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신당 지역구 국회의원 출마자 최현숙
다양성 존중받는 대한민국 만들기위해 동성애자로는 처음 국회의원 출마
“변태라는 욕 먹지않은 것 만으로도 희망”…‘동반자 등록법’제정 주장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남의 입에 오르내리기에는 달콤하다. 하지만 내 입으로 고백하기에는 쓰고도 떫다. 비밀을 섣불리 밝히다가는 주변인의 뒷담화로 번지기도 십상이다. 때문에 보잘 것 없는 비밀이라도 입을 열기까지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내 안의 나를 드러내는 것, ‘커밍아웃’이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 나이로 오십을 앞둔 여자. 여자라기보다 ‘아줌마’로 불리고, 사랑을 찾기보다는 자식 뒷바라지에 헉헉대는 모습이 익숙한 나이. 바로 그때 사랑을 만났다. 스무해 넘게 함께 산 남편도, 두 자식도 운명 같은 사랑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비밀을 털어놨다. 새 사랑이 생겼다고. 축복받기 힘들었던 건 이미 가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새로운 사랑이 또다른 ‘She’인 ‘그녀’, 바로 동성(同性)이었기 때문이었다.
최초의 동성애자 국회의원 출마자 최현숙(50) 씨를 만난 건 서울여성영화제가 열리는 신촌 아트레온극장에서였다. 총선이 끝나고 홀가분한 마음에 여성영화제에 빠졌다는 그는 보고 싶은 영화 스케줄 때문에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일정이 빡빡했다. 성적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귀고리를 한쪽에 단 모습이 나이 오십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생기있었다.
커밍아웃이란 용어가 이제는 그리 낯설지는 않다. 그러나 여전히 가까이에 있는 ‘동성애자’가 낯선 사회다. 선거는 끝났으니 정치는 저 멀리 보내고, 성적소수자로서의 이야기를 들었다.
최씨가 사랑을 만난 것은 2004년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친하고 가까운 사이라고만 여겼다. “이건 우정이 아닌데…”라고 느낄 즈음, 예전 각별했던 여자 친구들과의 관계가 떠올랐다.
“과거를 돌이켜보니, 내게 동성애적 성향이 있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가득한 세상에서 동성애에 대한 성찰은 물론, 성적 정체성을 확인할 기회가 없던 것 뿐이었다. 뒤늦게 깨달은 자신의 정체성을 더이상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에게 알렸고,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다행히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은 엄마를 이해했다. 어릴 때부터 성에 대해 금기시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성적소수자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은 엄마와 엄마의 새 반려자에 대해 축복해줬다. 상처를 받은 것은 남편이었다. 그의 친정 식구도 펄쩍 뛰었다.
그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사회운동을 계속 해왔다. 돈벌이도 쉬지 않았다. 덕택에 그는 이혼 후에도 큰 경제적 곤궁을 겪지 않았다. 다행히 주변인도 성적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많아 커밍아웃한 그를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았다.
돈벌이에서 쫓겨나지도 않았다. 다만 남편과의 이혼이 쉽지 않았다. 함께 번 재산의 분할이 이뤄져야하는데, 이혼이 미뤄지면서 재산 분할도 늦춰졌다. 2년 뒤에야 남편은 이혼에 합의했다.
커밍아웃. 이제는 초등학생도 ‘아하’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용어가 됐지만 여전히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쉽지만 않다. 그의 애인도 커밍아웃을 완전히 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동성애 커뮤니티에만 커밍아웃하는 경우도 있고, 가족이 상처받지 않게 쉬쉬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물론 평생 꽁꽁 숨기는 경우도 있다. 최씨는 “동성애자임에도 결혼 적령기를 맞아 이성과 결혼을 하는 등 ‘이중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그래서 그는 ‘동반자 등록법’ 제정을 주장한다.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반려관계가 아니라 결혼을 하지 않고도 생활의 파트너와 함께 법적 테두리 안에서 생활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법이 필요하다는 게 최씨의 생각이다. 법적 혼인이 불가능한 동성애 커플은 물론 나이 들어 결혼과 재산 분쟁 등이 부담스러운 황혼의 이성애 커플에게도 이 법은 적용할 수 있다. 동성애적 성향을 깨닫고도 경제적 사정 때문에 차마 이혼하지 못하는 이들이나, 법적인 보호가 없어 연인과의 사랑을 불안하게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도 이번 총선을 치르며 한가닥 희망을 엿봤다. 그의 활동에 대한 언론의 보도 태도나 누리꾼의 댓글이 비교적 성숙한 논의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변태니 어쩌니, 욕만 가득했을 것입니다.” 최씨는 “레즈비언이 우리의 대표가 될 수 있느냐, 레즈비언을 통해 어떠한 국민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느냐 등 진지한 토론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우리 사회가 성적소수자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커밍아웃(coming out)이란 말은 ‘come out of closet’이란 영문에서 나왔다. 우리 말로 하자면 ‘벽장 속에서 나오다’쯤이 되겠다. 어두컴컴한 벽장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 커밍아웃은 ‘동성애 혐오’라는 또다른 폭력으로 이어지곤 한다.
최씨는 남보다 먼저 세상을 살고 있다. 아직은 많은 이가 가지 않은 길이다. 먼저 세상에 커밍아웃한 최씨는 그래서 이렇게 충고한다. “행복이라는 뚜렷한 지향점을 찍고, 내 주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 상처받지 않을 커밍아웃을 서서히 준비하라”고.
커밍아웃 후 자신의 상처에 대한 배려도 미리부터 필요하다고 말이다.
성연진 기자(yjsung@heraldm.com)
* 차돌바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10-20 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