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는 오래도록 누군가의 얼굴을 생각했다. 볼 때마다 나를 휘청거리게 했던, 휘청거리게 하는 얼굴. 내 가슴팍이 덜 굳은 석고판이 될 수 있다면 깊이 찍어서 남기고 싶은 얼굴. 무릎에 힘이 풀리지 않도록 조심, 조심. 그렇게 조심하다 보면 허둥거릴 수밖에 없었던 걸까. 나는 그 얼굴 앞에서 무엇을 해왔던 걸까. 그 얼굴을 생각하다 보면 생각이 깜빡, 깜빡.
2.
사람들이 조금만 덜 무례해지면 안 될까. 작정을 하고 무례하는 자들은 그나마 나은 사람들. 자신이 무례한 것이 아니냐고 예의를 차리며 무례하는 사람들과, 자신이 무례한지 전혀 모르고 무례한 사람들은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 그 사람들 앞에서 굳어버릴 내 얼굴.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3.
장마가 지나고 나니 자취집에는 온통 곰팡이 냄새다. 곰팡이들을 매일같이 잡아내서 살균세제가 묻은 걸레로 쓱싹쓱싹한 뒤 그나마 바람 통하는 곳에다 옮겨놓아도, 곰팡이들은 좁은 살림살이 구석구석에 숨어서 냄새 분자와 포자를 퍼뜨리고 있나 보다.
4.
어디다 그렇게 환한 얼굴들과 무례한 얼굴들을 담아놨는지. 아무리 쓱싹쓱싹해도 그 냄새 분자와 포자들이란.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 기형도, 「진눈깨비」
그래서, 내 '게이다' 도 작동을 멈췄다, 시인은 시를 썼다. 그리고 난 읽었다. 시는 시일뿐임을 가르친다, 자꾸 헷갈려 하는 내 '게이다' 에게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