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10월 |
---|
[에세이]
내 인생의 퀴어영화 #29
: 임철민 감독, <야광>
잊혀가는 유산들에 대한 퀴어 다큐멘터리 영화, 「야광」
임철민 감독의 「야광」은 올해 9월에 열렸던 <DMZ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되어 주목을 받으며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제’라는 행사명은 다큐멘터리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야광」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를 틀 짓는다. 하지만 「야광」은 그러한 기대감을 배반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다큐멘터리와 영상적 재현 자체에 대한 의문을 던지게끔 만든다.
텔레비전을 통해 흔히 접하는 ‘다큐멘터리’는 친절한 설명과 나레이션, 정보들을 통해 우리가 특정한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그러한 구성은 다큐멘터리의 다양한 형식의 일부일 뿐이다. 다큐멘터리는 하나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장르’라기보다는 영상을 통해 사물을 다루는 ‘방법론’으로 생각해야 한다. 「야광」은 한 문장씩 동화책을 읽어주는 듯 친절하고 쉬운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차라리 견고하게 압축되고 미학적으로 추상화된 개념어들이 서로 엮여 의미를 형성하는 인문학의 책들을 닮았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실험영화’, ‘예술영화’와 같은 편의적인 명칭으로 부르고 ‘원래’ 이해하기 힘든 영화로 치부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일 것이다. 「야광」은 부단한 자료수집, 현장답사와 인터뷰 등을 통해 기획되고 얻어진 현장의 기록들을 아카이빙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야광」이 주목을 받았던 것은 그 새로운 영화적 형식과 더불어 공식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남성 성소수자의 공간들’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P 살롱’으로 불렸던 파고다극장을 비롯한 서울의 몇몇 극장들, 공원, 공중화장실과 같은, 한국사회의 도시화와 더불어 생겨나고 신자유주의화와 함께 망각되고 있는 이른바 ‘크루징 스팟’들의 현재 모습에 대한 기록들이다. 우리가 그 당시 크루징 스팟에서의 다양한 만남의 실천들을 생각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하나는 지금과 같이 사진과 프로필만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쿨’하고 ‘깔끔’하게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비하여, 보다 인간답고 진중하였던 관계맺기에 대한 노스탤지어 혹은 멜랑콜리적인 상상이다. 또 하나는 구시대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다.
2000년대 이후 극장의 멀티플렉스화와 공공공간에 대한 감시와 관리체계의 강화는 인터넷 및 스마트폰의 발전과 더불어 이러한 공간들이 사라지고 각종 데이팅 어플리케이션과 같은 가상적 공간으로 이동하게끔 하였다. 우리는 이제 게이 전용의 공간들을 놔두고 왜 ‘일반공간’에서 그래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이전 세대와의 공간적인 분리라면, 이와 같은 시기에 동성애자 권리운동과 정체성 정치가 발전하고 일반화되면서, 지금과 같은 정치적 자각을 가진 게이 성소수자 정체성을 갖지 않았던 이전 시기의 성적 실천들에 대한 시간적인 분리가 함께 하게 되었다. 우리들 – 국제적으로 규범화된 게이 정체성을 가진 또래 세대들 - 은 이러한 공간들에서 이루어진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다. 당시 세대는 그러한 이야기를 기록하거나 풀어놓기를 주저하였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과거의 것, 뒤쳐진 것, 부끄러운 것으로 치부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우리 안의 하나의 분열증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 형성된 문화들은 – 다른 사회에서도 그렇듯이 – 직간접적으로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들의 단단한 기반이 되어 왔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야광」이 중요한 이유는 잊히고 있는 만남의 시공간적 양식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방식(노스탤지어와 결별선언)을 모두 취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야광」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과거, 재현될 수 없는 시공간, 다양한 가능성들을 가졌을 만남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도록 만든다. 그는 다큐멘터리가 흔히 그러듯 단순히 어떤 사람의 입을 빌려 ‘그때는 어떠했다’는 식의 증언을 내세우지 않는다. 특정한 시공간을 그대로 재현하여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타자적인 과거에 대해 영상을 통한 윤리적인 접근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질문하는 방법론적인 실험이다. 감독은 영상과 디지털 변주를 통해 ‘우리’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있는 과거와 현재, 안과 밖, 단절과 연속이라는 이분법들을 가로질러 접붙이고, 우리에게 남겨진 유산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다. 90년대의 모습을 간직한 바다극장을 점령하고 있는 비둘기 떼의 울음소리, 장소가 바뀌면 새롭게 울리는 ‘그라인더’의 알림음, 3D로 구현한 가상의 ‘낙원’과 엔딩곡의 가사는 과연 우리가 이전 세대와 얼마나 같고 다른가를 질문한다.
이전 작품에서도 보이듯 임철민 감독은 특정한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 ‘실패’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에서 영화적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는 버려진 영상 클립들을 이어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도 하고, 영화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우연성과 타자적 사건들을 그대로 포용하고자 한다. 또한 그의 영화는 ‘퀴어영화’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서 퀴어영화가 성소수자 정체화와 주체화 과정을 보여주는 내러티브 극영화로 자주 통용되기는 하지만, ‘퀴어’는 어떤 고정된 정체성이나 가정들을 빗겨나가 다른 가능성들을 상상하게끔 하는 인식론적 태도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화는 정체성, 공간, 영화에 대한 퀴어적인 영화이다.
「야광」은 11월에 개막하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초청작으로 상영될 예정이며, 12월 20일, 21일, 22일에 영상비평 계간지인 「오큘로(OKULO)」 주최로 ‘문화역 서울 284’에서 임철민 감독의 전작들과 함께 다시 상영될 예정이다. 더 많은 분들이 「야광」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하며 리뷰를 마친다.
_
* 다른 리뷰들을 참고하고 싶다면,
감독들이 뽑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기대작 10 「야광」 (이혁상 감독)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작품 리뷰 (설경숙 영화연구자)
사회학 연구자 / 전원근
[172호][활동스케치 #4] SeMA 옴니버스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 관람기 (1) : ‘친구사이’를 보는 친구사이, ‘지보이스’를 보는 지보이스
2024-11-04 19:08
기간 : 10월
영화 챙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