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이런 친구가 생길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데, 늘 나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주는 친구를 만났다.
서로에 대해 신뢰를 갖기 전, 우리 대화는 정치 사회에 대한 이야기, 게이에 대한 이야기, 친구사이와 지_보이스에서 활동하는 이야기 등 늘 다양했다.
친구는 이성애자이면서도 나보다 더 훨씬 퀴어적이고 소수자 감성이 풍부하고 예민하다.
더불어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가끔은 기독교의 반응 때문에 격렬하게 싸우기도 했다.
7~8 년 동안 세월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묻지 않은 채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다.
그 사이 사랑하는 후배의 죽음도 있었고, 아버지의 임종도 있었고, 뜻하지 않게 직업적인 사고들도 있었다.
친구도 직업적인 사고들과 아버지의 임종, 그리고 직장 안에서 복잡한 역학관계로 괴로움을 달고 살아 왔던 것 같다.
며칠 전 친구와 술자리에서, 시시콜콜한 가정사부터, 부당한 직장에서 대우, 사람관계의 어려움, 한국 정치에 대한 분노, 각자 삶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 등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문득 느껴지는 사실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바뀌지 않는 사회와 사람들을 보며, ‘예의없음’ 과 ‘비인간적인’ 것들에 대해서 참 오랫동안
분노를 토해내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머리칼에 흰머리와 얼굴 주름, 술 배가 통통하게 나오는 줄은 미처 알아채지도 못했다.
분노와 위로 사이에서 무엇인가를 붙잡기 위해서 경계만 했을 뿐, 정작 삶이 우리에게 요구한 변화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각자 욕심을 내려놓겠노라 고백을 하였다.
그러나 결코 가볍고 희망차기보다 좀 무거웠고 외로움의 한 가운데에서 나오는 고백이었다.
친구가 삶에서 선택하는 결정들을 “ 그것이 너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는 결정이냐” 며 나는 늘 상담가처럼 군다.
“사랑”에 대한 얄팍한 나의 깨달음에 대해서 조용히 듣다가 친구는 질문을 던진다.
한 뼘도 적시지 못하는 깊이를 가진 내 영혼을 금방 들키고 만다.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친구에게 예전에 지_보이스 정기공연에서 불렀던 “울게 하소서” 란 곡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며 횡성수설 말했다.
지난 주말은 마음연결 활동 때문에 정기모임은 뒤로하고 긴급출동을 했다.
응급실 보호자 대기석에서 밤은 지치고 힘들었다.
밤 새 열심이었던 디오, 가람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이제 돌아본다.
사랑에 대해서 떠벌이지도 않고 온전히 사랑을 행하고 있는 그이들이 참 아름다워 보인다.
“울게 하소서” 란 곡의 의미를 느끼고 있다는 얄팍한 나의 마음이 또 들키고 만다.
언제쯤 온전하게 같이 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말이다.
“ 깊은 밤에 홀로 깨어 울고 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 질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가 여전히 내 주변을 맴돌고 있다.
어째서 나는 그이와 온전히 울 수 없는지 고민하다가 외롭다고 느꼈다.
이 모든 것이 사랑에서 시작되었으니 이 모든 선택들 또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다짐들 속에
나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길이 무엇인지 누군가 내게 답을 묻고 있다.
나는 여전히 답을 발견하지 못하고 외로웠다.
재경이 형님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국회의원, 대통령에 도전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저는 성적 소수자의 인권 향상을 위해서는 우리쪽 정치인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일단 인지도를 쌓는게 중요할 것 같은데 재경이 형님이 얼굴과 이름을 많이 알려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재경이 형님은 의사라서 학벌도 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