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어떻게 보면 나나 그 선배도 ‘활동가’인 것일 테지만, 또 활동을 하고 있는 자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름을 스스로 부여하는 것은 거부하자는 것이었다.
활동가는 말 그대로 어떤 활동에 힘을 쓰는 사람일 것이다. ‘활동’에 붙은 ‘-가’라는 접미사는 무언가 전문적이고 능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더한다. 어떠한 운동이건 활동가들은 전문가로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참여하면서 그 운동의 역량을 끌어올린다. 활동가의 양과 질은 그 운동이 이루어나가는 것에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활동가’라는 명칭은 쉽게 붙을 수 없는 것이고, 그만큼 그것은 자부심과 책임감을 지닌 이름이다. 인권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성적 소수자 인권 운동에서 전문적 활동가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빛나는 활동가들은 성적 소수자들의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개척하고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큰 밑거름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런데 활동가라는 생각이 들면 활동을 그만 두자라니.
스스로에게 ‘활동가’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어쩌면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있는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활동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이름은 또다른 선을 긋는다. 나는 전문가이므로 보다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언어의 권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그것은 판단의 권력이기도 하다. 나는 활동가이므로 더 옳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것은 어느 정도 합당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붙이는 그 이름은 나 자신을 덜 반성적이게 한다. 활동을 벌이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그 선배가 이야기한 것은 바로 활동을 하는 자로서의 마음가짐은 지니되, 남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잘 돌아볼 줄 모르는 일은 경계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짐작을 했었다.
그 생각은 자신의 온 힘을 쏟아 붓는 프로의 정신이 아니라 활동을 자신의 보통의 삶과 함께 한다는 아마추어리즘이기도 하다. 인권 활동을 전문가만이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인권 활동을 활동가가 전유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이 세계에 순응하는 소시민이게 되고 만다. 인권 활동이 저 멀리 특출한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놓여 있고 활동가가 아닌 나는 그저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권 활동의 ‘아마추어리즘’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조그마한 의지와 노력, 시간 투자가 있다면 언제든, 어디서든 참여하고 어떠한 변화들이라도 일으키고야 만다. 자신의 생활에 인권 활동이 아주 가깝게 자리잡는다. 거창한 것만이 인권 활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움직여나가는 사람들 역시 인권 운동의 보배이다. 이러한 우리들은 우리의 삶이 퍽퍽하다고, 세상살이가 바쁘다고, 어쩔 수 없이 주어져 있는 것을 하느라고, 활동을 그만두지 않는다. 활동은 바로 여기에서, 잠시 낸 시간 속에 시작되고 지속된다. 우리들의 일, 또 우리들이 손맞잡고 있는 ‘또다른 우리’들의 일에 작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움직임을 일궈내는 이러한 우리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폭넓게, 어쩌면 더 많이 이룬다.
지켜보는 것과 발을 내딛고 함께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더 차갑게 분노하고 더 뜨겁게 절망하며 더욱 깊이 환호하고 더욱 쓰라리게 춤을 춘다. 그것들을 경험할 판들이 이미 많고 또 새롭게 만들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친구사이’든 다른 곳이든, 주변 어디에나 내민 손들이 있다. 성적 소수자 인권/해방 운동이건 다른 사회 운동이건, 더 좋은 세상, 차별과 소외가 없는 세상을 꿈꾸고 사람들이 보다 조화롭고 자유롭게 자아를 계발하며 살 수 있길 바라고 있기만 하다면, 그 손을 더듬어 잡으면 된다.
일상 속에서 성찰하며 ‘그저 활동’할 마음이 있는 당신께 이 이야기를 건넨다. 이 글을 읽는 바로 당신, “당신을 찾습니다.”
이밀
내년 공연도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