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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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가이드]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타다다닥.
숨죽인 발자국 소리의 움직임. 커튼 뒤 어수선한 어둠 사이로 긴장한 육체들의 실루엣. 하얀 파우더에 숨은 근육의 떨림. 나무 바닥에 떨어지는 발들의 벌거벗은 소리. 하얗게 피어오르는 파우더와 투명하게 흩어지는 땀방울. 눈부신 스팟 조명 앞으로 훌쩍 뛰어오른 탄광촌 소년, 빌리 앨리엇. 그는 단단한 근육과 우아한 몸짓에 하얀 깃털을 가진 한 마리 백조였다.
잠깐이지만 영화 속에서 처음 보았다. 매튜 본의 댄스 뮤지컬 [백조의 호수]. 95년 런던의 한 극장에서 시작해 이듬해 웨스트 앤드 입성, 다음 해에 미국 초연, 98년에 브로드웨이에 도착한 전대미문의 남자 백조들의 향연. 넋 놓은 여성 팬들과 게이들의 지갑은 물론 마음까지 훔쳐가더니, 로렌스 올리비에상과 토니상도 챙기고 2000년 세계투어에 돌입, 2003년에야 일본과 한국에 상륙했다. 온갖 기립박수와 매스컴의 찬사, 지루한 고전에 불을 지른 전복적 상상력에 대한 환희의 축포와 고상한척 하는 예술가들의 호모포비아적 비난이 동시에 따라다녔던 작품. 우리나라는 본 공연보다 먼저 스티븐 달드리의 사랑스런 영화 [빌리 엘리엇]에 감질나게 잠깐 나와서 더욱 애간장을 태웠던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2003년 LG아트센터에서 처음 막이 올랐을 때 나도 객석도 흥분의 도가니였다. 난생 처음 오페라를 보고 너무 감동해서 ‘팬티에 오줌 지릴 뻔’ 했던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 마음도 나 같지 않았을까. 차이코프스키의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음악적 핵심만 빼고 모두 바꿔버린 이 작품의 이슈는 단연 남성 무용수가 연기하는 백조들이다. 하얀 '튀튀'를 입고서 인형처럼 춤추는 비쩍 마른 여성 백조는 어디에도 없다. 상체를 드러내고 힘차게 뛰어오르는 남자 백조들의 군무를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발레의 규범을 창조적으로 파괴한 몸 사위는 더욱 섬세하고 더욱 자유롭다. 그리고 감정의 표현은 더 없이 깊고 아름답다. 이 현대적이고 파격적이며 섹시한 상상력은 아마도 게이가 아니고선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백조라는 창조물이 지닌 힘, 아름다움과 거대한 날개는 남성 무용수의 근육을 연상시켰다며 남성 백조는 그저 본능적으로 떠올랐다던 매튜 본의 인터뷰가 의미심장하다. 또한 억압적 현실과 자기 욕망의 발견, 이성애 시도와 실패, 자살, 정신병원 치료로 이어지는 이야기 구조는 게이들의 고통스런 성장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를 아무리 ‘혁신’과 ‘놀라운 상상력’ ‘새로움’ ‘현대적’ 등등 보편적인 어떤 것으로만 개념화하고 해석하고 칭찬하려고 해도 게이들은 안다. 게이에 대한 게이에 의한 게이를 위한 퍼포먼스라는 것을. 모르긴 해도 저건 내 얘기라며 눈시울을 적시는 게이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물론 매튜 본은 이 작품이 동성애를 그린 것은 아니라며 인터뷰 때마다 비즈니스를 염두한 말을 하곤 했다. 그는 더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게이들은 안다. 저건 우릴 그린 얘기라고. 영국 극작가 피터 쉐퍼의 [에쿠우스]도 그랬으니까. 사랑하는 말 여섯 마리의 눈을 쇠꼬챙이로 찔러 법정에 선 17살 소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연극은 ‘백조’보다 훨씬 노골적인 기표인 ‘말’이 등장한다. 관능적인 반라의 말들이 시종일관 소년의 욕망과 성장에 관여하는 연극을 두고도 사람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정상 비정상의 경계와 억압과 자유, 기성세대와 도덕에 대한 도전에 관한 이야기로만 풀이하지 않았던가. 두 작가가 다 게이인데도 말이다. 해리포터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이 연극에 앨런으로 출연해 알몸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매튜 본은 이후에도 [호두까기 인형], [신데렐라], [가위손] 등을 새로운 감각으로 무대에 올렸으며 비제의 [카르멘]을 자동차 수리하는 [카 맨]으로 바꾸어 무대에 올리는 등의 작업도 하였다. 오스카 와일드 원작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비롯해 최근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남자 버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지루한 고전에다 동성애적 욕망의 연대기를 새로운 상상력으로 그려 넣기 시작한 매튜 본의 작업이 언제나 계속되기를.
[172호][활동스케치 #4] SeMA 옴니버스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 관람기 (1) : ‘친구사이’를 보는 친구사이, ‘지보이스’를 보는 지보이스
2024-11-04 19:08
기간 : 10월
이밀
내년 공연도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