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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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간 웃으며 떠들어 대긴했지만,
맘 속은 시뻘겋게 달궈진 연탄 집게가 마구 헤집고 지나간 것처럼
온통 상처 투성이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도, 내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어떠한 해답도 결정 내지지지 않은 채 자꾸 내 주변을 멤돌며
방심하는 순간순간 쨉을 날리는 가운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난 멍투성이에 지쳐 쓰러져 있었다.

내 평생 내 자신이 가장 혐오스러웠던 오늘 새벽.

집에 가는 길이었다.
프렌즈에서 술을 마시다가 견딜수 없는 그 무언가에
기분이 상해서 아무말 없이 슬그머니 도망쳐 나왔다.

맘 속에 참아두던 말들을
홀로 길을 걸으며 내뱉으며 증발시키는 도중,

고급 승용차 차 한대가 내 곁을
슬그슬금 쫓아왔다.

대학로 가세요?
저두 대학로 가는데 타세요.

난 그 말이, 나의 뒤를 밟는 그 행동이 담고 있는 속뜻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무작정 차에 올라탔다.

담배 한대 피울래요?

담배 한대 피는게 문제가 아니었다,
빨리 어디로든 가서 섹스를 하던 딴걸 하던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고급 승용차는 이화 로타리에서 우회전을 한 뒤,
종묘 공원에 멈춰섰다.

수색 아세요?

수색역이요?

아니, 수색이요.

네, 알아요.

갈래요?

......

솔직히 가고 싶었다.
상대가 맘에 들어서가 아니라 무언가
내 자신의 위선을 무참히 뭉게 버리고 싶었다.

뭔가 내 자신에게 수치스럼고 환멸을 느낄
그런 일들을 하고 나면,
나 자신에 대한 믿음 혹은 기대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려
왠지 모를 해방감에, 자유로움에 훌훌 모든 것들을 털어 버리고
솔직하게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적하기 그지없는 종묘공원.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곤 허리띠를 풀렀다.

그가 선텐지를 해놨으니 밖에서 보이지 않을거라며
날 안심시켰다.

안과 밖이 다른 세상.
흡사 겉모습과 속이 다른 내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에
조금 서글펐다.

그리고...

오랄 섹스.
수줍은 척 오랄 섹스를 했다.
아주 잠깐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속을 마구 파헤치고 있었다.

카세트 테크에서 흘러 나오는 트롯트 노래가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울렁거렸다.

수색 갈래요?
가서 잠자고 낮에는 맛있는거 먹어요.

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차는 수색역을 향하고 있었다.

종로를 지날 무렵,
우습게도 정말 우습게도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결국 내 자신은 도덕적 잣대에서
자유로와 질 수 없었다.

그리고 차가 막 종로를 다 통과했을 때
차마...말할 수 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이건 아니야.
후회할 짓은 하지말자.

내 자신이 참 우스웠다.
껄껄거리며 한바탕 크게 웃고 싶었는데,
왠지 펑펑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저기, 죄송한데요...차 세워 주세요.
정말 죄송한데요. 정말로.

차는 종로를 다시 돌아 내가 처음 올라탔던
그 자리에 멈췄다.

내가 맘에 안드나요?

아뇨, 죄송해요. 정말로.

그가 지갑에서 꺼내어 택시비를 주겠다는 것을
극구 사양한 채 차에서 내렸다.

솔직히 어디로 가야 될지 막막했다.
눈앞이 컴컴하고 아무것도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멍하게 서있고 난 뒤 얼마 후...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대학로요.

황급히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 기사와 앞에 앉아있던 손님은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내가 내릴 때까지 서로 웃으면서 대화를 주고 받았다.

다 왔는데요?

미터기를 보니 합승이라 얼마를 내야할지 몰랐다.

얼마..내야하죠?

그냥 주고 싶은대로 주세요.

난 슬쩍 2천원을 꺼내어 택시 기사에게 건냈다.

음..2천원 넘는데...

저기..그럼 더 드릴까요?

하하하. 농담이에요.

택시 기사의 말장난에 화가 나긴 보단 되려 무언가 위안이 되었다.

그냥 난 "고맙습니다."라는 말과 동시에 택시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작스레 터져나온 앞좌석에 타고 있던 손님의 한마디.
그리고 지금와서 왠 새해 복이라며 껄껄거리며 어디론가 떠나가는 택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황급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봄 날씨라고 얇게 입고 나왔는데,
왠지 모를 쌀쌀함이 느껴져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명함 한장.
아까 승용차의 남자가 건네준 작은 명함 한장.

난 그것을 조각조각 찢어 길거리에 버렸다.

순간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났다.
역겨울 정도로 비릿한 냄새.

내 자신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그 악취같은 비릿내.

집에 들어서자 마자
화장실에 들어가 이빨을 벅벅 닦았다.

닦고 또 닦고 계속해서 닦았다.

그 비릿내는 닦아도 닦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며칠간 집을 비워논 탓인지,
방바닥에 고양이 똥이 말라 비틀어져 얼룩이 져 있었다.

걸레를 집어 들고
힘주어 닦는데 잘 지워지지가 않았다.

수세미를 가지고 계속적으로 문지르며 닦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너무나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별다른 이유도, 아무것도 없는데 너무 서러웠다.

한참을 청승을 떨고 나니,
비릿한 냄새가 조금씩 조금씩 걷어지는 듯했다.
아주 다는 아니지만 점차적으로.

그냥 넋나간 사람처럼 앉아서,
"이젠 무얼해야할까?" 곰곰히 생각하는데,

문득 희일이 형 영화 속 대사가 떠올랐다.

지금 신파 찍어요?







....뭔가를 부셔 버리고 싶다.
내 안에 가득한 헛된 욕망과 헛된 기대들을.

젊음이라고 불리어지는 핑계 거리를
한큐에 날려 버리고 싶다.

어서 빨리 이 남루하고, 비릿내나는 청춘에서
탈출하고 싶다.

도망치려 해도 자꾸 도망치려 해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 서있는 내 자신이 너무 싫다.

나이가 들면 이 비릿한 냄새가 그리워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순간만큼은 다 털어내버리고 싶다.





모던보이 2004-02-21 오후 12:36

'쿨한 것'이 종용되는 지금의 사회에서 신파는 궁휼의 원죄.

환타스틱 소녀의 글 중에서 두 번째로 가장 좋은 글이네. 첫 번째는 철창 밖 눈을 집으려던 손의 움직임에 관한 예전 글. 새벽에 지울까봐, 이미 복사해서 다른 곳에 붙여놓았어. 혹시 협박용으로 가치가 있을까봐. ^^

말라 비틀어진 고양이 똥을 수세미로 문지르며 눈물 뚝뚝.... 이미 준문이 첫 번째 영화의 시나리오는 나온 듯도 하네.

damaged..? 2004-02-21 오후 15:38

유구무언이네요... 하지만 아무리 남루하고 비릿하더라도 청춘은 한때인 법. 서서히 지나가는 걸 보는 게 마냥 다행스럽고 기쁜 노릇은 아니더군요. '게이'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도덕은 분명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님이든 승용차의 그 분이든, 누가 누구한테 돌 던지겠습니까. 다 '사람'이라 그런 것을. 그러니--님을 괴롭히는 일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만--너무 자책하지 마시길...

라이카 2004-02-21 오후 20:55

무엇때문에 그렇게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는지..
안타깝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매일 보는 형으로써 너의 맘이 그렇게나 멍들어 있었다는 걸 몰랐다니 뭐라 할 말이 없구나. 미안하다.
비린내든 뭐든 냄새가 있는 청춘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힘내라.

2004-02-22 오전 00:12

요즘 날씨가 너무 좋더라.
오늘은 보슬보슬 비도 오고 말이야.
제주도에는 이른 유채꽃이 폈다고 하더라.
서울에도 곧 봄이 올테지.
난 벌써 봄바람이 들어 가슴이 자꾸만 부풀어 오르고 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남루하고 비릿내 나던 그 때도 내 속에서는 어떤 변화가 꿈틀거렸던 것 같다.
이런날은 기름내나는 해물파전에 동동주가 최고다.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