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를 갈아신으며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브레히트처럼, 혹은 망명길에 알프스 산자락에 쓰러져 죽은 벤야민처럼 그렇게 고고한 척 살 수는 없겠지만, 훌쩍 어디론가 여행을 가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단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웅덩이처럼 고여버린 내 일상의 변함없는 잔물결들을 가만가만 들여다보면 저 역시 헌 구두 밑창을 갈고 구두끈을 질끈 조이고픈 그런 욕망. 훗, 지금 난 행여나 당신이 뒤에 남긴 미망의 흔적 때문에 심상이 어지러워져 있을까 당신을 위무하고 있는 겁니다.
열대의 밤은 여기보다 더 고적할 것 같아요. 난 당신에게 '고전' 한 묶음 들고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당신은 점잖게 나무랐지요.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어찌 톨스토이를 펴들고 앉아 있겠냐고. 당신 말이 맞아요. 그래도 열대의 밤, 바호밥나무 밑에 그리 길지 않을 당신의 여행담을 묻어놓고 오는 일 꼭 잊지 말기 바래요.
아프리카 와인 술이 그렇게 유명하다고 하더이다. 한때 그곳에서 금기의 술이었던 전통주인 야자와인, 한국에 다시 돌아올 때 꼭 가져오기 바랍니다. 난 당신에게, 이곳 환락의 게이 커뮤니티를 잊지 않도록 종종 선물을 보내드리지요.
열대로 떠나기 전 날, 지금 여긴 잿빛의 눈발이 뜨덤뜨덤 나립니다. 블랙 오르페우스를 듣고 있어요. 눈물의 주책이 과잉된 요즘의 난, 당신을 송별하지 않는 게 나을 듯해요.
2004-01-13
지난 번엔 겨울이었는데, 이번엔 여름이네요. 팬티를 빨아서 선풍기 바람에 말리고 있는 중. 저번처럼 청승맞지 않아서 좋은 것 같아요. 여행 잘 다녀와요. 즐쳐드셈.
내가 춤샘을 만난 건 97년 7월이었다. 친구사이를 처음 들어갔을 때, 난 찢어진 청바지와 모자 컨셉이었고, 갓 찢어낸 귀에 귀고리를 한 탓에 귀밑으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순전히, 그 구질구질한 뚝섬 지하 사무실을 단번에 불 밝힌 내 미모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날 춤샘과 천 형은 미소 짓는 위장된 얼굴로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이 넘의 잉끼 탓인지 모진 정 탓인지 지금껏 그 뇬들이랑 함께 늙어가고 있다.
감히 단언하자면, 친구사이에서의 일 욕심을 자극하거나 내 시답잖은 상상력에 대고 풀무질을 하는 몇 안 된 사람 중에 춤샘은 단연 돋보였다. 이유가 뭘까? 품성? 미모? 돈? 미안하지만 이쁘거나 돈이 많거나 순정파가 아닌 그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 고 자그만 체구 속엔 오버를 오버로 반성하게 할 만큼 고요한 열정이 뿌리 깊게 천착되어 있다. 나처럼 말만 내세우는 족속들이나, 사랑이 아니면 접시에 고인 눈물의 웅덩이 속에 코 쳐박고 죽어도 모를 수많은 캔디 게이들이나, 악세사리 여피 호모들이랑은 뭔가 달라도 다른. 왕수다쟁이인 내가 가지지 못한 어떤 것.
약간의 불만이라면 이렇게 객지에 나돌아댕기는 거다. 내 B급 다혈질은 사실 그의 최근 몇 년간의 역마살의 이유가 자못 불만스럽다. 원컨대, 이번 여행이 마지막이 되기를 바란다. 그의 부재는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손해이자 억울함이다.
언니 뇬아, 올해는 우리 울지 좀 말자. 떠나는 기념으로 음악 한 곡 귀에 발라줄께. 인민해방음악(PLM) 버젼의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머리 나쁜 언니지만 굳이 이 노랠 들려주는 이유를 알 거야. 춤곡으로 편곡해서 내년에 찍을 영화에 사용하고 싶어. 너 돌아올 때쯤에 이 곡 편곡하고 있으면 좋겠다. 부디 이번에 돌아올 땐 한 손에 야자와인, 다른 한 손엔 뷰리풀한 흑인 게이 서넛 손 잡고 오길 바래.
글구 내 역마살에 대한 오버...
사람은 누구나 또 항상 무엇으로부터 도피하면서 살고 있는 건데,
기를 써서 분석하고 맘에 드는 이유를 붙이려는 버릇은 고쳐얀다.
(아무튼 쓴소리도 해주고 맘 써줘서 고맙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