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꼽아 기다린 퍼레이드에 못 나가게 됐다...
하필 내일 4시 반에 동생 녀석 예단이 들어온다는데,
집에서 그걸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나말고는 없어서... ㅜ.ㅜ
의사 소통의 문제인지 건망증의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암튼 난 그 얘기를 오늘 (처음) 듣고 기절하는 줄만 알았다...
사실 365일이 일반들을 위한 거라면,
퍼레이드하는 날만큼은 1년 중 유일하게 우리 이반들을 위한 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퍼레이드랑 퀴어 문화 축제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겠고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365일을 '이반의 날'처럼 꾸미고 살아갈 수도 있지만,
나처럼 쓸데없이(!) 자의식 강한 인간한테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과정이 힘들었고 시간도 오래 걸린 만큼,
자신을 긍정하고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나 계기라면 뭐든지 소중하고 놓칠 수 없으니까...
(보수적인데다 이 바닥만큼 좁고 소문 빠른 내 분야에서 아웃팅되면
아예 취직조차 못할 수도 있고, 그래서 퍼레이드는 늘 위험 부담이 있지만,
그래도 이 날만큼은 나같은 사람도 엄연히 이 세상의 일부라는 걸 드러내고 싶다...!)
이런 소리하면 호로 자식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먹겠지만...
솔직히 동생네 결혼 준비 지켜보면서,
식구로서는 기쁘고 축하하는 마음이지만
이반으로서는 내가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내가 장가가는 게 아니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들러리일 수밖에 없지만,
어차피 결혼이라는 게 이성애주의의 시작이고 끝인데다가
내가 하다못해 그 비스무리한 제도의 혜택을 입는 것도 아니니까
심지어 낯설고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
더 근본적으로는 요새 계속 마음이 은근히 불편해서 이러는 거겠지...
유독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가족주의, 정확히는 가족 이기주의 때문에.
제사 지내는 집안도 아닌데 명색이 장손인데다 엄마가 과부이다보니
요새 나보고 호주니 세대주니 하는 게 정말 부담스럽다... -_-; (호주제 폐지되지 않았나?)
어차피 가족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피붙이라고 해서 늘 모든 걸 받아들이고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일반 놀이'로도 부족해서 '가장 놀이'까지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결혼이라는 이성애주의적이고 가족주의적인 행사 탓에
내가 정작 '나를 위한 행사', '나를 위한 날'에는 제대로 참여하지도 못할 뿐더러
그런 일이 있다는 사실조차 말 못하고 거짓말만 늘어가야 한다는 게 억울하고 슬프다...
나한테는 이반 친구, 일반 친구 모두 내가 선택한 만큼
피붙이 못지 않게 평생 보고 싶고 절실하게 필요한 '가족'이라는 사실도
정작 '진짜 가족'한테는 이해시키기는커녕 입 밖에 꺼내지 못한다는 것도 답답한 노릇이고...
(이럴 때는 내가 지보이스 연습 등등으로 쌩까다시피 해도
내 사정 아니까 '준비 열심히 해서 공연 잘하라'고 이해하고 응원해주는
일반 친구들이 식구들보다 훨씬 낫다... --;)
역시나 돌 맞을 소리겠지만,
난 어차피 '효도'라는 것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본다.
부모 병 고치려고 자기 허벅지살 베어 먹이거나
아비 눈 뜨게 하려고 자기 몸 팔아서 인당수에 풍덩하는 식의 옛날 '미담' 보면
인신 매매, 자살, 식인을 부추기는 것같아서
감동하기는커녕 도무지 경악을 금치 못하겠고...! (내가 너무 삐딱한가? ==;)
물론 고생해서 자기를 낳고 키워준 사람들한테
정을 느끼고 고마워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고,
나도--주로 연민 때문에--부모한테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다.
누구한테 사심 없이 잘해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니까
그게 꼭 결혼이랑 출산으로 이어질 필요도 없다고 보고.
어차피 결혼이 모든 사람의 삶의 목표일 수도 없는데다
'행복 보험'도 아니라는 건 한국에서도 입증된 지 꽤 됐으니까...
하지만 '효도'를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강요하는 건 일종의 폭력 아닐까...
더구나 신문 보면 알 수 있듯 세상에는 '부모같지 않은 부모'도 수두룩한데,
과연 자기가 정자나 난자를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엄연히 다른 개체의 생각이나 행동의 자유를 통제하고
인형 놀이하듯 재단하고 끼워 맞출 권리가 있을까...
(그래... 나 어떤 면에선 엄청 과격하다...! --^)
객쩍은 소리만 잔뜩 늘어놨지만,
암튼 그나마 예쁜 가족 대회는 참여할 수 있으니까,
그것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예단 받고 다시 청계천으로 가야겠네...
에휴, 내 팔자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