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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rnews 2005-02-11 21: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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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대행사 오피스h의 CEO 황의건씨(37)의 하루는 오전 9시에 시작한다. 일반 샐러리맨에 비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그의 하루 일과가 끝나는 시간이 새벽 4시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지도 않다. 벤츠, 아디다스, 라코스테, 게스, 갤러리람 등 패션과 보석, 코스메틱, 와인 관련 브랜드 등 10여개의 홍보를 대행하고 있는 그는 하루 평균 미팅 건수만도 4~5개나 된다. 게다가 패션월간지와 경제주간지에 고정적으로 칼럼을 게재하고 있고, 심심찮게 방송에도 얼굴을 내밀고 있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는 표현이 딱 맞는다.

지난해 말 케이블-위성채널 온스타일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싱글즈 인 서울'에 출연한 후에는 네이버카페에 팬카페까지 생겼다. 이 카페의 회원은 250명에 달한다. 대부분 그의 업무의 노하우는 물론 패션 및 뷰티감각을 전수받고 싶어하는 이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업계가 인정하는 베테랑 PR매니저인데다 용모도 세련됐다. 색조화장을 하지 않을 뿐 여자보다 피부관리에 더 신경을 쓰고 옷차림도 유행을 앞서간다. 그는 "평소 피부 타입에 맞는 기초화장품을 잘 챙겨 바르고 저녁에는 무엇보다 클렌징을 꼼꼼히 한 후 머드팩 등을 통해 보습에 신경쓰고 있다"고 말했다. 피부관리를 위해 피부과에도 한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이렇게 외모에 신경을 쓰는 배경에 대해 그는 "홍보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먼저 멋있게 꾸며 상품화할 수 있어야 브랜드나 제품도 팔 수 있다는 게 나의 철학"이라고 설명했다.


"비즈니스상 전략적으로 커밍아웃" 그는 '게이'다. 2년 전 한 라이선스 패션월간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커밍아웃했고, 지난해 9월 또 다른 라이선스 패션월간지를 통해 완전히 커밍아웃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나를 드러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략적으로 단계적 커밍아웃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커밍아웃을 결심한 것은 2003년.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면 언젠가 이것이 비즈니스를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그는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이런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비즈니스 파트너와 부정적으로 생각해 같이 손잡고 싶어하지 않는 측을 확실히 구분할 필요성을 느꼈다. 실제로 어느 홈쇼핑 운영자측에서는 그가 게이라는 이유로 "정서적으로 맞지 않으니 일을 그만둬달라"고 하기도 했다.


1년여가 흐른 현재 그는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해 비즈니스에서도 백분 활용하고 있다. 일반 남성 또는 일반 여성(그들은 일반 남성 또는 여성을 '스트레이트(Straight)'라고 부른다)과는 다른 게이 특유의 앞선 감각은 그가 하고 있는 일과 잘 맞아떨어진다. 일반적으로 게이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인지감각을 포함한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패션디자이너, 방송프로듀서, 그래픽디자이너, PR담당자, 영화감독 중 일부가 게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게이는 이런 튀는 직업보다 은행원 등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은행원 10명이 있다고 가정할 때 그중 게이가 포함돼 있다면 그의 옷차림이 나머지 9명보다 훨씬 더 감각적일 것"이라는 게 게이들의 설명이다.


황의건씨가 오늘날 업계에서 실력자로 손꼽히는 데는 게이에 대한 사회의 시각이 크게 바뀐 덕도 있다. 이에 대해 그를 비롯한 대다수 게이들은 "2002년 한-일월드컵을 전후로 해 게이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고 입을 모은다.


동대문에서 작은 의상실을 운영하며 패션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게이 장동혁씨(가명-34)는 "무엇보다 케이블-위성TV의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케이블-위성TV에서 게이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시트콤 드라마나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여과없이 안방에 공급하면서 게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시각이 크게 바뀌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제로 캐치온의 '퀴어 아이'와 온스타일의 '플레잉 스트레이트'는 멋쟁이 게이들이 등장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고, 온스타일의 '윌 앤 그레이스'와 Home CGV의 '퀴어 애즈 포크'는 게이가 주인공인 외국의 인기 드라마다. 또 캐치온과 캐치온플러스, 온스타일, OCN 등에서 방영하는 미국 HBO의 인기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는 게이가 여주인공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절친한 친구로 묘사돼 있다.



매트로섹슈얼 모습과 가장 흡사 이 중 Home CGV의 '퀴어 애즈 포크'는 미국 피츠버그에 사는 8명의 동성애자 남녀의 삶을 솔직하게 그린 인기 드라마다. 또 캐치온의 '퀴어 아이'는 패션, 인테리어, 요리, 뷰티 등 각 분야 전문가로 활약하는 잘생기고 세련된 게이 5명이 촌스러운 이성애 남성 출연자를 개선시켜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게이들은 모두 전문직에 종사하는 패션리더들이다. 이들의 모습은 지난해부터 전세계적으로 불기 시작한 '메트로섹슈얼' 바람과 맞물려 게이의 이미지 제고에 톡톡히 기여했다. 장동혁씨는 "미디어와 IT문화가 발달한 사회의 싱글라이프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이미지가 메트로섹슈얼이고, 매트로섹슈얼의 모습과 가장 흡사한 게 게이이기 때문에 게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호감도도 덩달아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매트로섹슈얼은 자신의 패션과 미용에 관심을 쏟는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에 이르는 남성을 일컫는다.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추고 주로 고급 미용실과 뷰티숍, 분위기 좋은 바와 피트니스센터가 있는 대도시, 즉 메트로폴리스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매트로섹슈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94년 영국의 문화비평가 마크 심프슨이 일간지 '인디펜던트'에 기고한 글에서다. 심프슨은 이 글에서 "미국의 패션업계가 남성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런 이미지를 만들어냈다"고 조롱했다. 허나 그는 2003년 7월 인터넷 미디어인 '살롱닷컴'에 '메트로섹슈얼을 만나자'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매트로섹슈얼은 자신을 사랑하며 거기서 즐거움을 얻는 성적 취향의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매트로섹슈얼로서 대중에게 어필한 대표적 인물은 영국의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다. 축구를 하면서도 매니큐어를 칠하고 매번 헤어스타일에도 변화를 주며 부인 빅토리아의 끈팬티를 입기도 했다. 남성 동성애 잡지의 표지모델로 등장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꽃미남 열풍'이 매트로섹슈얼과 접목되는 부분이 있다. 얼굴은 미소년처럼 아름답되 몸은 적당한 근육이 있어 섹시한 남자의 이미지. 축구선수 안정환, 가수 겸 연기자 비, 영화배우 권상우 등이 매트로섹슈얼 또는 꽃미남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매트로섹슈얼 또는 꽃미남의 모습은 과거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게이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남성이 곱상한 외모를 가지고 있으면 '기생 오라비'라는 비웃음을 사고, 외모에 신경을 쓰면 '못난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장동혁씨는 "일반 남성 또는 여성들이 게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오해는 모든 게이는 여성스럽다고 믿는 것"이라면서 "실제로 피트니스센터에 가면 운동을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스포츠선수 외에 게이일 것"이라고 말했다. 게이는 여성스럽다기보다는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는 데 관심이 많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설명이다.


여하튼 케이블-위성TV와 매트로섹슈얼의 영향으로 이제 게이는 일반인, 특히 일반 여성에게 잘생기고, 옷 잘 입고, 마음이 넉넉하고, 우아하고, 그러면서도 성적 취향은 남성에게 쏠리는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요즘 일반 여성이 게이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헤어디자이너로 일하는 게이 김석영씨(30-가명)는 "특히 청담동이나 압구정동 스트레이트 여성들은 게이 친구가 있는 것을 최신 유행을 따르는 세련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높아졌다"며 "게이 친구를 갖기 위해 게이들이 모이는 곳에 찾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의 대표적인 게이클럽인 이태원의 'G바'에는 최근 1~2년 사이 변화가 일고 있다. 종전엔 게이들만 모여들었던 반면 요즘엔 다섯명 중 한명은 일반 여성이다. 게이 친구를 따라왔거나 여자끼리 찾아온다. 하지만 게이들은 이런 일반 여성들이 이 클럽에 드나드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반 여성은 그들에게 연애상대로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이 친구를 두고 있는 일반 여성들에 의하면 '섹스 앤 더 시티'에서 그려진 것처럼, 게이 친구는 일반 남자친구 또는 여자친구와는 다른 '편안함'을 준다고 한다. 뉴욕에 머물다 최근 한국을 방문해 게이 친구와 한집에서 머물고 있는 패션디자이너 정선화씨(가명-33-여성)는 "나의 경우 미국인 친구도 한국인 친구도 여성보다는 게이가 더 많다"며 "게이는 신체적 성(性)은 남성이되 여성의 감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어 여자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얘기도 터놓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게이의 특성은 지난해 방송된 SBS 드라마 '완전한 사랑'에서 문지나(이승연)와 홍승조(홍석천)의 관계에서도 표현됐다. 이승연이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 박시우(차인표)와의 애정문제를 한집에 기거하는 게이 친구인 홍석천에게 울며불며 털어놓는 장면 등이 그렇다. 게이 친구들이 많은 홍보대행사 수앤컴퍼니의 CEO 심연수씨(37)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심씨는 "남자친구나 동성친구에게 느낄 수 없는 정을 게이 친구들을 통해 많이 느꼈다"며 "업무적인 고민 외에 애정문제를 포함한 각종 문제에 봉착했을 때 적절한 위로와 조언을 들은 경험이 적잖았다"고 말했다.


"게이 이미지 미디어에 의해 조작" 하지만 게이에 대한 최근의 이같은 정형화한 시각에 대해 게이들은 우려와 경계심을 갖는다. 장동혁씨는 "매트로섹슈얼과 게이는 동의어가 아니며 가장 도회적이고 트렌디한 집단 중 하나가 게이"라고 말한 후 "유행은 돌고 도는 것으로 매트로섹슈얼의 유행이 흘러가면 게이문화가 덩달아 외면당할 수 있다고 본다"고 우려했다.


심연수씨도 "최근의 게이 이미지는 미디어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측면이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며 "세련됐다거나 감각적이라거나 등 누구나 선망하는 측면에서만 게이의 모습을 조명함으로써 일반인들의 게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래도 작금의 상황이 오랜 세월 음지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게이들에게는 희망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황의건씨는 "게이의 정체성이 긍정적으로 잘 잡혀간다면 장기적으로는 게이가 사회에서 제목소리를 내는 데 더 좋은 환경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아직은 게이에 대한 관심의 초점이 상당부분 성정체성에 머물고 있으나 날로 감각적인 상품이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에서 게이는 다음 시장을 예측하는 나침반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곧 게이에 대한 수요와 밸류가 올라가는 이유가 된다는 게 황씨의 설명이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기사제공 : 뉴스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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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