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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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감성 2005-03-02 20:37:11
+0 912
나는 매일 원빈을 바라본다

아휘 기자
  
내 컴퓨터의 배경화면에는 원빈의 사진이 있다. 원빈의 사진을 바탕화면으로 한 지 벌써 서너 달. 그러면 내가 원빈을 좋아하느냐? 그건 아니다. 나는 이영애와 고현정을 좋아하며, 줄리엣 비노쉬를 좋아한다. 그러나 내게 누굴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저들의 이름을 댈 수 없다. 왜냐면, 나는 레즈비언이기 때문이다.

몇 달 전 회사를 옮기며, 새로운 질문들을 많이 접했다. "남자친구 있어요?", "언제 결혼해요?"라는,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에게 사회에서 던지는 질문들을 새 회사에서 다시금 접해야 했다.

"남자 친구 없어요.", "결혼이라, 나중에 하죠" 라는 나의 대답은, 보통의 여자들에게서 듣기 힘든 대답이었을까? 아니면, 나의 평소 모습에서 대충 유추해서, 별로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감' 잡았던 걸까? 그 뒤로 내게 쏟아지는 질문들은, 그들 측에서는 농담이겠지만, 내게는 칼이 되는 질문들이었다.

"아유. 남자같애" (미치겠다. 나는 그리 부치스럽지도 않은데..)
"정말 남자랑 연애해 봤어요? 왠지 여자랑 했을 거 같아" (남이야 여자랑 하던, 남자랑 하던..)
"결혼에 관심 없어요?" ('관심 있다. 여자랑 하는 결혼에!' 라는 말이 목까지 차오른다.)

이런 질문들이 쏟아지면서, 나는 내심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생명의 위협이냐 하겠다만, 내가 돈 벌어서 나를 먹여 살려야 하는, 게다가 생존권 보장이 별로 안 되는 한국에서 레즈비언이라는 게 판명 나는 것은 곧 노동할 권리의 위협이고, 이것은 곧 생명의 위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생존 전략을 짰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형은 어떠하다는 것을 조금씩 내비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시작한 첫 번째 전략이 잘생긴 남자 연예인의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깔아놓은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하면, 내가 남자에겐 관심이 있지만, 단지 눈이 높아서 결혼을 하지 않는 것쯤으로 볼 것이니까. 그리고 모든 연예인 관련해서는 남자 연예인들 이야기만 한다. 가끔 여자들 이야기도 하지만, 그건 항상 남자 이야기의 양념 정도로만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전략으로는 여성주의적인 발언은 절대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예전 회사에서 여성주의적인 발언을 했다가 와전되어버려서 "너 여자랑 사귄 적 없냐?"라는 간 떨리는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이제 옆에서 "호모 자식", "미친 페미"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이 있어도 그냥 무시한다.

그래도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는 나의 말이나 행동들은 나의 정체성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다고 느꼈다. 언젠가, 후배를 만나서 이야기 하던 중에 "그 회사 여자 직원은 몇이야?"라고 물었더니, 그 후배가, "왜 선배는 여자 직원의 숫자를 물어요? 이상하네"라고 했다. 첨에는 그 질문에 별 생각 없었는데, 나중에 친구와 대화 중에 "그 드라마 여자 주인공이 누구야?" 라고 물었더니, 친구는 "누가 레즈 아니랄까봐 여자 주인공이 누군지 묻냐, 딴 데 가서는 절대 그러지마"고 말했다. 그 순간, 내가 후배에게 물었던 여자 직원의 숫자가 생각났다. 그 뒤로는 항상, "남자 주인공이 누구지?" 또는 "남자 직원은 몇 명이야"라고만 묻는다.

아무리 여성주의자가 아닌 척 하고 살려고 해도, 가끔 옆에서 마초가 너무 뻘소리를 하면, 나도 머리가 돌아버려 막 쏘아주기도 한다. 얼마 전에도 성매매는 남성의 정당한 권리 어쩌구 하는 남자 덕분에 몇 마디 해줬는데, 그 남자가 나의 여성주의적 성향을 예감했다는 듯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붙여서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린 적이 있다. 그 남자가 여성주의자들은 여자랑 사귀지 않냐는 듯의 말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는 것이 두려워졌다.

이런 고민을 들은 친구는, 그냥 가상의 남자를 설정해서 사귀는 것처럼 행동하라고 한다. 하지만 남자 친구에 대해서도 이것 저것 캐묻는 한국 사회에서, 어리숙하게 거짓말 했다가는 큰일 날 수 있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얼기설기 얽혀 있어서 어느 방향에서 허점을 잡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소개팅 시켜준다는 사람들 때문에 갈수록 피곤해진다. 이들에게 무슨 말로 사양을 할 것인가? 예전에 남자에게 너무 관심이 없지 않냐는 말과 소문에 긴장해서 남자와 소개팅을 했지만, 하는 내내 괴로움 그 자체였다.

이런 나 자신을 보면, 가끔은 한심하다.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겁내며 살지? 내가 세금을 안 냈냐, 일을 제대로 안 했냐? 남들보다 더 했으면 했지 못하지는 않고 사는 인생인데. 그리고, 누가 자기들 애인 뺐는다냐? 이성애자 여자와는 절대로 연애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 걱정 붙들어 매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각각 나의 정체성이 드러날까봐 겁난다. 누군가가 등을 돌린다는 게 두려운 게 아니다. 내 친한 친구들은 레즈비언이거나, 혹은 내가 레즈비언인걸 알게 된다 해도 나를 버리지 않을 믿음을 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웃팅을 당하게 되었을 때, 가족이 상심하게 되는 게 가장 두렵다. 다음으로는 더 이상 일을 못하게 되는 게 두렵다. 가족의 상심은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언젠가는 내가 커밍아웃을 할 대상이므로. 하지만 일은 다른 종류이다. 일은 돈을 번다는 것 외에도 사람에게 많은 의미를 주는 것인데, 아웃팅은 이러한 의미를 완전히 박탈해버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커뮤니티에 나가는 것도 두렵다. 아마, 많은 레즈비언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호모포비아의 숲에서 사는 것은, 서로를 찾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고를 두려워하기 때문일 거다. 마치 내가 밤에는 티지넷이나 끼리끼리의 글을 읽으면서 혼자가 아님을 위안삼고, 낮에는 원빈 사진이 걸려진 컴퓨터로 일하며 언젠가는 호모포비아의 숲에서 탈출할 것을 꿈꾸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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