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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은둔 사이의 터울 #7 : 여성스러움의 낙인
2017-03-24 오후 13: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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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3월 

은둔 사이의 터울 #7

: 여성스러움의 낙인

 

 

1.

 

종태원을 나오고 나면, 은둔 시절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내 처지가 바뀌었거나, 시간이 너무 오래되었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까먹고 싶었거나, 굳이 들추기 싫은 과거로 그것들 모두를 밀어두고는, 밀어두었다는 것도 잊은 채 머릿속을 까맣게 비워버리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독 잘 안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무슨 영문일까.

 

적지 않은 게이들은 학창 시절 급우들에게 여성스럽단 이유로 놀림받는다. '호모'니, '김마담'이니 하며 난생 처음 들어보는 호칭들이 귓전을 따갑게 메울 때, 혹은 양친이나 친지들이 남자답지 못한 행실을 지적하며 고칠 것을 주문할 때, 그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감정에 휩싸였을까.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봐도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는다. 마치 여러번 덧발린 검은 방 가운데 혼자 서 있는 기분이랄까. 혹은 그런 기억이 애초부터 아예 없었던 듯도 하다.

 

가령 어떤 사내아이가 여성스럽다고 놀림받을 때, 그 때 그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사람이면 누구나 놀림받는 것을 싫어한다. 놀림받지 않으려면 여성스럽기를 그만두면 될 텐데. 어떻게 하면 여성스럽지 않게 될 수 있을까. 또래보다 살짝 높은 목소리 톤을 낮추면 되나. 아니면 컵을 들 때 살포시 올라가는 새끼손가락을 붙잡아두면 되나. 혹은 무언가에 놀랐을 때 나도 모르게 터지는 '어머나'란 감탄사를 다른 말로 바꾸면 될까. 단속해야 할 몸가짐의 수는 금세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그런 여성스러움들은 내가 아무리 의식하고 막아본다 한들 미처 통제하지 못한 순간순간마다 불쑥 튀어나온다는 데 있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보여지는 모습 전부를 통제할 수 있을까. 사내아이는 훗날 기억하지 못할 낙담과 실의에 빠진다. 어느날 그 사내아이는 꿈을 꾸었는데, 빨간 땡땡이 무늬의 원피스를 입은 채 시내 한복판에 덩그러니 방치되는 꿈이었다. 그는 자신의 차림을 알아차리곤 골목 안에 숨었다가, 혹여나 나를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두려워 재빨리 골목에서 골목으로 몸을 숨기며 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집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어, 채 몇 블록을 넘기도 전에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깬다. 잠에서 깬 아이는 제 안에 아직 채 들키지 않은 여성스러움을 움켜쥐고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남자답게 보이고 싶단 욕망을 끝내 포기 못한 사내아이에겐 주로 두 가지 선택항이 있다. 첫째는 그것이 끝내 불가능하리란 걸 알면서도, 어쨌든 최대한 여성스럽게 보일 부분들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여성스러워 보일 부분은 앞서 말했듯 악무한에 가까우므로, 그것 모두를 통제하겠단 강박은 쉽게 위악으로 번진다. 또는 다음의 두번째 방법도 있는데, 나를 꼬투리잡는 이들이 되레 면구스러울 수 있도록, 자신의 머릿속에서 스스로가 '여성스러울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여성스러워 보일 외양 모두를 지울 수 없다면, 그것을 인지하고 해석할 여지를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다. 가령 누군가가 내 행실을 보고 수군댈지언정, 최소한 나는 그 '여성스러움'을 의도하진 않은 것이 되고, 그러므로 나는 결백하다. 왜냐하면 나는 애초에 '여성스러움'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니까. 그런 걸 생각조차 못해본 사람이니까.

 

그렇게 살아온 게이가 파트너를 만날 때가 되면 자연히 '일틱'한 사람을 찾게 되고, 당연히 본인도 '일틱'해보이기를 원하게 된다. 물론 그런 바람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날 나는 게이 앱으로 땍땍한 사진과 번개하기로 했는데, 약속장소에 나온 그는 짐짓 뽀얀 살결을 지닌 오밀조밀한 친구였던 것이다. 사람이 보통 실망하거나 당황할 때는 미처 통제하지 못한 자신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는 그에게 한껏 기갈진 말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되게 여성스러우시네요."

 

-

 

여성스럽다는 게 뭘까. '여성스러움'은 과연 실체가 있는 개념인 걸까. 그리도 수없이 들어오고 써온 말인데, 돌이켜보면 그 속뜻은 모호하기만 하다. 그래도 이것 하나는 분명한데, '호모'라 놀림받아본 사내아이에게 자신이 '여성스러워 보일 수 있다'는 것은 곧, 나쁘고 불길하며 냄새를 풍기고 이야깃거리가 되고, 흘끔거리는 시선을 받고 여차하면 자신을 헤집힐 수도 있는 것이며, 따라서 아무쪼록 내 것이 아니어야만 하는 무엇이다. 쉽지 않은 유년을 지낸 적지 않은 게이들은, '여성스러움'이 뭔지는 잘 몰라도, 자신이 '여성스러워 보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너무 잘 아는 나머지, 그것을 정말로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 수 있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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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90년대 초반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태동할 당시, 인권운동단체들은 "동성연애"와 "동성애"라는 말을 서로 분리해 사용하였다. 가령 "동성연애"의 경우, 당시 언론에서 동성간의 성행위를 주로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동성애"는 성행위를 비롯해 두 사람이 갖는 감정적 유대와 친교, 나아가 그 관계의 사회적 인정까지를 겨눈 말로 사용되었다. 이는 동성애자의 삶을 '섹스'로만 협착시키는 것이 부당하며, 동성애자 또한 여느 인간과 같이 다양한 삶의 국면을 지닌다는 의도가 깔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성애자와 구별되는 동성애자의 '섹스'를 말하는 것 역시 중요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동성애자의 섹슈얼리티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낼지가 당시의 논점이었다. 가령 노골적인 성애를 드러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혹은 찜방 등 게이 업소에 대해 '인권운동'이 어떤 정견을 가져야 할지에 대해서는, 당대 동성애자 인권운동과 동성애자 커뮤니티 안에서 서로 의견이 분분했다.

 

그 중에 게이업소정보지를 표방한 『보릿자루』는, 인권운동의 이름으로 동성 성애를 드러내고 게이 업소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이러한 노선에 반대하는 게이들 또한 많았는데, 이러한 입장을 반영한 독자의견이 같은 잡지에 실려 주목된다. "오늘을 사는 동성애자"라고 밝힌 이 필자는, 『보릿자루』가 국내외의 게이 "싸우나" 정보나 "엽기적이고 변태적인 누드사진"을 게재하는 것을 두고, 이는 "변태적 성도착증"이며, 이런 것을 옹호하는 이는 "결코 이반이 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한편 이 필자는 "게이"의 핵심적인 속성이 '남성성'임을 반복해서 강조하였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게이"란, "정신과 육체가 남성인 남성"이 "정신과 육체가 남성인 자를 사랑하는" 경우로 한정되었다. 따라서 이 정의에서 벗어나는 이들은 "온갖 종류의 변태적 성행동양식"으로 규정되었는데, 거기에는 "정신과 육체"가 "남성"이 아닌 것으로 파악되는 "트랜스", "오까마"가 포함되었고, 나아가 "SM", "페티쉬" 등도 지목되었다. 이들의 존재는 "진정한 동성애 인권운동"과 결단코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필자의 생각이었다.

 

편집상의 실수로 이 글은 "독자들의 한마디" 섹션에 두 번 중복되어 실렸으며, 글은 다음의 구절로 끝을 맺는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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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자들의 한마디」, 『보릿자루』 20, 2000.9.1., 82-83쪽, 터울, 「1990년대 말 이반업소정보지 『보릿자루』를 통해 본 게이커뮤니티의 형성 - 기혼이반 논쟁과 섹슈얼리티 검열을 중심으로」, 『퀴어인문잡지 삐라』 3, 2016, 40-43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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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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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 2017-03-27 오후 17:53

아무쪼록 내것이 아니어야 하는 그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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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_233987 2017-03-27 오후 22:44

그 언제나 아침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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