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오용석은 1990년대 중반 한국에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막 시작될 무렵, 영화미디어를 통해 퀴어 문화활동을 한 경력이 있다. 2003년 무렵부터 오용석은 미술이라는 예술 미디어에서 향유의 지위를 문제삼는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소수적인 어떤 것, 심지어 역겨운 것이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화려한 색채의 그림으로 그려져, 지극히 미적이고 페티시적인 미디어가 된다. 이런 행위는 경계를 노출한다. 바로 소수적인 것을 재현할 때 제기되는 윤리성의 문제다. 오용석의 그림은 이것을 무대에 올려놓는 행위다.
이번에 열리는 그의 첫 번째 개인전 ‘Blow Up’에서 오용석은 미디어로 재현되고 소비되는 것을 채집해 그림으로 그렸다. 채집한 소재는 모두 실존했던 인물들인데, 죽은 뒤 미디어를 통해 우리에게 선정적인 이야깃거리가 돼온 이들이다.
게이 포르노 배우였지만 약물 과다로 사망한 조이 스테파노(Joey Stefano, 1968~94), 로스앤젤레스에서 입이 찢어진 채 발견된 연쇄 살인사건 피해자 엘리자베스 쇼츠(Elizabeth Shorts, 1924~47)가 그들이다.
오용석은 여기에다 남성 욕망에 대한 상징으로 많이 사용되는 목신(Faunus·동물을 수호하는 신)을 등장시킨 그림들을 그린다. 그것은 게이 코드를 가시화하거나 게이 코드 자체를 의문시하는 작업들이라 할 수 있다.
오용석이 그린 그림은 전시 제목처럼 ‘확대’돼 있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들(조이 스테파노, 엘리자베스 쇼츠, 목신)과 인터뷰를 한 것 같다고 한다. 그것은 그들이 모두 죽었거나 상징일 뿐이어서 애초부터 불가능한 인터뷰다. 아마도 이 같은 인터뷰는 마치 ‘확대된 이미지’를 소비하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미지도 향유해버리는 현대인의 게걸스런 습성 재현
조각난 쇼츠의 몸뚱이, 그녀의 사라진 장기들, 게이 포르노를 연상시키는 성기들, 그리고 그것이 미디어를 통해 지속적으로 소비되는 현상 자체 등.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것들을 언급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소비는 비윤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오용석의 그림에서 그런 비체(abject·비천한 대상)들은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오용석은 어떤 이미지라도 향유해버리거나 심지어 쾌락의 대상으로 삼는 현대인의 게걸스러운 습성을 재현함으로써 최소한의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것일까?
오용석의 작업들은 미디어 속에서 소비되는 이미지, 그것도 잔혹하고 불쾌하고 역겨운 비체들을 소비하는 행위에 대한 메타적인 시선을 담고 있다. 그것을 ‘페인팅이라는 행위로 구원하기’라고 부른다면, 작가는 오늘날의 예술이 해야 하는 어떤 임무를 느끼기 때문일까. 아니면 페인팅이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현대인의 페티시적 수집과 소비를 계속하는 것뿐일까. 6월23일까지, 갤러리 정미소. 02-743-5378
이병희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