데, 유대인 관점에서 본 구약(성경)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까진 주인공도 하고 그랬는데, 대학에서는 전공하는 애들도 있고 하니까 그렇게까지는 못했고 앙상블 일원으로 무대에 섰죠. 합창단 활동도 계속 하고, 진짜 좋은 성악 선생님 만나서 노래도 배웠어요. C 대학에 가서 그렇게 자유롭게 (저 자신을) 풀어놓고 살 수 있었고, 그래서 전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무 의미 없이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B 대학에 편입하고 나서는 다시 진짜 열심히 공부했고요.

 

플로우 네. 제가 진학하신 B 대학에 대한 정보를 좀 찾아봤는데, 어쨌든 여기는 공공 영역(public sector)으로 사람들을 많이 보내는 학교인 것 같더라고요. 미국 공무원들과 외교관들을 주로 양성하는 곳 같았는데, 한국인으로서 미국 공무원이 될 수는 없었는데도 특별히 이 학교를 지망하셨던 이유가 있나요?

 

나미푸 일단 워낙 유명한 학교라 이름값에 끌렸던 거죠. 그 당시에 저는 정치를 할 거라고 생각하고 미국을 간 거였고, 대학원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학부만 나올 거면 정치 쪽에서 명성이 있는 학교여야 했어요. B 대학은 워낙 그쪽으로 유명한 학교였으니까요. 편입 경험도 지금 돌이켜보면 굉장히 의미가 있었던 게, 대학 입시는 내 모든 걸 무너뜨린 일이었단 말이죠. 내가 열심히 (지식과 경험을) 쌓아서 날 무너뜨린 도전 과제를 다시 이루어내는 경험은 제 인생에 엄청난 도움이 돼요. 

 

플로우 형이 대학에서 공부하신 게 ‘문화와 정치(culture and politics)’라는 전공이고, 잘은 모르지만 일반적인 정치학과는 달리 권력이라는 개념에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느낌이었어요. 과거 글에서 ‘Time Square Red, Time Square Blue’라는 책을 언급하면서 바람직한 사회란 이런 것(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받는 사회)이라는 관점도 밝히신 바가 있고요. 어린 시절의 경험이 당당한 성격을 만들었다면, 지금의 세계관을 만든 건 대학 시절의 공부를 통해서가 아니었나 싶은데요. 어떤 공부를 통해서 만들어졌는지 자세한 내용이 궁금합니다. 

 

나미푸 예전에 제가 쓴 것 진짜 많이 찾아보셨네요. 너무 감동이다. 지금 세계관은 정확히 대학 시절에 만들어진 게 맞아요. 일단 그때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바뀌었어요. 고등학교 때까진 완전 목표만 바라보고 눈이 시뻘게져서 공부만 하고 살았는데, 한 번 실패했잖아요. 더 이상 그렇게 못하겠는거예요. 저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보냈어요. 일단 나는 게이로서 살아가고 있는데, 아시아인이라서 인기도 없고 그런 거죠. 고등학교 때는 공부하느라 일부러 남자 안 만난다고 생각했고, 대학만 가면 미친 듯이 남자 만나고 다닐 거라고, 사람들이 저를 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플로우 내가 게이든 뭐든 대학만 가면 연애하겠다는 게 굉장히 한국적인 생각이긴 하네요. 

 

나미푸 그렇죠. 대학 다니면서 남자 만나려고 해도 대부분 ‘난 아시아인 안 좋아해(I’m not into Asians)’이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굉장히 소수자더라고요. 나의 위치가 보이니까 이걸 설명해야겠는 거예요. 저는 뭘 모르겠으면 무조건 설명이 돼야 해요. 마침 C 대학에서 기본적인 교양 교육을 마치고 제가 관심 있는 과목을 집중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나'라는 사람의 위치를 공부할 수 있는 모든 수업을 다 들었어요. 페미니즘 문학 수업 듣고, 문화인류학 수업도 들었어요. 
문화인류학 수업 중에 현장 연구(field research)를 한 학기 동안 하고, 학기말에 문화기술지(ethnography)를 써서 제출해야 하는 어려운 수업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왜 나를 안 좋아하는지 알아야겠으니까(웃음), 주제를 ‘Racial preference in Washington D.C.(워싱턴DC에서의 인종 선호)’로 잡았어요. 연구하느라 한 학기 동안 온갖 데를 다 다녔어요. 백인들만 가는 고급진(upscale) 바도 가고, 제가 이미 속해 있던 아시아인 모임에서 인터뷰 따고, 또 흑인들만 가는 바도 있었거든요. 심지어 SM 플레이하는 바 같은 것도 있었는데, 그런 데는 또 흑인들이 많이 가는 거예요. 그런 데서 흑인들 인터뷰도 다 했어요. 내가 속한 커뮤니티 안에서의 다이나믹을 공부할 수 있는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플로우 B 대학에서 전공 공부를 하시기 전부터 이미 그런 탐구를 하셨던 거네요.

 

나미푸 그렇죠. B 대학에서 문화와 정치라는 전공을 공부하면서는 이 세계가 어떤 질서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좀 더 알게 됐어요. 그때 파고든 건 오리엔탈리즘과 해체주의였어요. 해체주의가 저의 세계관을 형성한 거라고 볼 수 있죠. 내가 아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고, 내가 겪는 일도 내 잘못이 아닌 게 많다는 생각도 하게 된 거죠.
그때부터 권력욕이 없어졌어요. 아까 말씀드렸듯 저는 원래 정치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무조건 1등 해야 하고, 무조건 좋은 학교에 가야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때부터 이런 게 없어졌어요. 우선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위치를 파악하고, 이 세계가 어떤 질서로 이루어졌는지를 보기 시작했던 거죠.
그때 제가 썼던 글 중에 선생님이 제일 좋아했던 글이 있어요. 좋은 사립 대학교에 온 애들을 부르는 ‘프레피(preppy)’라는 말이 있는데, ‘프렙 스쿨(Prep School
(주로 영미권에 위치한 명문 사립학교-작성자 주)’ 학생 같다는 뜻이에요.

 

플로우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이라고 이해하면 되나요? 세련되고 각 잡힌 느낌. 

 

나미푸 그렇죠. 제가 대학 갈 때 엄마가 그런 프레피한 느낌을 원했는지, 라코스테 칼라 셔츠를 색깔별로 보내온 거예요. 이런 거 입어야 된다고. 그런데 저는 내가 이 옷을 입는다고 해서 난 절대로 프렙 출신이 될 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자각했어요. 그걸 주제로 글을 썼더니 선생님이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플로우 와인에 대해서 아무리 많이 알아도 상류층 클럽에 껴주지 않는 거랑 비슷하네요. 

 

나미푸 그렇죠. 결국 ‘나’라는 사람이 위치할 수 있는 공간은 이미 짜여 있는 질서 안에만 존재하는 거죠. 그걸 깨는 일은 이런 사회운동밖에 없는 거예요. 그때는 사회운동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제가 가진 세계관은 그렇게 형성이 됐어요. 

 

 

 

이러한 세계관으로 오늘날 한국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한국사회는 부의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고 사회적인 분화도 점점 뚜렷하게 일어나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소비할 수 있는 미디어가 다양해지면서 나와 다른 견해를 섞어 듣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는 그의 이상과 멀어지고 있는 것일까?

 

 

 

플로우 최근의 한국 사회가 나미푸님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사회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보시나요?

 

나미푸 우선 그 세계관은 미국 사회를 바라보며 형성된 것이고, 미국이랑 한국을 단순히 비교하는 건 좀 어려워요. 미국은 근대화가 오랫동안 진행됐고, 일단 인종이 다양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층위가 분명히 있는 사회에요. 미국 사회의 유토피아적인 모습을 상상할 때는 다양한 인종과 계층이 만나야 할 장소가 절대적이에요. 그들이 만나는 모습이 어떠하리라는 상상도 가능하고요.
한국은 일단 대도시가 서울 하나밖에 없고, 누군가 아무리 부자여도 그 동네를 한 시간이면 가볼 수 있잖아요. 반대로 아무리 시골 마을이어도 네다섯 시간이면 차로 가볼 수 있고요. 아무리 떨어지려고 해도 한국은 일단 공간적으로 너무 좁아요. ‘섞여 사는 사회’를 유토피아로 상상하기에는 한국은 이미 너무 단일해요. 섞일 수 있는 (이질적인) 뭔가가 계속해서 들어오는 게 필요해요. 더 분열되어야 하고, 더 고유한 성향을 가진 개인과 집단이 많아져야 해요. 

 

철도 민영화 반대 시위.jpg

 

다양함이 공존하는 사회를 위해

 

나미푸 요즘은 무엇이든 변화를 위해서 좀 길게 봐야 한다는 마음이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문구가 ‘역사의 활은 정의를 향해 굽어 있다(The arc of history bends toward justice-마틴 루터 킹 목사 연설에서 발췌, 작성자 주)’는 말이에요. 활이 아주 조금 휘어 있고, 거의 직선처럼 느껴지지만 어쨌든 가리키는 방향은 정의라는 거죠. 한국사회도 아주 조금씩 정의를 향해서 나아갈 거라고 생각해요.

 

플로우 당대에는 그게 잘 감지가 안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나미푸 그럴 수 있죠. 그래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계속 변화를 위해 열심히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일이 잘 안 돼도 크게 의미 두지 않으려고 하고요.

 

플로우 근데 또 어떻게 보면, 일희일비하지 않을 만큼 여유가 있으셔서 가능한 생각이 아닐까요? 누군가에게는 이번 판이 전부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나미푸 그런 얘기도 진짜 많이 들었어요. 전 여유가 있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예전에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찔렸는데, 그래도 이게 맞는 거 같아요. 모든 사람에게 그런 여유가 생기도록 만들어가야 하지, 내가 모든 일에 사활이 걸린 듯이 뛸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애초에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목사 아들 게이(2017), 나미푸 발언 중 

 

교회가 나를 분리했음에도 저는 저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를테면 미국에서 유대인들이 교회를 나가거나 신앙이 없어도 실질적으로 자신들을 유대인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문화적으로 유대인이기 때문이죠. 나도 너무나 어렸을 때부터 개신교 신앙 안에서 길러진 사람이라서 문화적으로는 개신교인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가지고 있는 개신교적인 가치관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신앙적인 가치관들은 모르겠는데, 개신교적 가치관들 있잖아요. 나의 특정 수입은 기부하는 데 쓰고, 상대방에게는 이런 태도로 대해야 하고, 주위를 어떻게 돌아봐야 하고. 이렇게 이미 잡혀 있는 사고방식 같은 게 있어요.
 

 

 

플로우 저는 또 하나 질문하고 싶었던 게 나미푸님의 종교관이에요. ‘목사 아들 게이’에 나온 대담에서 ‘나는 문화적 개신교인이다’라고 하셨어요. 이런 종교관도 대학 시절 공부를 통해 확립하신 건가요? 

 

나미푸 기독교에 대한 관점은 좀 달라요. 대학에서 공부한 것과는 무관하게 예전부터 저는 유신론자였어요. 저는 인간이 미약하고 불완전하다고 생각해요.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을 신적인 영역 없이 설명하는 건 좀 교만하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어떻게 모든 질서를 다 이루면서 살겠어요. 신은 존재한다고 믿고 있고,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거죠.그런데 기독교 신으로만 이런 신적인 존재를 설명하고 싶지는 않아요. 따라서 나의 기독교를 설명하려면 신으로 설명할 수가 없고, 그냥 내가 자라온 문화로서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학문적인 베이스가 있는 관점이라기보단 그냥 제가 혼자 생각한 거예요. 내가 자란 기독교의 베이스를 신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문화로서 설명해야겠다라고 결정을 한 거 같아요. 

 

플로우 그러네요. 사실 종교와 신앙은 믿음의 영역이다 보니 논리적인 설명을 위한 지식의 양보다는 직관이나 삶의 태도와 더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문화적 개신교인의 모습은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나요?

 

나미푸 평소에 저를 위해서는 기도를 잘 안 하는데, 남을 위해서 기도할 때가 있어요. 중보기도라고 하죠. 예전에 친한 형이 심하게 다쳐서 큰 수술을 해야 했던 적이 있어요. 원래 사이는 별로 안 좋던 사람이었는데, 아침마다 일어나서 기도했어요. 이 사람이 좋고 싫고를 떠나서 이 사람이 잘못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 게 신의 영역이라고 보는 거죠. 

그런 기도 말고는, 기본적으로 저는 찬송 좋아하고 예배도 좋아해요. 동성애 혐오 설교 하는데는 안 가면 되니까요.

 

 

5. 누가 뭐래도 친구사이

 

 

플로우 대학을 졸업하고 2006년 9월에 처음으로 지보이스를 찾아가셨는데요. 어떻게 알고 가셨나요?

 

나미푸 제가 2006년에 졸업하고, 원래는 그때 (미국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영주권을 받을까 말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군대를 아직 안 간 거죠. 당시에는 군대를 안 갔다 오면 여권 연장이 안 됐어요. 여권 기간을 1년씩인가 주고 매년 들어가서 갱신해야 하는 거죠. 연장하려면 편법으로 어디 학교에 등록이라도 해야 하고요. 그게 저는 너무너무 싫은 거예요. 그냥 군대를 가겠다고 생각하고 한국에 나왔어요. 통역 장교 시험을 보려고 했는데 어차피 기간도 좀 남고, 그래서 서울에 와 있었어요. 그 기간에, 혹시 오렌지동(2001년 개설된 다음 카페. 2000년대 초중반에 활성화된 게이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작성자 주)이라고 아세요?

 

플로우 아, 네. 들어본 것 같아요.

 

나미푸 오렌지동에 저희 고향 지역 모임이 있었어요. 거기서 예전에 어떤 애를 만났는데, 마침 그 친구도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걔가 친구사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친구사이 MT를 간다는 거예요. 처음 친구사이라는 단체를 알게 된 거죠. 걔가 또 여기 합창단도 있다고 하는 거예요. ‘아, 여기다. 나 노래 잘하니까 가서 잘난 척 좀 해야겠다.’ 싶었어요.

 

플로우 내가 한 수 가르쳐 줘야겠다. 

 

나미푸 그렇죠. 근데 또 여기는 완전 (성악 같은) 그런 노래 많이 안 부르고, 가요 편곡한 거 부르니까 그것도 어렵긴 하더라고요. 어려운 게 어색하기도 하고, 그래서 연습할 때 자꾸 피식피식 웃었어요. 그때 당시에 지휘했던 △△형(활동명 코러스보이)이 제가 자기를 무시하는 줄 알았대요. 

 

플로우 안 그래도 예전 소식지에 실린 글을 뒤져보니까, 지보이스 공연 스탭을 하셨던 분이 당시에 신경이 너무 곤두서 있었던 나머지 나미푸가 잘난 척하는 게 그렇게 짜증이 났다고 하셨더라고요. 공연 전전날 바이올린 잃어버려서 새 바이올린을 가져왔는데 소리도 안 맞았다고.

 

나미푸 (웃음) 맞아요. 그때 원래 제가 갖고 있던 바이올린이 400만원 짜리인가 그랬어요. 술 먹고 택시에 두고 내렸어요.

 

플로우 (입틀막)

 

나미푸 그날도 막걸리를 어마어마하게 마시고 헤롱거리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공연 당일에는 10만 원 정도 주고 바이올린을 빌렸어요. 그런데 이게 소리가 안 좋아서... 지금 생각하면 다 추억이죠. (웃음)

 

플로우 그렇게 우당탕탕 첫 공연을 하시고, 2011년부터는 지보이스 단장까지 하셨어요. 그때 정기공연 직전에 쓰신 글을 보면 처음에 들어올 땐 ‘님도 보고 뽕도 딴다고, 남자도 만나고 싶은 마음에 들어오셨는데 남자를 만난 적은 없고 단장까지 하면서 스트레스 받아 가며 공연만 준비하고 있다’라고 하셨어요. 여기서 연애를 아예 하신 적이 없으신 건가요?

 

나미푸 처음엔 연애 생각도 하고 왔는데, 와보니까 여기는 그런 데가 아니구나 싶더라고요(웃음). 친구사이에서 한 번도 연애한 적이 없어요. 제 룰이에요. 역할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더 그렇게 하는 것 같아요. 지보이스 단장도 했고 친구사이 대표도 했는데, 저는 리더가 해야 하는 역할을 FM대로 해야 하는 사람이거든요. 연애는 그런 역할에 없던 거고요. 뭔가 사리사욕 채우는 것 같고. 늘 밖에서 연애를 했고, 항상 그 친구들을 친구사이로 데려왔어요. 

 

플로우 말씀하신대로 친구사이에서 계속 리더 역할을 해오셨어요. 지보이스 단장과 친구사이 대표, 그리고 지금은 가진사람들 활동도 주도적으로 하고 계신데요. 

 

나미푸 맞아요. 2011-12년도에 지보이스 단장을 했고, 2014-15년도에 대표를 했어요. 둘 다 2년씩 했네요.

 

플로우 저는 형이 감투 욕심이 있다는 걸 친구사이 활동 이력을 보고 알았어요.

 

나미푸 말씀드렸듯이 어렸을 땐 감투 욕심이 더 심했고,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가치관이 확립되면서 그런 욕심은 없어졌어요. 근데 친구사이에서는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건 하나도 없고, 해야 하니까 했고, 기왕 맡으니까 잘해야 했어요.

 

(사용) 신촌 퀴퍼 트럭 발언.jpg


2014년 서울퀴어문화축제, 트럭에서 발언 중(당시 친구사이 대표)

 

 

나미푸 처음엔 여기서 뭘 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으니까, 형들이 엄청 서운해하는 거예요. ‘너는 왜 할 수 있는 애가 안 하려고 하냐. 왜 한 발만 담그냐.’는 얘기를 진짜 많이 했어요. 바깥에 있는 친구랑 더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까 ‘왜 너는 우리한테 너를 다 안 열어?’ 이런 비난도 많이 받았고요. 

 

플로우 듣다 보니, 형 주변에는 서로 잘 섞이지 않는 여러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게이 커뮤니티만 해도 친구사이에만 있지는 않으시고요. 그렇다면 어디에도 딱히 소속감이 없으신 건지, 아니면 모든 곳에 소속감이 다 있으신 건지 궁금해요. 각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서운함을 어떻게 대면하고 계신지도 궁금하고요.

 

나미푸 좋은 질문이네요. 큰 틀에서는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건 맞아요. 그래서 느끼는 외로운 면이 있구요. 무엇보다, 제가 얘기하는 주제들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한다는 감각이 굉장히 강해요. 친구사이가 인권단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고, 그런 편견이나 낙인들에 저항해 나간다는 느낌이 저를 외롭게 만드는 것 같아요. 옛날에는 그런 저항에 부딪힐 때면 상처도 많이 받았어요. 물론, 지금도 실망할 때가 많긴 하지만, 이건 제가 감수해야 하는 것 같아요. 친구사이에 그런 기대까지는 안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가장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집단은 친구사이가 맞아요. 확실히 애정이 있어요. 2006년도에 들어온 이후로 진짜 많은 일을 겪었어요. 여러 형들의 죽음도 다 같이 겪었죠. 재회의 밤 행사
(매년 추석 전날, 친구사이 구성원이었던 고인들을 추모하는 행사-작성자 주) 때 봤던 분들이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에요. 또, 저도 군대 있을 때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어요. 다리가 다 부서져서 뼈를 이식할 정도로 큰 수술이었고, 목발을 1년 반 짚었어요. 그때 친구사이 형들이 돌아가면서 병문안을 와 줬어요. 친구사이 대표를 할 때는 이것저것 사업 해보려고 반대하는 형들이랑 싸우기도 하고요. 싸운 일, 좋았던 일, 즐거웠던 일이 쌓여 있으니까, 갑자기 거리를 둘 수가 없어요. 친구사이 사람들은 이미 너무 깊이 들어왔어요. 형들뿐만 아니라 동생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게이 판에서 누가 친구사이를 안 좋게 얘기하면 좀 싫어요.

 

플로우 제가 친구사이 나온 지 얼마 안 된 입장에서 늘 궁금했던 건데요. 예전에 비해 친구사이가 많이 바뀌었나요? 바뀌었다면 어떻게 바뀐 것 같은지, 그리고 그 변화가 좋다고 느끼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나미푸 많이 바뀌었죠. 옛날에는 친구사이 사람들 외에는 인간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친구도, 애인도, 심지어 가족처럼 같이 사는 사람도 다 친구사이인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활동하다 보니까 일을 해내는 추진력이 엄청났죠. 희생도 엄청나게 했을 거고요. 새로 들어온 사람들한테 그런 희생을 요구하기도 했어요. 이런 성격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강렬한 경험을 주지만, 커뮤니티의 확장성은 별로 없었던 거죠. 그래도 옛날에는 친구사이 말고 갈 데가 별로 없었어요. 게이 커뮤니티 자체가 크지 않아서 친구사이에 올 수밖에 없었고, 그 자체가 구심력이었어요.
요즘은 게이 커뮤니티 자체가 많이 커졌고, 갈 수 있는 곳이 많아졌잖아요. 그러다 보니 옛날만큼의 구심점이나 강력한 동력은 없는 것 같아요. 활동이나 모임이 모든 게 다 느슨해졌어요. 좋고 나쁘고의 가치판단을 하는 건 아니에요. 어떻게 변했는지를 그냥 말씀드리는 거죠. 다만 일을 예전처럼 많이 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옛날에는 대단한 일도 많이 했던 것 같거든요.

 

플로우 예전에 대단하다고 느꼈던 일은 어떤 게 있으세요?

 

나미푸 친구사이 20주년 행사(2014년)가 우선 기억이 나요. 그때 종로에서 퍼레이드를 했어요. 종로 포차를 전부 섭외해서 다 무지개로 물들였어요. 그런 큰 동력이 필요한 행사들을 치러낼 수 있었죠. 20주년 백서 발간도 큰일이었고, 위켄즈 영화도 그렇고요. 

 

(사용)20주년 행사 준비.jpg

 

20주년 행사를 준비하며

 

 

나미푸 지금의 친구사이가 그런 일을 하는 건 상상이 잘 안 돼요. 그럴 만한 인력이나 동력이 없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저는 친구사이의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계속 얘기하고 있어요. 지금 이대로 느슨한 커뮤니티 모임으로 지속해 나가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활동가랑 상근자를 늘리고, 커뮤니티에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플로우 사실 느슨한 이쪽 커뮤니티는 말씀하신대로 술번개도 많고 동호회도 많으니까, 친구사이까지 친목 중심으로만 느슨하게 가는 건 친구사이로서의 고유함이 좀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네요

 

나미푸 맞아요. 

 

플로우 저는 한편으로 이게 비단 친구사이만의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어느 집단이든 구성원의 결속력이 약해진 건 사회 전반적인 현상인 듯 보여요. ‘요즘 애들의 개인주의 성향’ 이야기는 이미 차고 넘치게 많고요. 친구사이도 이런 시대적인 변화에 맞춰서 나름대로 적응한 게 아닐까 생각해요. 어쨌든 형은 여전히 친구사이가 의미 있는 활동을 해나가는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나미푸 정확히는. 꼭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기보다 명확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사회의 변화, 게이 커뮤니티의 변화는 존재하죠. 그러면 친구사이도 그에 대응해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를 만들어갈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만약에 조금 느슨해진 모습이라고 하면 지금 잘 가고 있는 거겠죠. 그런데 가만히 있다가 변화에 떠밀려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타성에 젖은 선택이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플로우 느슨해진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선택이든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나미푸 맞아요. 느슨해져서 많은 사람이 오는 건 당연히 좋은 일인데, 지금의 친구사이가 그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경험을 선사해 주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좀 아쉬워요.

 

 

6. 지독한 워커홀릭: 그의 열정과 허망함

 

 

플로우 친구사이 얘기만 좀 따로 빼서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시작하신 사회생활 이야기도 좀 들어볼까 합니다. 10년 정도 사기업 두 곳에서 일하셨는데, 전부 패션 계열이셨던 거죠? 

 

나미푸 네, 맞아요. 

 

플로우 혹시 패션 회사에 관심이 있으셨던 거는 어머님이 의상 쪽 일을 하셨기 때문에 그쪽에 관심이 있으셨던 건가요?

 

나미푸 아, 그건 아니에요. 제가 통역 장교로 군복무를 했다고 아까 말씀드렸는데, 원래 그거 끝나고 무조건 미국으로 대학원을 갈 생각이었어요. 계속 미국에서 살 생각이었거든요.
근데 그때 너무 사랑했던 애인이 있었어요. 제 주변 친구들, 형들 다 알아요. 한국에서는 첫 연애였고, 연하도 처음이었어요. 여섯 살 연하였고 우리 둘 다 군인이었는데, 그렇게 사랑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어요. 걔를 만나고 미국 갈 생각이 아예 없어졌어요. 그러면 한국에 나온 김에 뭐라도 좀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고, 반드시 어디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통역 장교는 특채 기회가 많은데, 뭔가 뻔하게 가는 건 싫은 거예요. 어디가 있나 채용 공고를 둘러보다가, E사(패션 관련 대기업 계열사) 바이어 자리가 뜬 거예요. 패션 좋아하니까 그냥 지원했어요. 적성검사도 보고 면접도 봤는데 덜컥 된 거죠. 
그때는 공부보다 돈을 일단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주변 사람들은 제가 집안이 유복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대학 졸업하고 난 다음부터는 부모님 도움 받은 적이 없거든요. 장교 할 때 월급도 적고, 애인은 병사였으니까 더 돈이 없고. 그거에 맞춰서 데이트하고 그랬죠. 둘 다 군인일 때는 매일 두 시간씩 통화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회사 가고 나서는 통화도 잘 못하고, 저는 적응하느라 바쁘고, 그러다 보니 마음이 식어서 헤어졌어요. 

 

플로우 애인 때문에 한국에 남으셨는데 결국 회사만 다니게 되셨네요. 한국에서는 첫 사회생활이셨을 텐데 좀 어떠셨어요?

 

나미푸 막상 회사에 가고 나니까 저는 또 잘해야 해서, 진짜 열심히 일했어요. 매일 제가 가장 일찍 출근하고 제일 늦게 집에 갔어요.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요. 제 직속 상사가 저를 엄청 갈구는 거예요. 사람들이 있을 때는 무시하고 깎아내리고, 둘이 있을 때 조금 잘해주는 척하고 그랬죠. 저한테 했던 말이, ‘나미푸씨는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였어요.

 

플로우 (한숨) 너무 전형적인 한국식 갈굼 아닌가요?

 

나미푸 제일 답답했던 건, 정작 일을 안 알려주는 거예요. 패션 일은 거의 엑셀이거든요. 일할 수 있게 엑셀 시트를 공유해야 하는데, 맨날 값 복사(사용했던 수식을 없애고 값만 남는 기능)한 시트만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만들지는 못하게 하는 거죠. 사내 공문 시스템도 하나도 안 알려주고. 그래서 그냥 주말에 출근해서 혼자 공부했어요. 그분이 올렸던 기안문 다 체크하고, 언제쯤 무슨 일을 하게 된다는 거 다 정리해두고. 그렇게 1년 하고 그분이 회사를 그만두니까, 제가 그 자리로 바로 올라가서 그분이 하던 모든 일을 다 했어요. 연차가 좀 쌓이니까 거의 모든 패션 대기업에서 오퍼가 오기 시작했어요. 

 

플로우 패션 업계를 잘 모르지만, 담당하셨던 직무명으로 추정해보건대 E사에서는 브랜드 하나를 완전히 케어하는 엄마 같은 역할을 하신 것 같아요. 

 

나미푸 맞아요. 뉴욕에 1년에 두어 번씩 가서 바잉해오는 게 재밌긴 했어요. 그렇지만 E사에서의 성과는 브랜드 하나만 갖고, 잘 해봐야 백화점 매출 얼마 느는 정도로 성과를 보는 거였어요.

 

플로우 이직하셨던 해가 2014년인데, 기록으로만 봐서는 그해에 일이 많으셨어요. 우선 친구사이 대표를 하셨고, 여름에 이직을 하시고, 연말쯤에는 HIV 양성 판정을 받으셨고요. 그 해를 지금 돌이켜보신다면 어떠신가요?

 

나미푸 저는 오히려 개인에게 일어났던 일보다 제 주변에서 큰일이 일어났을 때를 더 선명하게 기억해요. 2014년에 일어난 세 가지 일은 그냥, 전부 저 개인에게 일어났던 일이고 지금 저에게 특별히 어떤 의미가 있다고 느끼진 않아요. 오히려 그해에 일어났던 일 중에 저한테 선명한 건 서울시청 점거 농성이었어요. 그때 커뮤니티의 힘을 정말 다르게 느꼈거든요.
대표도 그냥 해야 할 것 같아서 했고, 이직도 때가 되어서 한 거고요. 이직을 했던 이유는 대기업의 진급 시스템 때문이었어요. 약간 공무원이랑 비슷해서, 아무리 잘해도 연수가 어느 정도 차야 해요. 나는 빨리 진급하고 커리어 면에서 더 빨리 발전하고 싶어서 이직을 했죠. HIV 감염도 당시에는 큰일이었지만, 올 게 왔다는 생각도 한편으로는 했어요. 

 

플로우 그러셨군요. 2014년이 큰 변곡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기억에 선명하게 남지는 않으셨네요. 그때 여러 곳에서 오퍼가 왔다고 하셨는데 특별히 F사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셨나요?

 

나미푸 F사 인터뷰를 갔는데 대표님이 여자분이셨어요.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촉이 왔어요. 백화점 브랜드도 아닌데 백화점 사정을 완전히 꿰뚫고 계시는 거예요. ‘어디 어디는 매장 빠질 거고, 어디 어디 매장 지금 내려고 하고, 어디는 얼마큼 적자고’ 이런 얘기를 막 줄줄 하시고요. 그래서 일단 대표님한테 꽂혔어요. 
그리고 F사 브랜드 중에 G라고, 제가 좋아하던 게 있어서 전 사실 그걸 하러 들어간 거예요. G 브랜드를 2년을 했어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표님은 F사 해외 진출을 시키려고 저를 뽑은 거지, G 브랜드를 하라고 뽑은 건 아니더라고요. 첫 2년은 테스트를 해본 거였어요.

 

플로우 F사에서는 이 매장을 세계 유명 도시들에 심기 위해 굉장히 열심히 뛰어다니신 것 같아요. 

 

나미푸 거기서는 날아다녔죠(웃음). F사에서 일하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훨씬 많고, 일하면서 만나게 되는 카운터파트도 대단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홍콩, 뉴욕, 태국을 다녔고, 태국이 제일 큰 건이었어요. 전에 없던 조건으로 저희 브랜드가 메인 상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처음부터 조율했거든요. 연봉도 많이 오르고, 업계에서도 점점 영향력도 커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다가 홍콩이 정치적 상황 때문에 비즈니스를 할 수 없게 되고, 태국이랑 미국은 성공적으로 런칭시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뒀어요.

 

플로우 나는 할 거 다 했다고 생각하셨던 거네요. 

 

나미푸 맞아요. 그런데 그때 사실 정말 너무(x10) 지쳤었어요. 너무 열심히 했어요. 2017년 말에 마지막으로 지보이스 공연 한 번 하고,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 법인 대표로 나갔어요. 그때는 비자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5년 정도 나가 있는 거로 생각했어요. 거기서도 정말 모든 걸 쏟아부어서 미국 사업을 성공적으로 문을 열었어요. 그런데 그걸 다 해놓고 나니까 너무 허무한 거예요. '나는 평생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나한테 뭐가 남았나' 싶었어요. 내 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언제든 죽으려고 사는 사람처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앞으로도 이 삶은 안 변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용) 뉴욕.jpg

 

뉴욕 근무 시절

 

 

나미푸 그래서 다 정리하고 2019년에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어차피 트럼프 정권이 들어서면서 비자도 최종 거절당했거든요. 고향 가서 3개월 정도 요양했는데, 침대에서 아예 못 나왔어요. 회사도 그만두는 거로 생각했는데, 대표님이 조금만 더 도와달라고 하셔서 한국에서 다시 일은 조금 했고요. 

 

플로우 그러다가 2020년부터 최근까지 국회로 가셔서 2년 정도 일을 하셨어요. 이 행보도 조금 의외였는데요, 어떻게 가시게 된 건가요?

 

나미푸 추천을 받아서 가게 됐어요. 가서 하고 싶은 일은 확실히 있었어요. 활동하면서도 그래왔듯이, 주류의 삶보다는 주변화된 삶에 관심이 많고, 그런 삶을 어떻게 개선할지를 국회가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플로우 원하던 일을 좀 하셨나요?

 

나미푸 국회에서의 일들은… 내용을 언급하면, 너무 사람들이 특정되니까, 요약해서 간단하게 말씀드릴게요. 거기서도 여전히 열심히 일했고,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의원실을 옮기기까지 했지만, 결과적으론 저와 맞는 직장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플로우 최근에 그만두시고 지금 잠시 일을 쉬고 계시는데, 앞으로 계획이 있으시다면요?

 

나미푸 일단 잘 쉬고 있고, 이런저런 생각은 많은데 계획이 딱히 있지는 않아요. 누군가 새로운 제안을 해올 수도 있을 것 같고, 어느 날 제가 먼저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7. 마무리

 

플로우 ‘가진 사람 나미푸’ 라는 주제로 긴 시간 이야기 나눴습니다. 나미푸가 가진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얘기해본 것 같은데 맞나요? 

 

나미푸 그런 것 같아요. 준비 너무 많이 했네. 진짜 감동이에요. 처음 해본 얘기도 많고, 이렇게까지 모든 인생을 꿰뚫어서 정리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플로우 감사합니다. 끝으로, 오늘 ‘가진사람 나미푸’ 컨셉에 맞게 앞으로 뭘 갖고 싶으신지 한 말씀 부탁드려요.

 

나미푸 애인이요! (16년째 같은 말) 이제 정착하려구요!

 

 

여름 MT.jpg

 

정착하려구요! (IG : weare79_sai)

 

 

 

 

 

그날의 인터뷰는 칼같이 끝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주책맞게 또 내 얘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어디까지가 그의 인터뷰였고 어디부터가 내 얘기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가 뒤섞였고, 술 못하는 사람을 위해 준비해둔 탄산수를 네 병씩 비웠다. 그는 내가 여러 면에서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지 이미 감을 잡고 있었다. 데뷔 3년차 무명 여가수(ㅋ)가 이효리(ㅎ)를 만나 상담을 받고 있는 기분이랄까. 
인터뷰와 그 뒤로 이어진 대화를 다시 떠올려볼수록, 정말로 나미푸는 가진 게 많은 사람이다. 본인이 원해서 가진 것과 피치 못하게 가지게 된 것 모두를 끌어안고 살고 있다. 앞으로 무엇을 새로 갖게 될지, 또 무엇을 버리게 될지를 계속 지켜보고 싶다. 그는 언제든 무엇이든 말하는 사람이니까, 분명히 티를 내고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 친구사이 소식지를 구독한다면 그의 존재를 자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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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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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2022-11-07 오후 13:50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인데 지금까지 내가 알던 사람의 이야기가 맞나 싶을정도로 처음 알게 된 사실이 많네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았습니다. 

인터뷰 준비하신 플로우님이 굉장히 준비를 많이해서 갔다는게 느껴져서 그것또한 읽는 내내 두분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읽었네요. 

앞으로도 좋은 인터뷰 많이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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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우(flow) 2022-11-07 오후 19:22

재밌게 읽으셨다니 기쁘고 따뜻한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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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닢훠 2022-11-09 오전 11:57

저도 나미푸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인데 이 분 또한 왠지 저랑 아는 사이인 듯? ㅎㅎㅎ

 

플로우님이 준비를 많이 하셨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사실 소소한 웃음과 시시콜콜한 잡담을 기대하고 클릭했는데 너무 고퀄이라 감탄하면서 읽었어요. 나미푸 인생사의 흐름을 요목조목 잘 집어내고 정리해 주셨네요. 물론, 측근이라 자부하는 저 역시 처음 접하는 내용도 있어 더욱 흥미로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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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 2022-11-08 오전 07:36

두 분 다 너무 수고 많으셨네요. 간만에 즐겁게 긴 틱스트를 읽어내렸어요. 

처음엔 커뮤니티에 나와 미모(?)로만 승부보려던 미자 아니 나미푸인줄 알았는데 어느새 커뮤니티에 단단한 기둥이 되어 있는 거 같아 자랑스럽고 또 내 반성도 하게 되네요. 

미자 아니 나미푸의 마지막 간절한 바람이 빨리 이뤄지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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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있어요 2022-11-08 오전 09:05

인터뷰 너무 잘 봤어요. 어렵풋이 알고 있었지만 뭔가 콕 물어보기 어려웠던 이야기들을 알 수 있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인터뷰 해주신 분도 나미푸에 대해 진짜 많은 공부를 하신 후에 만났구나. 느껴져서 놀라기도 하구요 ㅎ 함께해줘서 고마워요 나미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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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라텀 2022-11-08 오후 21:55

언니가 불편한 존재 된 감각이나 외로움을 조금도 느낄 수 없는 날이 올까?

오게 할 거야.

그 자리 함께 일구어 나갈게.

영원히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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