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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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서울퀴어영화제 20주년” #1]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사무국장 박기호님 인터뷰
: 1. 서울퀴어영화제와 무지개영화제
▲ 친구사이 대표 재직 시절, 2016년 친구사이 송년회 (2016.12.17)
터울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사이 소식지 11월호 커버스토리 주제가 '퀴어영화'인데요. 관련해서 금싸라기같은 컨텐츠를 가지신 분을 모셨습니다. (웃음) 간단히 소개를 해주시죠.
박기호 : 저는 2016년 친구사이 대표였고요. 지금은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에서 사무국장을 하고 있는 박기호입니다.
▲ 친구사이 주최 "영화의 밤" (1994.5.1)
서울퀴어영화제 사무국 활동
터울 : 영화 일을 1997년부터 계속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자료를 좀 읽어보니까, 예전에 군대 갔다 오신 때가 1995년이라고 들었거든요. 군대 가시기 전에 친구사이 행사를 가려고 했는데 장소를 못찾으셨다고,
박기호 : 그건 휴가 나왔을 때예요. 한겨레신문의 꼬투리에 작은 기사로 행사 소식이 났었어요. 그 당시 대학로에서 한다는 얘기만 들었고, 정확한 장소가 나와있지는 않아서, 무작정 대학로를 헤맸죠. 헤맸는데 장소를 끝까지 못찾고 돌아갔죠.
터울 : 그 때가 몇년도였나요.
박기호 : 1992년에 군대를 갔으니까, 1994년일 거예요. 친구사이가 첫번째로 후원의 밤 같은 행사를 했던 때였을 거예요.
터울 : 그럼 '종로 바닥'이라고 불리는 여기에 처음 나오게 되신 게 언제인가요.
박기호 : 그 시점은 더 늦어요. 군 제대하고 나서, 어떻게 하다 운좋게 방송작가일을 하게 됐는데, 방송작가 일을 하면 검색을 많이 해야 되거든요. 그 때는 PC통신도 있었지만, PC통신보다 먼저 인터넷 야후를 먼저 하게 됐어요. 그래서 그걸로 검색을 하다가,
터울 : 그 때 당시로도 되게 빠른 거였네요.
박기호 : 네. 물론 고화질 사진 한 장 뜨는 데 5분 걸렸어요. 그래서 검색하다가, 조금 심심해서 '남자', '남자 몸', (웃음) 이걸로 검색하다가 '게이' 이런 걸로 검색하게 돼서, 주로 좋은 정보를 얻으려면 영어로 해야 됐거든요, 그 당시에는. 영어로 'gay'를 쳤는데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사진들이 너무 많이 떠서 되게 놀랐고, 그러면 분명히 한국도 있을 거다, 그래서 PC통신을 하게 됐고, 나우누리 동성애자 모임 '레인보우'를 알게 됐어요. 그래서 '레인보우'의 첫 정모를 가게 됐는데, 거기서 서동진씨가 영화제를 준비하고 있고, 같이 할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자원활동가도 괜찮고 누구든 괜찮다고 했었는데, 그 때 당시에는 그걸 듣고 넘겼어요. 저건 내 일과 관련도 없고, 모르는 일이라 생각하고 넘겼는데,
그 때 마침 제가 직장을 그만두는 일이 생겼어요. 그땐 KBS도 마찬가지고, 귀걸이 안되고 목걸이 안되고 반지 안되는 규정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제가 귀걸이를 하고 갔었거든요. 그랬더니 부장이 귀걸이를 한 귀를 잡아당겨서 귀걸이를 뺐거든요. 약간 상처가 났어요. 엄청 기분이 나빴고, (웃음) 그래서 내가 이 일을 계속해야 되나, 그냥 관둬버리자 해서, 그땐 약간 어리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그만뒀거든요. 그만두고 나서 집안에서 있으려니까 심심하기도 하고, 그 때 마침 영화제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나서, 처음으로 퀴어영화제 사무국에 가게 됐어요. 사무실이 종로에 있었거든요.
터울 : 그 때가 1997년이죠?
박기호 : 1996년이었어요. 그 때부터 영화제 준비가 시작됐으니까. 그래서 갔는데, 할일이 없으니까 사무실에 오래 있게 됐어요. 오전엔 아무도 없으니까, 그 당시에 퀴어영화제 준비하던 친구들도 다 직업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거의 비어있었거든요. 저는 직장을 그만뒀으니까 낮에 할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거기 와서 있다가 전화를 좀 많이 받게 됐어요.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가장 큰 권력인데, (웃음) 처음에는 그냥 전화받는 자원활동가로 시작했거든요. 그러다가 정보를 많이 알게 되니까 어느날 회의도 들어가게 되고.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종로라는 곳을 나오게 되었죠.
터울 : 그럼 친구사이보다 퀴어영화제로 먼저 이쪽에 오시게 된 거죠?
박기호 : 그렇죠. 퀴어영화제는 그 때 처음부터 사무실이 종로에 있었고, 그 당시 친구사이는 사무실이 성수동에 있었어요. 1998년에 친구사이 사무실이 종로로 옮기고 나서부터 친구사이랑 조금씩 친해졌어요. 그 전에 내가 아는 게이, 성소수자들은, '레인보우'도 있긴 하지만 거기랑은 별로 안 친했거든요. 왜냐하면 '레인보우'의 연령층이 되게 젊었어요. 너무 젊었기 때문에 저는 이미 나올 때부터 약간 나이가 있었어서 '레인보우'에는 어울리기가 힘들었고, 퀴어영화제 사무국이 좀 그나마 연령대가 높아서, 그나마 거기서 좀 버텼던 것 같아요. 그 친구들이랑 되게 많이 놀러다녔어요.
▲ 제1회 서울퀴어영화제 자료집 표지, 스탭 명단 (1997)
터울 : 제1회 서울퀴어영화제 자료집을 봤는데요, 홍보국에서 일을 하셨더라고요.
박기호 : 그 때는 서로 그런 게 없었어요. 그냥 다들 직책만 나눠가졌지, 일은 뭐든지 다 같이 했었거든요.
터울 : 스탭 중에 익숙한 이름도 보이더라고요. '빛나는'의 박시영씨도 보이고, 친구사이 대표의 축사도 실려있고요. 그 때 일하시면서 인상깊었던 일이라든지, 좋았던 일이라든지, 회고를 해주시면 어떨까요.
박기호 : 같이 일했던 사람들 중에는 '빛나는'의 박시영 실장도 있지만, 같이 일했던 친구 중에는 <시인의 사랑>(2017)의 김양희 감독도 있었어요. 그 때는 그렇게 같이 놀러다녔어요.
소회라고 한다면, 막상 영화제가 시작하니까 너무 바빴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몰랐거든요. 영화제 처음 1회를 치렀을 때에는, 티켓 발부가 지금은 자동화됐지만, 그 때는 자동화가 안돼서 티켓을 일일이 손으로 써야 했거든요. 그 때 당일 것만 티켓을 준비해놨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내일 티켓을 사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돈을 미리 받고 그 사람 이름을 적어놓는 거죠. 그러면 내일 것까지 티켓을 밤새도록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했고,
그 다음에 첫해에 영화제를 할 때에는 후원금을 진짜 조금밖에 안줬거든요. 그 중에 50만원을 후원한 곳이 있는데, 거기서 끝내는 후원을 철수하겠다고, 100만원을 줄테니 자기들 이름을 영화제 자료집에서 빼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인쇄물이 다 나온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그걸 일일이 다 지웠어요. (웃음)
터울 : 왜 후원을 철수하겠다고 한 거예요?
박기호 : 처음에는 옳다구나, 도움이 되겠네 하고 생각했을 텐데 그 쪽도 내부적으로 반감이 있거나, 여론이 안좋고 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영화제 준비했던 친구들을 지금도 보고 싶기는 한데, 지금은 거의 연결이 안돼요. 몇몇은 간혹 마주치기만 할 뿐이고. 얘기 나누다보니 갑자기 보고 싶네요.
▲ <내일로 흐르는 강>(1995), <로드 무비>(2002)
터울 : 1997년 서울퀴어영화제가 기획된 시점이 재밌는 것이,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가 생기고, 같은 해에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주최한 제1회 서울인권영화제에서도 레즈비언·게이 세션이 열리던 상황이더라고요. 그런 흐름들이 있었을 때인데, 서울퀴어영화제 전후로 한국에 퀴어영화가 소개되었던 배경이나, 다른 영화제에서 퀴어영화를 보신 경험이 있으신지 궁금해요.
박기호 :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의 퀴어영화는 <내일로 흐르는 강>(1995)이 하나 있었고, 우리끼리 막 우겨서 저것도 퀴어영화야, 퀴어영화의 범주에 넣어야 해, 그랬던 작품도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동성애를 전면적으로 내세운 영화는 <로드 무비>(2002) 이전에는 거의 없었을 거예요. <내일로 흐르는 강>을 전 운좋게 보긴 봤는데, 그 영화는 필름이 남아있지 않고 한국영상자료원에 베타 테이프(Betamax) 형식으로만 남아있어서, 반출이 안되는 작품 중의 하나고요. <로드 무비> 때로 오면 퀴어영화제 전후로 해서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이전보다 많이 발전했었던 때죠. 성소수자 전문지 <BUDDY>(1997-2004)도 있었고, <로드 무비>의 경우 <BUDDY>측과 함께 행사를 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제가 볼 때는 그 영화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이미 1998년 제1회 서울퀴어영화제 때 소개했던 작품들이, 그 동안 한번도 소개하지 않은 영화들이었고, 좋은 퀄리티의 프로그램이었거든요. 그에 비해서 한국영화는, 단편영화는 그나마 좀 괜찮았는데 장편 부문에서는 비교가 많이 됐죠. 그땐 그랬어요, 드라마 하나에 동성애 관련 묘사가 나와도 난리가 나는 그런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게 옳다 어떻다 얘기하기도 하고.
그 다음에 누구나 방송에 나설 준비가 안돼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나서야 되는지 잘 몰랐던 거예요. 언론의 관심을 받으면 받을수록 서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져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힘들었어요. 서울퀴어영화제 같은 경우에도 방송에 나왔을 때 '6시 내고향' 같은 프로그램에 소개된 적도 있거든요. (웃음) 참 황당한 거죠 이제.
터울 : 왜 거기서 다루는 거죠? (웃음)
박기호 : 거기서 이제 왔는데, 특색있고 뭐 그래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진짜 웃긴 거예요. 이제 그걸 보고 저희 집이 난리가 났는데, 저는 이걸 누가 볼까 했더니 많이들 보더라고요. (웃음) 아무튼 그랬기 때문에, 어떤 다른 퀴어영화나 영화제에 힘을 받거나 교류가 있거나 이랬던 경험은 별로 없었어요. 일단 서로 제작도 조용히 하고,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터울 : 제1회 서울퀴어영화제 팜플렛을 보니까 영화를 되게 많이 초청하셨더라고요. 이 많은 영화를 어떻게 다 가져오셨는지, 사실 영화 따오는 게 큰 일이잖아요.
박기호 : 그 때 당시는 지금처럼 이메일이 활성화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팩스를 주고받았어요. 국내외에서 열리는 영화제의 프로그램북이 있으면 거기에 필름 제공처가 나오거든요. 거기에 무조건 팩스를 보내거나, 중요한 작품들이 아닐 경우에는 어떤 한 배급사를 컨택하면 그 배급사가 소장한 웬만한 작품을 다 가지고 오거나, 이런 식으로 많이 들여왔던 것 같아요.
▲ 서울퀴어영화제 준비위원회, 「<부에노스아이레스> 수입불가 방침에 대한 서울퀴어영화제의 의견」, 1997.7.18.
1997년 서울퀴어영화제 중단 사태
터울 : 1997년 영화제 중단 사태에 대해서 여쭙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지금 봐도 황당한 일인데, 영화제에 초청된 영화에 대한 심의가 문제가 되었던 건가요.
박기호 : 심의는 났었어요. 심의는 청소년 관람불가였었고, 그 당시는 심의규정에 청소년 관람불가여도 못 보는 작품이 있었어요, '전문가 상영'만 할 수 있다는 식으로. 그래서 몇 작품은 전문가 상영이고, 대부분은 청소년 관람불가였었죠.
터울 : 영화제에 대해 문외한인 입장에서, 요즘 영화제에 초청되는 영화는 성기노출이든 뭐든 다 허용되잖아요. 심의가 거의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표현의 수위가 자유로운데, 현재와 그 때는 영화제 심의에 어떠한 차이가 있었을까요.
박기호 : 제가 알기로 그 당시는 영화제가 막 발흥하던 때여서 영화제에 대한 규정이 없었어요,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에서도. 당시에는 영화제를 할 때 영화의 심의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영화제 자체만으로는 심의를 받을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영화제를 하려면 공연법에 의해서 공연 등록을 해야 하는데, 공연 등록을 하려면 심의필증이 있어야 했던 거예요. 영화제 쪽에서는 심의필증이 없어도 영화를 틀 수는 있었는데, 행사장 측에서는 공연법에 걸리기 때문에 심의필증이 필요했던 거였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심의를 받긴 다 받았어요, 그 당시에. 돈이 엄청나게 들었거든요. 당시 심의비가 35mm 필름일 경우에는 시간당 5만원, VHS로 찍은 작품은 그보다 좀 싸고 그랬었어요. 당시에 35mm 필름을 갖고 들어오려고 해도 행사에 맞춰서 들여와야 되기 때문에, 심의를 하려면 그 때는 필름을 직접 보여줘야 했거든요. 일정을 맞출 수가 없기 때문에 심의를 연기해달라고 등급위원회에 얘기하기도 했었고요.
어쨌든 결국 심의를 받았는데, 당시 영화 <해피 투게더(春光乍洩)>(1996)가 심의 통과가 안됐어요. 통과가 안된 이유가 성기 노출이나 이런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흐르는 동성애' 때문이었어요. 너무 해괴망측해서 친구사이랑 같이 침묵시위도 하고 그랬었죠. 그러면 동성애를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서울퀴어영화제는 어떻게 될 것이냐라고 해서 저희가 미리 심의를 아예 넣어버렸어요. 그래서 다 통과됐어요. 얼토당토 않게 청소년 관람불가, 전문가 상영, 뭐 이런 등급을 받았는데, '전문가 상영'은 뭐냐고 물어보니까 얘네들도 답이 없는 거예요. '전문가'에 대한 규정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 때 당시에 전문가 등급을 받은 영화는 티켓을 하나하나 팔 때마다 '전문가세요?' 라고 물어봤어요. (웃음) '당신은 청소년 전문가입니다.' (일동 웃음) 그 사람들이 그렇게 확답을 받아야지만 상영을 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1997년에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행사가 무산된 건 심의 문제는 아니었고요. 제 기억으로는 그곳으로 행사 대관이 가능했던 건 서동진씨가 연세대 동문이었기 때문이었는데, 대관 당일 오전에 대관 담당자가 이렇게 통보했어요. 여기서 만약에 영화가 단 한편이라도 상영된다면 여기 동문회관에서 일하시는 모든 분들이 직업을 잃을 수 있다,
터울 : 그렇게 이야기했다고요?
박기호 : 네,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렇게 나오니까 사무국 측에서도 고민을 많이 했죠. 과연 우리가 이 영화제를 하는 게 맞는 것이냐, 하지 않는 게 맞는 것이냐 고민했고, 그쪽에서 행사 개최 자체에 대해 불성실하게 나오니까, 일단은 '전원을 끊을 거다'라는 얘기를 그쪽에서 했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외부에서 발전기차를 들여올 것이냐는 얘기까지 했는데, 과연 그렇게까지 해서 행사 개최를 하는 게 맞는 것이냐고 생각했을 때, 우리로서는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 같아요. 또 실무적으로 영화 상영이 시작되는 동시에 대관 장소측의 협조도 받아야 하는데, 원활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경위들 때문에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고 행사를 안했었어요. 행사 개최 2시간 정도 전에.
그 때 기억에 남는 건, 저는 아침부터 행사를 준비했거든요. 그런데 행사를 못하게 됐고, 개막식에 쓰려고 준비했던 것들을 도로 다 들고 올라오는데, 그 때 어떤 분이 기형도 시집을 놓고 가셨어요, 기다리다가. 거기에 우리 영화제 일정표가 있더라고요. 그걸 보는데, 저는 이 사람 얼굴을 못봤거든요.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얼굴이라도 봤으면 좋겠는데... 그 때 당시에 저희가 홍대 주변에서 개막 파티를 하려고 했던 데서, 내년을 기약하는 파티를 열기도 했었어요.
터울 : 대관 장소측의 입장이 황당하네요. 행사를 개최한다고 왜 직업을 잃으며,
박기호 : 그건 그쪽에서 비공식적으로 들었던 이유였어요. 공식적인 이유는 그냥 대관이 안된다는 거였고, 이런 영화를 트는 영화제인지는 몰랐다는 거였고. 그건 이제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거고, 내부적으로는 아마도 곤란한 위치에 처해있었겠죠. 여기저기 항의도 들어오고 했을 테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 「동성애자 '부정의 시선'을 벗긴다」, 『한겨레신문』 1998.11.4., 20면.
터울 : 그래서 1997년 행사 개최가 무산되고, 1998년에 제1회 서울퀴어영화제가 열리게 되는데요, 97년에 계획했던 그대로 행사를 여시게 된 건가요?
박기호 : 프로그램은 더 좋아졌죠. 그리고 영화제를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최했었는데, 그 해가 아트선재센터가 개관한 해였어요. 아트선재 측에서는 퀴어영화제 대관이 한번에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기회였고, 또 거기가 시설이 너무 좋았었어요. 그 당시에 영화관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장비를 다 갖췄었어요. 너무 좋았죠. 작은 영화제 하기에 딱 안성맞춤인 곳이었어요. 35mm 필름부터 디지털, 16mm, 비디오까지 볼 수 있도록 시설이 다 구비되어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장소가 행사랑 잘 어울렸죠.
제1회 서울퀴어영화제를 할 때에는, 실은 처음엔 망할 줄 알았어요. 관객의 호응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느슨하게 준비했었죠. 그렇게 바쁠 줄 알았으면, 사람들이 많이 올 줄 알았으면 되게 빡세게 준비했을 텐데, 우리는 그게 아니었고, 진짜 아트선재센터에서 회당 한 30-40명만 와도 우린 고맙다, 생각하고 했었죠. 그래서 시작하고 그렇게 바빠질 줄 몰랐어요. 막상 첫날부터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와서, 영화제 기간 중에 거의 정신을 놓을 정도였죠.
터울 : 서울퀴어영화제에서 '레즈비언·게이 세션'이 운용되었었는데, 제가 듣거나 경험하는 바로 게이와 레즈비언이 그렇게 친하지 않을 수 있는 조건들이 있잖아요. (웃음) 그걸 극복하고 어쨌든 초창기부터 함께 끌고 가는 데 대한 전통도 있었을 것 같고, 나름의 철학도 있었을 것 같거든요.
박기호 : 사실 관객 중 상당수가 이성애자 여성이었어요. (웃음) 진짜 재밌었던 게, 그 때는 지금처럼 젠더감수성이나 이런 게 민감하지 않았어요. 게이와 레즈비언이 얽혀서, 남성이 주고받을 법한 음담패설을 서로 했거든요. 지금 같았으면 꿈도 못 꿀 일인데, 그 당시는 레즈비언·게이로 구별되기 보다, 사람들이 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 하나도 못본다는 사실과 공감대가 있었고, 그걸 같이 준비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큰 트러블이 있지는 않았어요. 연애 문제만 아니면. (웃음) 레즈비언, 게이도 마찬가지인데 둘이 사귀다가 싸우면 사라지잖아요. 그런 문제만 아니면 큰 트러블은 없었어요.
영화진흥법 (법률 제5929호, 1999.2.8 개정, 1999.5.9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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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개정 영화진흥법(현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에 삽입된 등급분류면제추천 조항.
터울 : 아까 잠깐 심의 얘기가 나왔는데, 영화제에서 심의가 좀 널럴해진 게 언제부터일까요?
박기호 : 서울퀴어영화제 뿐만 아니라 인디포럼, 다큐멘터리영화제 측에서도 열심히 싸웠고, 서울인권영화제 같은 경우에는 1997년 제2회 개최 때 행사장인 홍익대가 아예 봉쇄당하기도 했는데, 이것도 다 심의문제에서 촉발된 거였거든요. 그런 일들을 거쳐 정부가 대책을 마련한 것이, 심의면제가 될 수 있는 영화제의 조건을 준 거예요. 3개국 이상의 국제영화를 초청해야 하고, 몇 편 이상의 작품을 상영해야 하고, 3년 이상의 개최 이력을 갖고 있으면 심의 면제를 해주는 제도가 그 때 당시에 만들어져서, 그 때부터 그렇게 된 것 같아요.
터울 : 중요한 제도적 변화네요.
박기호 : 원래 영화법에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영화제를 함에 있어 심의를 안 받아도 되는 거였거든요. 공연법이 문제였던 건데, 많은 사람들이 심의에 대한 투쟁을 영화법 안에서만 다룬 측면이 있죠. 실제로 제일 중요했던 건 공연이었는데, 그 때 만약 투쟁의 목표에 공연법이 포함되었다면 더 큰 성과가 있었을 수도 있겠죠. 지나고 나서 하는 얘기지만, 그 당시에는 영화제들의 문제를 처리하기에 바빠서, 심의규정 완화의 문제를 영화제로 국한해버려서, 개별 영화의 상영에 대해서는 큰 제도적 진전이 있었을까 생각이 들긴 해요, 지나고 나서 보면. 그런데 그나마도 그 당시로는 엄청나게 진전된 조건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수준이었죠.
▲ <해변의 신밧드>(1995)
서울퀴어영화제 초청작
터울 : 1998년에 제1회가 개최되었고, 2000년에 제2회가 개최되었는데, 서울퀴어영화제에 초청되었던 작품 중에 기억나시는 영화를 국외 1편, 국내 1편 골라주신다면 어떤 작품이 있을까요.
박기호 : 국외 작품으로는 <해변의 신밧드(원제: 모래알처럼, 渚のシンドバッド)>(1995)를 꼽고 싶어요. 일본 작품인데, 크게 센 것도 아니에요. 고등학생 애들의 알콩달콩한 이야기인데, 저희 영화제에서 초청된다는 얘기를 듣고, 줄을 선 거예요 사람들이. 그 줄이 엄청났어요.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기 위해서 아트선재센터를 빙 둘렀어요. 그 중에 이성애자들도 많았겠지만, 게이들도 많이 봤어요. 이 영화가 알게 모르게 되게 많은 팬층을 갖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놀랐고, 이렇게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려고 했던 거였구나, 저는 계속 영화관 안에서만 준비를 해서 몰랐는데 어느날 사람들이 나가보라고, 난리났다고 하는 거예요. 나가봤더니 사람들이 싸움나고 난리가 난 거예요, 새치기를 했느니 안했느니로. (웃음) 그런 기억 때문에 그 영화가 가장 기억에 남고,
한국영화는 그 당시에 너무 희귀해서, 한국 영화 단편들이 다 좋았어요. 박동훈 감독의 <어머니>(1993)란 작품도 좋았고, 이송희일 감독 영화도 괜찮았고요.
터울 : <해변의 신밧드>라는 영화는 왜 흥행이 됐을까요.
박기호 : 당시에는 일본문화가 전면개방되기 전이어서, 퀴어물을 특히 좋아하는 이성애자 여성분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던 작품이었나봐요. 서동진씨는 알고 있었다고 했는데, 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거든요. 왜냐하면 수위도 안 세고, 섹스하는 것도 안 나오고, (웃음) 그랬어요. 그리고 영화제에서 미국판이 아닌 영국에서 만든 드라마 <퀴어 애즈 포크(Queer as Folk)>(1999-2000)를 처음 들었어요. 그게 히트했었어요. 엄청났었죠.
터울 : 미국판만 알고 있는 사람들도 꽤 많을 거예요.
박기호 : 네. 그 작품이 만들어진 계기는, 영국에서는 방송사가 작품을 제작하게 되면 일정 비율로는 소수자를 다루는 제작물을 만들어내야 해요. 한 4% 정도. 그래서 만들어진 게 <퀴어 애즈 포크>인데, 그게 호주와 유럽을 초토화시켰고, 한국도 완전 난리가 났었어요. 저희가 영화 처음 상영할 때 티켓을 사고 싶다는 청탁을 너무 많이 받었었어요. 그 때는 인터넷도 안되던 때니까 와서 줄 서는 방법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직장인이고 이런 사람들은 힘드니까 전화를 진짜 많이 했었어요. 그게 좀 기억이 나요.
▲ <퀴어 애즈 포크>(영국판, 1999–2000), <퀴어 애즈 포크>(미국판, 2000–2005)
터울 : 서울LGBT영화제 시절엔 SeLFF라는 이니셜을 썼고, 한국퀴어영화제는 KQFF, 서울프라이드영화제는 SPFF라는 이니셜을 썼는데, 서울퀴어영화제는 SQFF잖아요. 약자는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건가요?
박기호 : 그건 처음부터 그렇게 썼어요. 그래서 되게 욕먹었죠.
터울 : 왜요?
박기호 : 나이드신 게이분들은 '퀴어'를 되게 욕으로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보갈' 이런 단어는 욕으로 생각하지 않으셨고, 퀴어영화제 한다 그러면, 퀴어가 뭐냐, 이상한, 요상한, 이런 뜻이다 이러면, 왜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부르냐 그래서 욕을 먹는 거예요. 게이바 등에서 행사 포스터 붙이러 갔을 때 욕을 많이 먹었고, 사장님들이 잘 안 붙여주셨었어요. 퀴어는 너희가 우리 욕하는 거다 그래서. 그 때 당시엔 젊은 사람들 조차도 '퀴어'라는 말은 서구에서 들어온 단어라서 사용하면 안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었어요.
터울 : 어찌보면 그것이 '퀴어'의 원래 의미에 가까운데, 지금은 사실 한국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튼 이메일 주소를 지금도 'SQFF'가 포함된 문구로 사용하시더라고요.
박기호 : 저는 이쪽 문화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간혹 연애만 하다가 영화제를 통해 이쪽에 처음 나왔었고, 그 때쯤에 직업상 필요해서 이메일을 만들 때 이 주소를 쓰기 시작했어요.
터울 : 인생에서 서울퀴어영화제가 의미가 크신 것 같아요.
박기호 : 저한테는 최고죠. 저한테는 데뷔할 수 있었던 계기였었고, 지금까지 이 나이 되기까지 살아오는 힘, 원동력이, 서울퀴어영화제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걸 통해서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했던 행사 중의 하나죠.
▲ 여기서의 종로 P극장이 파고다극장이다. 게이들이 즉석만남(크루징)을 갖기 위해 자주 찾던 곳으로, 이 극장을 중심으로 종로3가의 게이 업소들이 생겨났다. 2002년에 폐관됐다. 『보릿자루』 2, 1998.11.1., 3쪽.
퀴어영화제와 극장 게이 하위문화
터울 : 사실 제 입장에선 그 시절의 이야기가 멋있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거든요. 1998년, 2000년에 개최된 서울퀴어영화제와 관련해서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하나만 더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박기호 : 이걸 얘기해도 되려나, (웃음) 그 당시에는 파고다극장이 있었잖아요. 저희가 이런 영화를 한다고 하니까, 어떤 분이 술이 취해서 오신 거예요. 저희는 항상 영화 상영이 약간식은 딜레이됐었거든요. 왜냐하면 준비가 늦어져서, (웃음) 관객들을 입장시키고 있는데 한 자원활동가가 와서 잠깐만 들어와주시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들어가봤더니, 어떤 아저씨가 앉아있는데 그 옆의 분들이 얼굴이 너무 빨개져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거예요, 부들부들 떨면서. 왜 저러나 하고 내려가서 봤는데, 이 아저씨가 바지 지퍼까지 다 풀러놓고 있는 거예요. (일동 웃음) 어떻게 해야 되나, 이 아저씨가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거예요.
터울 : 거기가 파고다인 줄 알고, (웃음)
박기호 : 그런 분위기인 줄 알고. (웃음) 옆의 남자분이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그래서 죄송한데 일어나시라고 했죠. 이 상황을 인지한 사람이 저와 자원활동가 한명 밖에 없는데, 제가 갑자기 들어가서 관객분을 끌어내니까 주변 스탭이 놀란 거죠. 왜 그러냐고 해서, 일단 나중에 설명하겠다고, (웃음) 그리고 일어나세요 하고 일어나는데 갑자기 이 분 바지가 훅 내려간 거예요. (웃음) 이러니까 저쪽에서 비명을 지르고. 그래서 추스르고 나갔는데, 스탭들 한명에게 택시 태워 보내드리라고, 너무 취하셨더라고요, 얘기가 안 통할 정도로. 보낸 뒤에 그 스탭이 형이 뭔데 관객을 내쫓냐고 물어서 상황 설명을 하니까 정리되는,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터울 : 사실 극장은 오랫동안 게이 하위문화의 중심이었잖아요. (웃음)
박기호 : 네, 좀 관객이 적은 영화 상영 후엔 콘돔도 나오고 그랬어요. 그런데 1회나 2회 때는 대개 관객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콘돔이 나오지 않았지만요. 난리가 났었죠. 거기 와서 친구를 만났다는 사람도 있었고, 아는 사람들을 거기서 만났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리고 그 때 당시에 관객으로 자주 왔던 분들이 계시거든요. 몇몇 분들은 정말 특이하셨어요. 아침 7시에 와서 줄 서 있거나. 그런 사람은 당연히 기억을 하게 되잖아요. 그 사람이랑 나중에 몇 년 지나서 친구가 되었던 경험도 있고, 그랬던 것 같아요.
터울 : 그 때 당시 1990년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영화가 어떤 의미였을지 생각하게 돼요. 지금이랑은 상황이 달랐던 것 같거든요.
박기호 : 영화라기보단 문화행사였겠죠. 그렇게 큰 성소수자 관련 문화행사를 처음 했기 때문에, 프로그램 중에 하나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 전체를 내세우는 성소수자·퀴어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반향이 컸죠. 만약 지금 같은 상황이었다면 더 큰 반향이 있었겠지만, 그 당시에는 인터넷이나 이런 게 거의 없는 상황이었고, SNS도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회가 매진이었기 떄문에. 지금은 가장 큰 행사가 퀴어퍼레이드잖아요. 그 당시는 그런 것조차 전무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유일했던 큰 공개 행사였던 것 같아요. 언론과 인터뷰도 하고, 신문 기사도 내고 이랬던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 때 마침 씨네21에서도 후원해줘서 광고도 실리고 했었어요. 그런 것들 때문에 많이 알려지게 되었죠.
▲ '98 독립예술제(현 서울프린지페스티벌) (1999.8.25-9.15)
1998년 독립예술제에서의 퍼레이드 경험
터울 : 서울퀴어영화제 시절에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와는 어떤 관계였나요?
박기호 : 그 당시에는 일을 같이 안했었고요. 2000년 제2회 영화제 때 서울퀴어영화제가 영진위 지원금을 받았어요. 지금은 500만원이 큰 돈이 아닌데, 그 때는 너무 큰 돈이었기 때문에, 서동진씨는 그렇게 받은 지원금을 우리만 써서는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는 모두가 동의했죠, 이건 우리가 잘해서 받은 돈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돈을 모아서 어떤 행사를 기획하면 좋은지 이야기해보자고 했는데. 서울 중심으로 가는 게 아니라, 그 때 당시엔 전국적으로 단체들이 막 생겨나기 시작했었거든요. 그래서 전국의 성소수자 단체를 다 한번 모아봤어요. 어떻게 쓰는 게 좋겠나를 이야기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었고, 그 영진위 지원금이 생겼기 때문에 다르게 여유가 생긴 돈이 있잖아요. 그 돈을 가지고 그런 행사를 만들었었고, 거기서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여러 행사를 기획하게 된 것이 퀴어문화축제의 전신이었어요. 그런 관계였던 거죠.
터울 : 네, 2000년에 처음 퀴어퍼레이드가 진행되니까요.
박기호 : 그렇죠. 그런데 퍼레이드 형태의 행사가 그 때가 처음이었던 건 아니에요. 그 당시 서울독립예술제가 있었는데, 1998년 독립예술제(현 서울프린지페스티벌)가 대학로에서 퍼레이드를 했어요. 그런데 그 기획단이 아무리 해도, 이성애자들이 퍼레이드를 기획해서 오는 게 너무 웃긴 거예요.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퍼레이드를 본 사람들도 아니고, 막상 준비해오면 짜증이 나니까, 저희 영화제 쪽에 요청을 했었거든요. 혹시 한 팀을 꾸려줄 수 없냐고. 그래서 저희가 우격다짐으로 어떻게 한 팀을 꾸렸어요. 여장도 하고 했는데, 그 때 비가 엄청 왔어요. (웃음) 그래도 그 퍼레이드로 대학로 한 바퀴를 돌았는데, 사람들은 그게 너무 기분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터울 : 독립예술제에서도 퍼레이드를 한 이력이 있었군요.
박기호 : 네, 그 때 당시에 한번 해봤었어요. 저는 그 때 마음 속으로 이게 사실상 성소수자 퍼레이드가 아닌가 싶었죠. (웃음) 왜냐하면 다른 단체들도 오긴 했지만 실질적으론 퀴어들이 전부였거든요. 트럭에 올라간 것도 퀴어들이었고. 그래서 저는 마음 속으로 그 때가 첫번째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터울 : 그 때 서울퀴어영화제가 퍼레이드의 트럭을 탔던 거네요.
박기호 : 독립예술제에서 트럭을 하나 줬고, 올라갈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 쪽 단체에서도 여러 가지로 알아봤었는데 사람들이 올라가지도 않고, 그래도 우리는 여장도 하고 몇 명이서 올라갔으니까. (웃음)
터울 : 그 때 기록이 남아있다면 너무 재밌겠네요.
박기호 : 사진 한 장 정도인가? 어디서 본 것 같아요. 저는 근데 그 사진 너무 싫더라고요. (일동 웃음)
▲ 서울퀴어아카이브 주최, '퀴어베리테 - 레즈비언, 게이 다큐멘터리의 지도 그리기' (2003.12.1-12.7)
서울퀴어아카이브로 개편
터울 : 그러다가 영화제가 서울퀴어아카이브로 개편이 되잖아요. 그 때의 경위가 궁금합니다.
박기호 : 1회, 2회를 하고 나서, 대규모로 행사를 하는 건 효과가 없겠다, 그 때 당시엔 많은 다른 영화제가 열렸었고, 그래서 이제는 대규모 영화제를 하기 보다는 소규모 영화제로, 매달 정기적으로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해서 그렇게 방향을 틀었죠. 퀴어아카이브는, 그 때 당시에는 영화제마다 본편을 받기 전에 사전에 프리뷰를 받거든요. 그걸로 리뷰를 쓰고 자막도 만들어놓고 이래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프리뷰 VHS 테이프를 다 모아놨는데, 그것들을 가지고 뭘 해야 할지를 고민했어요. 버리기도 아깝고 해서, 사무국에서 아카이브를 구성하고 있다가 보러오는 사람이 찾아오면 상영해주기도 하고 그랬죠. 그러면서 아카이브가 됐고, 소규모 영화제를 매달 열어보자고 해서 그 때 상영회가 12번이 열렸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웃음) 너무 힘들어서 그 다음부턴 못했고,
영화제를 2회 준비했지만 준비하는 사람은 5-6년씩 준비한 거였거든요. 그래서 저는 괜찮았지만 다른 친구들은 자기의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인원도 확 줄었고, 지금같은 분위기였으면 더 열심히 일할 친구들이 많았을 텐데, 그 때는 퀴어 단체에서 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커밍아웃을 한다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일하려고 하지 않고, 일할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약간 힘들게 아카이브를 꾸려왔던 것 같아요.
터울 : 그럼 아카이브가 언제까지 운영되었나요.
박기호 : 아마도 (퀴어문화축제 산하)무지개영화제를 하면서 없어진 것 같아요.
터울 : 2001년에 제1회 무지개영화제가 개최되는데요.
박기호 : 네, 아마 그 즈음인 것 같아요.
터울 : 퀴어아카이브 자료가 KSCRC(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에 있죠?
박기호 : 맞아요. 그 당시 아카이브를 구성했던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저도 보관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어요. 그 땐 친구사이와 퀴어문화축제가 같이 일을 할 시점이라 거기에 보관하기도 애매하고, 처음엔 퀴어문화축제랑 KSCRC랑 무지개영화제가 같이 사무실을 썼었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보관했다가,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에서 제가 나오고, KSCRC가 종로에서 망원동으로 가면서 이 짐을 정리하는 게 문제가 됐어요. 그 때 KSCRC에서 퀴어아카이브를 새로 구성한다고 하니까, 서동진씨랑 같이 해서 서류를 성안하고 KSCRC에 넘겨주게 됐죠.
터울 : 2003년에는 서울퀴어아카이브에서 '퀴어베리테'라는 다큐멘터리 축제도 열렸더라고요.
박기호 : 서울퀴어영화제에서 서울퀴어아카이브로 가게 되고, 그 당시는 제가 퀴어아카이브에서 나온 후였어요. 2002년에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설립됐는데, 그 때 퀴어아카이브가 발기 단체로 들어갔어요. 서동진씨랑 저랑 몇 명이서 들어갔는데, 살펴보니까 협의회에서 쓸 수 있는 예산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예산으로 개최한 행사였었죠. 그 때는 정말 시네마테크에 맞는 희귀한 작품을 상영했어요. 그 행사에는 제가 관여하지 않았고, 관객으로 두어번 보러갔었죠.
터울 : 2002년에 시네마테크협의회가 생겨서 지금도 홈페이지가 운영 중인데, 거기에 보면 연대 단체에 '서울LGBT아카이브'가 있어요. 그리고 사무실이 친구사이 사무실로 돼있더라고요. (웃음)
박기호 : 김조광수 감독이 서울LGBT영화제를 맡으면서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소속 서울퀴어아카이브 회원 이름을 김조광수 감독과 스탭 이름으로 정리했어요. 서동진씨랑 이야기해서 회원 이름을 바꿔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죠. 그러면서 서울퀴어아카이브를 서울LGBT아카이브로 바꾼 거죠. 명칭이 변경된 건 2011-2012년 즈음일 거예요.
터울 : 서울퀴어아카이브의 명의가 그럼 친구사이 사무실로 와 있는 셈이군요.
박기호 : 주소지만. (웃음) 그리고 그 때는 종로에서 단체 고유번호증을 내기가 수월했어요. 다른 서대문이나 이런 데서는 계약서도 요구하고 요건이 까다로웠는데, 고유번호증이 중요하거든요. 사업자등록증이랑 비슷한 거니까. 종로세무서에는 그걸 쉽게 내줬어요, 그 당시는. 지금은 아닌데, 왜냐하면 종로에는 그런 단체가 너무 많잖아요. 그래서 쉽게 나왔어요.
▲ 퀴어문화축제 : 무지개2002 (2002.6.4-6.8)
퀴어문화축제 산하 무지개영화제의 출범
터울 : 그럼 퀴어문화축제에는 어떻게 처음 일하시게 되셨는지,
박기호 : 제가 하던 일이 영화제니까, 퀴어문화축제도 프로그램을 기획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전시, 영화제, 이런 걸 해보자는 게 있어서 저는 영화제 파트를 준비하러 갔었고,
터울 : 제1회 무지개영화제 때부터 하신 거네요.
박기호 : 그렇죠. 그 때 당시에 퀴어문화축제에서 돈을 벌 수 있었던 행사는 영화제밖에 없었어요. 수익이 유일하게 날 수 있는 행사가 영화제였고,
터울 : 뒤에는 후원파티가 생기기는 하지만 그 때는 그랬군요.
박기호 : 네. 그렇기 때문에 영화제 내에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영화제 일을 같이 준비하게 됐죠. 영화제 일을 잘 알기도 했고요. 지금이야 많이들 알 수도 있지만, 부산국제영화제 같은 데서도 사실 잘 몰랐거든요. 영화 통관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금은 어떻게 따야 하는지 이런 걸 잘 몰랐기 때문에, 영화제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네트워킹이 되어 있었어요. 영화제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서류나 이런 것도 많이 필요하고, 심의를 어떻게 건너뛰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하고, 이런 것들이 있다보니까, 제가 자연스럽게 잘할 수 있는 분야였어서 같이 하게 된 거죠. 그러면서 거기도 마찬가지로 전화를 많이 받게 되면, (웃음) 정보를 많이 알게 되면 권력을 지니게 되거든요. 사무실에 상주하게 되다보니까 여러 가지 다양한 일을 알게 돼서, 퀴어문화축제 사무국장도 하게 되고 그랬던 것 같아요.
터울 : 2001년 제1회 무지개영화제가 명동의 '떼아뜨르 추' 소극장에서 열렸더라고요. 그 때는 규모가 어땠나요.
박기호 : 첫 회 규모는 많이 작았어요.
터울 : 서울퀴어영화제보다는 훨씬 작은 규모로 처음에 열린 거죠?
박기호 : 그랬죠.
터울 : 2002년 제2회부터는 광화문 일주아트하우스의 아트큐브에서 열렸는데요.
박기호 : 일주아트하우스 같은 경우에는 그 때 극장이 두 개가 있었어요. 지금은 시네큐브 1, 시네큐브 2로 운영되는데, 시네큐브 2가 77석이에요. 거기가 그 때는 아트큐브라 불렸는데, 거기도 시설이 되게 좋았어요. '일주(一洲)'가 태광그룹, 흥국생명 고 이임용(李壬龍) 회장님의 아호거든요. 거기를 명소를 만들려고 자기들이 팀을 직접 꾸렸었어요. 일주아트하우스라고 만들어서,
터울 : 그럼 지금 시네큐브 자리가 거기였군요.
박기호 : 네. 그 때 일주아트하우스를 꾸렸던 친구들은 지금 거기에서 일하진 않아요. 그 친구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같이 일했었고, 거기서 무지개영화제를 2005년까지 개최했죠.
아트큐브가 처음엔 난리도 아니었어요. 비 새고. (웃음) 처음에 시네큐브 1관에서 어떤 작품을 상영했는데, 그 영화가 동굴이 배경으로 나오거든요. 동굴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예술인 거예요. 그래서 이 영화 진짜 잘 찍었다 그랬는데, 나중에 봤더니 실제로 영화관에 물이 떨어진 거였어. (웃음) 그래도 거기가 영화제 하기 딱 좋은 영화관인 게, 해외영화의 경우에는 자막을 따로 쏴야 되잖아요. 거기는 자막 쏘는 공간을 따로 마련했고, 자막용 스크린도 따로 있었어요. 해외 영화로 영화제를 하기에 좋은 곳이었어요. 운이 좋았죠.
터울 : 무지개영화제에서 일하셨을 때 같이 일하셨던 동료들은 어떤 분이 있었나요.
박기호 : 병석이도 있고, 홀릭도 있고, 다 좋은 친구들이었죠.
터울 : 저는 2001-2003년 친구사이의 이 때 역사를 보면 되게 재밌거든요. 퀴어문화축제랑 이렇게 끈끈하게, 사무실을 같이 쓰면서까지 지냈던 시절의 이야기가,
박기호 : 그 때 친구사이는 낮에 사무실을 안 썼거든요. 퀴어문화축제 같은 경우 낮에 사무실을 쓰고 돈을 조금 내자, 그래서 같이 썼는데, 급한 사람들은 밤낮이 따로 없잖아요. 낮에도 전화하고 밤에도 전화하고. 그 전화를 퀴어문화축제에서 받다 보니까, 친구사이에 전화내용을 전달해줘야 하잖아요. 하다보니까 되게 많은 걸 알게 된 거예요. 그렇게 해서, 친구사이와 퀴어문화축제가 끈끈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전화기와 전화번호는 따로 썼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가 계속 울리면 안받아줄 수는 없잖아요. 받아주게 되고,
터울 : 전화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군요. (웃음) 저는 서울퀴어영화제와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와의 관계가 감이 잘 안 오거든요. 인적 구성이 얼마만큼 연계되었는지,
박기호 : 서울퀴어영화제와 퀴어문화축제는 거의 연관성이 없죠. 그리고 퀴어문화축제 만들어지면서 무지개영화제에 들어갔을 때는 하나의 프로그램이었으니까 같이 붙어 있었고.
터울 : 그럼 형이 들어간 것 외에는 다른 인적 연결은 없었던 거군요.
박기호 : 그 땐 워낙에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자원활동가를 제외하고는. 퍼레이드팀 한 명, 기획팀 한두 명, 전시팀도 한 명,
터울 : 그런 식이었군요. 한 명도 되게 큰 거였군요, 그러니까. (웃음)
박기호 : 영화제 담당 한 명, (웃음)
터울 : 그러면 어쨌든 누군가 역사를 쓸 때 서울퀴어영화제에서 퀴어문화축제으로 인적 연계가 이어지는 증거가 형이 되는 셈이군요. (웃음) 무슨 맥락인지 알겠습니다.
박기호 : 그래서 행사 차원에서 이어진다고 볼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무지개영화제는 전 새로운 행사라고 봤어요.
▲ 미쟝센단편영화제 2003, 서울독립영화제 2003, 인디포럼 2003.
미쟝센단편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인디포럼 활동
터울 : 2003년에는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도 사무국장으로 일하셨더라고요.
박기호 : 퀴어문화축제에서 무지개영화제를 할 때는, 무보수잖아요. 제가 계속 무보수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웃음) 가족들을 계속 등쳐먹고 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6개월은 이 영화제를 준비하고, 6개월은 일하고, 이걸 한 3-4년 했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미쟝센영화제에서 6개월 일하고 돈 벌어서, 나머지 6개월은 이 영화제 준비하고. 그런데 너무 힘들어서 딱 1년 일했어요. 이후에는 서울독립영화제나, 인디포럼에서도 일했어요.
터울 : 거기서는 보수를 받고 일하셨군요.
박기호 : 당연하죠. 무지개영화제를 제외하고는 다 돈을 받고 일했어요. 경력이 좋아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도 스탭으로 오라고는 했었어요. 그래서 부천에 한번 가보려고 했는데, 너무 놀란 게 그 당시만 해도 영화제에 해당 지역의 유지들이 관여했거든요. 면접 보는데 경력사항에 있으니까 퀴어가 뭐냐고 물어봐서 15분간 설명했는데, 그렇게 설명을 해도 전혀 이해를 못하시는 분들이 면접관으로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선 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되긴 됐는데, 전 안 가겠다고, 이걸 이해시키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못 가겠다고 했었어요.
터울 : 무지개영화제는 2005년까지 아트큐브에서 하다가, 2006년에는 서울아트시네마(구 허리우드극장)에서 개최되더라고요.
박기호 : 일주아트하우스에서 영화제 개최가 여의치 않게 될 때쯤에, 마침 아트선재센터에 있던 시네마테크협의회가 허리우드극장으로 왔어요. 지역적으로도 너무 가깝고, 다 알던 친구니까 장소를 거기서 하게 된 거죠.
터울 : 그 때부터 서울아트시네마와의 기나긴 인연이 시작되신 거군요. (웃음)
박기호 : 원래는 저나 이송희일감독이나, 문화학교 서울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는 문화학교 서울과 인적으로 이어진다고 보면 되거든요. 문화학교 서울에 몸담고 있었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이 수월했죠.
우리 문화학교 서울은 그동안 영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영화 소그룹 활동을 해왔다. 그간의 경험을 통하여 작은 대안을 도출해 내고 ‘진취적이고도 새로운 한국영화의 토양의 형성’이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본지를 발간하게 되었다. 우리는 수동적인 영화소비자에서 능동적인 수요자로, 영화에의 유희적 접근에서 논리적 접근으로, 영화조직의 국외자인 관찰자의 위치에서 영화조직의 한 구성원인 참여자의 위치로, 변화된 위치에서 영화를 바르게 대하고 검토연구하며 그 결과들을 같이 공유하고자 한다.
- 문화학교 서울, 「창간사」, 『씨네필』 1, 1994,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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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학교 서울,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1995.
터울 : 문화학교 서울에 대해서 조금 소개해주시죠.
박기호 : 문화학교 서울은 비디오운동, 영화보기, 시네마테크의 원류라고 보면 되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토론하는 집단이었어요. 1992년 설립됐어요. 그게 출발점이 돼서 인디포럼도, 서울독립영화제도 나오게 되죠. 한국독립영화협회(한독협)도 문화학교 서울에서 출발한 친구들이 많이 관여했어요. 시네마테크 운동, 독립영화 관련 활동의 시작은 거의가 문화학교 서울이라고 보면 돼요.
터울 : 그럼 무지개영화제는 언제까지 하신 건가요? 찾아보니 2006년까지는 무지개영화제라는 이름으로 가다가, 2007년부터 서울LGBT영화제(SeLFF)로 바뀌더라고요.
박기호 : 서울LGBT영화제 때부터 안했어요. 무지개영화제를 계속하면서 너무 힘이 들어서, 그 당시에 계속 퀴어커뮤니티 내에서 있었거든요. 저는 그 때까지만 해도 활동가라고 스스로 인지하지 않았고, 인권에는 문외한인 것 같기도 했고, 그랬었거든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문화 운동을 하는 거지, 인권운동은 내가 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경계가 무엇인지는 헛갈리기는 하지만, 그 때 당시만 해도 그런 활동은 내가 아니라 다른 친구들이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즈음에 다양한 친구들을 알게 됐고 다양한 사람과 일을 하게 되면서, 여러 군데 불려가기도 해보고, 그러다보니 힘들더라고요. 먹고 사는 문제도 힘들었고, 그래서 이 영화제를 떠나서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전혀 새로운 일. 그래서 그만두게 됐죠.
지금은 상대적으로 괜찮지만, 그 즈음의 인권운동가나 문화활동가를 전업으로 하던 분들은 집에 빚을 지고 살 수밖에 없었어요. 가족의 등골을 빼먹지 않고서는 활동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어요. 저는 특히 가족들한테 많이 의탁했고, 누나들이 생활을 많이 지원해주기도 했고, 그러다보니까 제가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전업으로 활동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라는 고민이 들어서, 약간 떨어져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대구의 한 촌동네로 들어가서, 거기서 6개월 정도 지냈어요.
터울 : 쉬시는 느낌으로 내려가신 거군요.
박기호 : 그런데 거긴 더 힘들었어요. (웃음) 거기 있던 친구가 나보고 내려오라고, 쉬면 된다고 해서 내려갔는데, 거긴 더 빡센 거야. (웃음) 다만 마음은 편했죠. 단순한 육체노동이었고, 머리 쓰는 일은 없었으니까.
터울 : 그럼 서울LGBT영화제로 명칭이 바뀌셨을 때는 별다른 관여를 안 하신 거군요.
박기호 : 네, 그 때쯤에 제가 빠져서, 다른 친구가 맡게 되거든요. 그 분이 명칭을 바꾼 걸로 알고 있어요.
▲ 2007 서울LGBT필름페스티벌 (2007.6.6-6.10)
퀴어영화에 대한 관점
터울 : 무지개영화제를 그만두실 때는 영화제 관련 경력이 10년이 넘게 되신 거잖아요. 그렇게 퀴어영화를 오랫동안 접하셨던 만큼, 퀴어영화에 대한 형의 시선을 여쭐 때가 된 것 같아요. 예전 친구사이 소식지에 기고해주신 '내 인생의 퀴어영화' 에세이에서 <리빙 엔드(The Living End)>(1992)를 다루어 주셨잖아요. 이른바 착하지 않은 게이, 성판매 게이·범죄자 게이를 다룬 영화인데요. 지금도 '모범적인 퀴어' 이미지를 강조하는 여론들이 적지 않은데, 영화에서만큼은 그런 관념을 좀 뒤집어야 한다는 뜻에서 추천해주신 영화였던 것 같아요. 퀴어영화에서 중점적으로 생각하셨던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요.
박기호 : <리빙 엔드>는 제게 충격을 준 작품이었어요. 이게 뭐지? 싶기도 하고. 성폭행 씬도 나오는데, 에로틱하기보다 폭력적으로 묘사되거든요. 그런 퀴어영화를 처음 봤어요. 그 당시에 본 영화 중에 토드 헤인즈(Todd Haynes) 감독의 <포이즌(Poison)>(1991)도 있었고 <리빙 엔드>를 찍은 그레그 아라키(Gregg Araki) 감독의 영화도 있었고, 탐 칼린(Tom Kalin) 감독의 영화도 다 놀랄 만한 작품이었어요. 저 3명의 감독을 뉴 퀴어 시네마(New Queer Cinema)의 3인방이라 불렀어요. 그래서 그 때 당시 이 세 사람의 작품이 다 좋았는데, 저는 그 중에서 <리빙 엔드>가 제일 좋았어요. 일단 돈을 안 들인 티가 나고, (웃음) 우리들에게 카메라가 접근하는 방법은 이런 식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영화를 참 좋아했어요.
영화는 시대에 따라서 좋은 카메라, 좋은 화질도 중요하겠지만, 퀴어 영화는 우리 얘기를 과장하지 않고 가장 잘 풀어내는 작품이 좋은 것 같아요. <호수의 이방인(L'inconnu du lac)>(2013) 같은 경우에도 게이 간의 크루징이 저렇게 이루어진다는 걸 가감없이 보여주잖아요. 그런 게 저는 좋아요.
터울 : 퀴어영화가 너무 제도적으로, 기성으로 가기보다는 그렇게 하위문화적인 문법들이 더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거군요.
박기호 : <리빙 엔드>의 마지막 씬이 바람소리거든요. <호수의 이방인>도 그렇잖아요. 그런 게 기억이 많이 남아요. 퀴어영화 중에서 전 그런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 <리빙 엔드>(1992)
이런 역사들이 쌓여서 위켄즈도 탄생할 수 있었구나란 생각도 들고. 흥미롭고 재미있는 글이였습니다. 기호형도 대단하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