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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요즘 만나는 남자 없니?”

말문이 막혔다. ‘말했잖아. 나 남자 안 좋아한다고.’ 그러나 그 말은 목구멍에서만 맴돌았다. 분위기 좋은 친구들과의 만남을 갑작스럽게 ‘튀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한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싶은 것이다. 지나가는 흔한 말일뿐인데.

나의 오랜 친구들, 그들과의 만남은 십 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굳이 우리의 우정이 어떠한 것이라고 강조하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가 든든하고, 일년에 한두 번이지만 만나면 편하고, 속상한 일 생겼을 때 연락해 흥분해서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가도 그 기억을 지우고 싶을 때 눈치껏 알아서 잊어주는 친구들. 그것이 우리의 관계다.

너무 가까운 사람들 간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속사정을 공유하고 있기 마련이다. 부모에게도, 자녀에게도, 애인이나 남편에게도 얘기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눈다. 성폭력을 당하고, 낙태를 하고, 애인에게 두들겨 맞는 등의 끔찍한 경험도 친구들 간에 함께 경험되고 또 아물어가는 아픔이다. 외부로 드러나지 않은 성격적 장점과 단점까지도 친구들은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간혹 나는 우리의 관계를 회의한다. 친구들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친구들이 내게 주는 친밀감을 과연 나는 얼만큼 공유하고 있을까. 이런 불행한 생각을 하게 되는 때는 바로 저 지점, “요즘 만나는 남자 없어?” 하는 가벼운 질문을 받을 때와 같은 경우다.

“나 사귀는 사람 있어. 아니, 사귀는 사람이 예전에도 있었어. 여자야. 난 남자 취향이 아닌가 봐.” 라고 준비도 없이 말을 해버렸던 때가 언제였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가 겨울이었고 분위기 좋은 까페에서 그렇게 얘기했던 것 같다.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연애와 결혼이 화두가 된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더는 이야기하지 않고 버틸 수 없었나 보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던가? 말해 놓고 나서야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잔뜩 긴장됐는데 친구들은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별다른 반응 없이 다른 주제로 넘어갔던 것 같다. 아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너 예전에도 좀 그런 면이 있었지.” 이상하게도 그 말이 내겐 굉장히 위안이 됐다. 나는 나의 성정체성이나 연애에 대해 어떤 말도 더 이어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했다는 사실이 대견했다.

그러나 그걸로 된 것이 아니었다. 내게 남자애인이 있었다면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해달라며 나를 재촉했겠지만, 친구들은 나의 애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내게 남자애인이 있었다면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애인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얘기했겠지만, 나는 애인과 헤어졌을 때조차 그 사연을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친구들은 내가 레즈비언이란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잊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내 생일을 기억해주고, 내가 하는 일에 관심 가져주고, 부모님의 건강과 언니의 안부까지 잊지 않고 묻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첫 번째 커밍아웃 이후로 몇 번이나 비슷한 커밍아웃을 해야 했다. 그것은 매번 무척이나 버겁고 힘든 일이었다.

서른을 넘기면서 친구들의 질문은 “너 요즘 만나는 남자 없니?”에서 “진짜 결혼 안 할 거니?”로 변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 그런 질문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친구들에게 내가 레즈비언이란 사실을 알리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커밍아웃을 하는 것과 내가 동성애자란 사실을 친구들이 인식하는 것 사이엔 거쳐야 할 또 다른 많은 과제들이 있다.

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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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aged..? 2005-01-29 오후 17:00

'내게 남자 애인이 있었다면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해달라며...재촉했겠지만, 친구들은...궁금해하지 않았다. 내게 남자 애인이 있었다면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애인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얘기했겠지만, 나는 애인과 헤어졌을 때조차 그 사연을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 이래서 커밍아웃이 반복돼야 하는 모양입니다. 동성애자임을 밝혀도 그들은 잊거나 모르는 척하거나 관심이 없기 십상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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