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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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보이 2004-08-31 17: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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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인가에 쓴 글입니다. 엄마랑 전화 통화하다 배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 글이 생각났어요. 다시 읽어봐도 재미가 있군요.

* 여기서 이송자일은 제 별명.


맨날 가을만 되면 자정쯤 깊은 어둠 속을 후레쉬를 들고 헤매는 몽유병자 같은 엄마의 시름. 그 시름의 주범은 달팽이다. 맛난 가을철 배추를 갉아먹기 위해 이슬 내리는 밤에만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달팽이와 후레쉬를 들고 놈들을 추적하는 엄마와의 전쟁.

한때 이송자일과 그의 엄마는 달콤한 복수를 위해 바가지 한가득 잡은 달팽이를 고통을 주며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느라 아침 내내 서로 싸운 적도 있다.

1. 엄마, 소금을 뿌려서 죽입시다.
2. 소금 뿌려봤는데 소용 없잖아, 임마. 차라리 농약을 뿌리자.
3. 젓갈처럼 소금에 버무려도, 살충제로 목욕을 시켜도 니네들 뭐하니 하는 투로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달팽이들. 그래서 이송자일과 그의 엄마는 차라리 끓여 버리자, 라는 주장에 머리를 끄덕였다.

놈들은 끓여야 죽을 수 있는 막강한 생존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놈들을 죽일 수 있는 농약은 한국에 없다. 일본제 농약이 하나 있긴 있는데, 한 줌에 3만원 이상 웃도는 고가의 제품인지라 배추밭에 득시글거리는 놈들에 대항하기 위해선 배추를 다 팔아도 모자라는 엄청난 돈이 요구된다.

올해도 어김없이 달팽이 때문에 엄마의 밤나들이가 시작되었다. 해서 엄마의 전쟁를 돕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다시 정독하고 달팽이에 관한 모든 생리학적 자료들을 방 곳곳에 비치해놓고, 놈들을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느라 골머리를 앓은 착한 아들 이송자일.

이송자일이 밝혀낸 것은 다음과 같다.

1. 달팽이가 갑자기 농촌에 범람하기 시작한 것은 생태환경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먹이 사슬이 고리가 끊어지거나 약해져서, 집 없는 민달팽이의 갑작스런 출현이 가능해졌다. 두더지나 메뚜기떼의 재출현과도 같은 현상이다.

2. 갖은 농약에 의해 민달팽이의 면역과 번식력에 이상이 생겼다. 놈들은 왠만한 농약에도 죽지 않을 뿐더러, 이 튼튼한 면역력에 기초해서 왕성한 번식이 지속되고 있다.

3. 농촌 재배 작물의 상업화 현상과 관련이 있다. 배추는 민달팽이가 좋아하는 식물인데, 가을철만 되면 농촌 밭에는 거의 배추가 심어진다. 예전에 상업화가 덜 되어 있을 때, 사람들은 배추 말고도 다양한 작물을 재배했었다. 작물의 상업화는 농사를 짓지 않는 도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더욱 촉진되는 경향이 있다. 가을철 배추 일색의 작물화가 민달팽이의 번식을 촉진하게 된 것이다.

4. 커피.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커피의 카페인은 달팽이에겐 신경독이다. 달팽이의 몸에 커피가 닿으면 신경을 마비시키고 죽게 만든다. 이 귀한 정보를 보석처럼 캐낸 이송자일은 엄마에게 배추밭에 커피를 뿌려보자고 제안했다.

엄마 : 얼마쯤이 좋을까?
이송자일 : 커피 반절을 농약통에다 물하고 타서 뿌려봐. 희진이나 상원이한테 뿌리라고 그래.
엄마 : 될까 모르겠다.

지금에와서 생각해보면, 양이 적지 않았나 싶다. 그 넓은 밭에 커피 반절을 녹여 뿌린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이송자일의 커피 농약 이론에 낭패를 당한 엄마는 다시는 이송자일의 말을 믿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다. 게다가 한술 더 떠, 그 옛날 처음으로 엄마와 이송자일이 시골집 마루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날의 악몽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당신으로선 커피에 대한 맹신 한 가지를 간직하고 있는 터였다.

호기심에 들 떠,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당시 세간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생전 처음 커피를 놋그릇에 타서 이송자일과 엄마는 독배를 마시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려가며, 설탕을 더 넣어야 되지 않겠냐는 말을 연속하며 그렇게 시음을 한 적이 있었다. 나이 어린 여동생들은 '나이 어린 애는 커피 먹으면 안 된대'라는 이송자일의 강력한 협박에 의해 옆에서 침만 꿀꺽였다. 그 날 밤, 이송자일의 엄마는 말똥말똥 뜬 눈을 감았다떴다를 반복하며 이송자일의 발을 툭툭 차면서 '야, 넌 잠 오냐?' 소리를 연방 터뜨렸었다.

그렇게 커피에 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엄마는 이송자일의 커피 이론을 비웃기 시작했다. 1시간 전 통화에 대고 말씀하시길,

"야, 죽긴 뭐가 죽어! 걔네들 커피 마셔가지고, 잠도 안 자고 돌아다니면서 더 먹어치우고 있더라."

개망신를 당한 이송자일, 아, 과연 커피 이론은 실패한 가설이란 말인가!


이 글에 달린 제 막내 여동생의 리플

가을만 되면 밤마다, 배추위에서 달팽이들의 축제가 벌어집니다.
그럼, 우리 어머니는 후래시를 비추며 배추잎 위 득실거리는 달팽이들을 한 소쿠리 가득 채웁니다. 며칠전, 이런 어머니의 가을 맞이 걱정을 액션가면이나 된 것처럼 우리 오빠가 해결해준답시고 장담하더군요

우리 오빠의 허무맹랑한 이론~~~~~~

1. 달팽이는 커피를 무지하게 싫어하므로 농약통에 커피와 물을 뿌려 분사시키면 달팽이들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추신: "엄마, 효과가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엄마만 알고 있어")

다음 날 밤 엄마는 확인하기 위해 밭으로 갔지요
달팽이들이 없어졌기를 기대하면서........
그런데,,,,,,,
달팽이가 없어지기는 커녕,,ㅠㅠ....카페인을 마신 이것들은 잠도 안자고 더 많은 배추잎을
갉아먹었던 것이었습니다...

- " 오빠야~~~
못생긴게 잘난체 하기는~~~~


모던보이 2004-08-31 오후 17:09

벌써, 반팔이 추운 새벽이 아침이 와버렸어요. 방금 전 녹초가 된 몸으로, 집으로 꾸역꾸역 들어왔지요. 많은 일들을 제 일 때문에 뒤로 미뤄놓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 뿐.

성큼 가을이 와버린 듯한 아침에...

차돌바우 2004-09-01 오전 00:49

원두커피를 썼어야쥐~~~!!

기즈베 2004-09-01 오전 03:33

호홍 언냐~~
말 많은게 똑똑한척 하기는~~
호홍..^^

파트라슈 2004-09-01 오전 05:06

호홍 언니들...
이쁜척 하기는 ~
호홍... ^.*

모던보이 2004-09-01 오전 09:02

동생 뇬들아, 내가 요즘 바쁜 사이 상당히 버릇들이 안 좋아졌구나.
복귀하는 날, 니뇬들 목숨은 전당포에 아예 맡기는 게 좋을 듯.
우이,
호홍,. ^,.^

터치 2004-09-03 오전 00:08

커피공장가서 찌꺼기달라거 해보시죠
아니다그러다가 커피맛 배추 커피맛김치 될라 ㅋㅋ

소중한남자 2004-09-06 오전 08:59

달팽이 엑기스를 만들던가요...ㅡ,ㅡ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