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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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감성 2005-02-03 20:5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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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있으면 설이다. 설을 “민족의 명절”이라고 하던가? “민족”이라는 혈연주의적 공동체 속에 동성애는 없거나 있을 수 없는 짓이다. 동성애는 자식을 생산할 수 없는 성행위이거나 혹은 성행위조차 아니다. 여성동성애자, 더구나 기혼이었던 여자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저들에게 여성은 기껏해야 남성의 성적 대상이자 모성이며 마지막까지 가부장제의 안녕을 위해 봉사해 줄 무보수의 가사 노동력일 뿐이다.

설을 닥치며 벌어질 두 자녀와 전 남편, 전 남편의 형제들, 내 형제들 및 부모들과의 버걱거림과 갈등과 정리들이 심란하다. 그러면서도 차라리 이번 기회에 정리할 것을 최대한 정리하자는 다짐을 한다.


설을 며칠 앞두고 마치 전초전처럼, 친정가족들의 모임이 있었다. 친정아버지의 생신 모임. 형제자매들에게 커밍아웃과 함께 이혼 추진과 가족과의 별거를 통고한 이후 처음으로 참석하게 되는 친정 모임이었다. 내키지 않는 자리였지만, 저들이 부른 이상 일단은 가기로 했다. 그들이 부른 의도와 내게 대한 태도도 확인해야 했고, 소위 “혈연”이라는 생물적 끈을 계속 드리워 놓아야 할지를 확인해야 했다.


내게 레즈비언이란 몸과 마음으로 여성을 사랑하는 것임과 동시에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이성애주의를 나의 삶을 통해 저항하는 것이며, 이 저항을 더 많은 레즈비언들과 함께 힘을 모아 더 넓게 나누는 것이다. 따라서 가족들의 모임에 참석한다는 것은 내겐 여차하면 저들의 견고한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이성애주의를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동조하는 행동일 수 있음을 변명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모임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을 근거를 그들과 내 앞에 확인시키고 확인하기 위하여, 그리고 커밍아웃한 여성동성애자가 부딪쳐야 할 가부장적 가족주의의 구체적 일상 속에서의 몸과 마음의 부대낌을 확인하기 위하여, 이번 모임에는 가기로 했다.


이는 저들에 대한 아직 끊어내지 못한 나의 배려다. 유일한 이유는 ‘늙은’ 부모다. 일흔 셋과 일흔 일곱의 부모는 아직 나의 동성애 정체성과 이혼 추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단지 늙었다는 것에 대한 안쓰러움만이 내가 부모에게 나의 정체성을 알리지 않고 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유일한 이유다. 따라서 부모의 혼란의 시기를 최대한 미루는 것 이외에 서로가 함께 하고 싶을 하등의 이유가 없음은 그들이나 내게 분명히 인식되고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그들의 안녕을 위하여 그들 편에서 먼저 나의 근황에 시비를 걸지는 않을 것이었다. 가능하면 짧은 시간만을 그들과 공유하길 원했다.


이미 버리고 떠나온 저들의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이성애주의는 실로 견고한 벽이었다. 더구나 소위 부자와 지식인들의 세련되고 내밀해서 더욱 탐욕스러운 물질적 풍요와 욕망까지… 알아들을 수 없거나 전혀 관심이 없거나 내겐 적용 불가능한 저들의 대화. 마음이 그렇다 보니 부모의 건강에 대한 염려조차도 내겐 망연하게 들릴 정도였다.


이미 자본주의를 상당히 거부하고 이제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이성애주의에 전선을 긋고 그 맞은편에 서서 싸워나가기로 한 이상, 나의 지난 가족 역시 내게는 맞은 편에 강고하게 버티고 있는 소위 ”저들”일 수밖에 없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예민한 사회적 분석과 차가운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다.


오고 가는 돈과 돈 이야기들(주로 주식 이야기와 수입과 세금 이야기)에, 튕겨 나오고 싶은 지루함과 존재의 이물감을 느꼈다. 그들의 두툼한 봉투와 선물들 옆에 나도 얇은 봉투를 내놓았다. 사실은 그 조차도 아까운 마음이 없지 않았다. 요즘의 내 경제상황도 그렇지만 돈의 용처를 생각해도, 다른 4명의 부유한 형제자매들이 잘 부양하고 있는 부모에게 나조차 돈을 보태는 것은 내겐 사회적으로 마땅치 않다. 그들에겐 얇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겐 몇 번이고 쪼개어 쓸 액수다. 그 돈이 더 마땅하게 쓰여 질 곳은 수도 없이 많다. 더구나 이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이 겪게 되는 경제적 추락에 대해 저들은 관심이 없고 나 역시 저들의 관심의 대상이고 싶지 않다.


그들 앞에서 나의 일상과 생각을 언급하지 않는 한, 그들은 나를 그들의 모임에 계속 끼워 넣으려 함으로써 그들의 안녕을 연장시키고 싶어한다. 그들의 나에 대한 침묵은 나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안녕을 위해서다.


부모자식 혹은 형제자매 간의 인정에 대해서라면, 나는 그 가족주의적 온정을 털어내는 훈련을 끊임없이 해왔다. 전 남편 상대적으로 저들에 비해 경제 사회적 계급에서 훨씬 하위인 남자와의 결혼을 위해 집을 나오면서부터, 나는 그들에게서 정서적으로 물리적으로 이미 분리됐다. 그 이후의 그들과의 모든 관계는 내 편에서는 마지못한 관계였다. 더구나 사회운동으로 이어진 나의 삶의 과정에서 내가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관심사는 거의 없었다.


지독히 비정하게 여겨진다 하더라도, 나의 솔직한 심정은 그렇다. 소위 “사람 노릇“이라고 일컫는 ”인정주의“는 차라리 내겐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흘러가는 것이 옳다고 인식되었고, 늘 부족했지만 그 실천을 위해 노력해 왔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보통의 사람들에게 가장 친밀한 기초공동체 라면 내겐 사회운동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중 가난과 차별과 억압 중에 있는 사람들이 가족 이상의 친밀한 유대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었다.


저들 속에 속해 있는 여성? 가부장적 이성애자들이고 부자들이지만 그들이 원한다면 차별 받는 여성의 이름으로 언제고 그들과 함께 그들과 나의 문제와 생각을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들이 누리는 가부장 속에서의 자신들의 안녕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균열을 내기 시작할 때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들 역시 내겐 “저들” 일 뿐이다.


이혼한 여동생은 최근의 재혼을 통해 가부장의 가족 울타리를 새롭게 만들어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갔다. 남편의 외도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올케는 바짝바짝 말라가면서도 남편이 제공하는 안녕을 벗어날 엄두를 내지 않는다. 평생 남편을 미워하며 살아온 엄마는 최근 하나님이라는 절대의 가부장 하나를 만들어 남편을 끌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들 모두 가부장적 가족주의의 희생자들이지만, 그녀들이 전선의 이 편으로 내미는 손만큼만 나를 그녀들을 잡을 수 있다. 그녀들이 저들 속에 여전히 남아서 그 속을 고쳐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태를 악화시킬 권리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그 속에서 사태를 개선시킬 권력을 갖게 되리라는 믿음은 환상이다.


이미 성장한 자식들. 그들과는 이제 어미와 새끼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이성애주의 세상 속에서 이성애자 남성과 동성애자 여성으로 만나고 싶다. 전선의 어느 편에 설지는 이제 그들이 정할 차례다.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와 그 주변 그리고 내가 존재하게 한 자식들과의 관계는, 이미 상당히 완결되었다. 육체의 관계가 아직 남았다면 서로 합의되는 선에서 관계 맺기를 다시 할 일이다. 정신의 관계를 갖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자. 하지만 전선의 저 편에서만 통용되는 관계 맺기에 나는 이제 저항한다.


나는 저들의 세상에서 걸어 나와, 다른 세상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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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최현숙 기자

황무지 2005-02-06 오후 19:20

살벌하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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