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슬픔과 기쁨> Review [by Rego]
어떤 사회나 국가에서도 차별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런 차별을 묵시하거나 정당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이나 사회 현상을 단지 기술하는 데 있어 어떤 곳이든 어떠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회와 국가의 척도는 차별의 정도가 아니라 그 차별을 어떻게 해소하고, 해결해나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 차별이 존재하기에 이를 해결해야 되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
차별은 일반적으로 쌍방이 존재한다. 마르크스 식으로 얘기하자면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 간의 계급 갈등이 그것이고, 홉스 식으로 얘기하자면 힘이 있는 자와 힘이 없는 자 간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그렇다. 쌍용자동차의 사태도 차별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노사는 협상 테이블에 앉아 서로의 주장과 의견이 대립되는 상황을 목격했다. 사측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노측은 어떻게든 협상을 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그들이 찾은 방법은 '투쟁'이었다. 차별은 가지지 못한 자의 분개와 투쟁을 유인한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기 마련이다. 이 둘 간의 차별은 공정하지 못했고, 정당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 노력을 해야 하고, 그 노력 속에 이와 같은 참혹한 사태를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든 힘이 없는 자가 피해자가 되는 것이 현실의 냉혹함이다. 우리는 피해자의 아픔과 슬픔에 더 공감하게 된다. 누구나 현실에 맞서 싸워야 하는 '투쟁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더 그 현실에 감정 이입을 할게 될 때면, 우리의 마음은 더 아픈 곳, 더 슬픈 곳에 놓이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가진 자의 사측보다는 가지지 못한 노측에 더 다가가 있다. 쌍용자동차의 사태에서 슬픔은 사측보다는 노측이 더 깊을 수밖에 없다. 이를 우리는 '가지지 못한 자의 서러움'이라고 표현하지 않는가.
<그의 슬픔과 기쁨>이라는 책도 이 방향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가슴은 따뜻하고 머리는 차갑게 기술해야 되는 것이 저널리스트의 사명이더라도 쌍용자동차의 사태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참혹함이었기 때문에 머리가 차갑기보단 가슴이 더 뜨거워지는 순간이 많았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노동자, 자동차의 몸을 헌신하고 싶은 노동자, 불공평한 정리해고에 분개한 노동자 등, 이들은 모두 사회 속의 우리 각자의 모습이다. 이 안타까움이 서려 있는 가운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지만, 협상 테이블에 앉아 이성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도 좀 더 차가운 두뇌 싸움을 해야한 하는 어쩔 수 없는 의무가 생기게 된다.
쌍용자동차의 사태 속에 우리가 좀 더 다가가야 할 부분은 바로 '공정성'이다. 노사간의 협상테이블은 공정하지 않았다. 다수의 횡포, 가진 자의 강요가 있었고 가지지 못한 자의 피해와 어쩔 수 없는 마지 노선에서의 투쟁이 그 반증이다. 더 나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노사간의 갈등이 항상 같은 패턴과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IMF 경제위기의 구조조정에서도 그랬으며, 기업에 위기가 생겼을 때마다 그래왔다. 그리고 쌍용자동차에서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공정성'은 없어왔다. 노사간의 갈등 속에 힘의 균형을 위해 가지지 못한 자의 편에 선 사람들은 누구인가? 법도 아니었고, 공권력도 아니었으며, 정부도, 언론도 아니었다. 물론 사측도 그렇지 않았다. 언론은 침묵했고, 공권력은 그들의 투쟁을 진압만을 목표로 했다.
없는 자들의 슬픔과 아픔, 안타까움을 더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필자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슬픔에 동조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고 생각한다. 이보다 이 책을 통해 더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이 사태를 묵시하는 태도가 아니라 문제의 발단을 찾고, 왜 하필 노동자들이 투쟁의 마지노선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핵심 원인을 더 차갑고 냉정해서 바라보는 이성이다. 이를 통해 조심스럽게 필자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사회는 '공정성 없는 힘의 불균형 사회'라는 것이다. 공정성이 없기에 우리의 사회가 더 아프고 슬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