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title_Free
모던보이 2005-06-20 16:52:10
+0 620

흠정 성경 번역으로 유명한 절대군주 제임스 1세는 원래 스코틀랜드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데, 메리 스튜어트는 나중에 정부를 시켜 자신의 남편을 죽인 인물이다. 나중에 메리 여왕이 그 정부와 결혼하려 하자 귀족들의 반말을 사게 되어 즉각 폐위되고 그녀의 한 살 된 아들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 왕이 되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철의 여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손 없이 죽자, 혈연에 따라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제임스 1세가 되었다.

제임스 1세는 결혼은 했지만 자신의 동성애적 감정을 속일 수 없었다.
1607년, 그가 막 마흔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궁정에서 열린 마상 창 시합에 참가한 로버트 카라는 열 일곱 살의 가난한 미남 청년을 보게 된다. 그는 공교롭게도 마상 창시합 도중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제임스 1세는 그를 데려다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간호하면서 라틴어를 가르쳐주었다. 그 도중에 제임스 1세는 그만 사랑에 빠지게 된다.

제임스 1세의 애정 표현이 좀 적극적이었던 모양이다. 1611년, 토마스라는 백작이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 제임스 1세의 사랑 표현을 이렇게 적고 있다.

"왕은 그의 팔에 기대 볼을 꼬집고 그의 주름진 옷을 펴 주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말을 건넬 때도 눈으로는 그를 보고 있었다."

해가 지날수록 제임스 1세는 로버트 카에게 온갖 선물과 공여를 통해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를 썼다. 심지어는 백작의 자리도 수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일방적 사랑도 곧 끝장이 나고 말았다. 1615년 자신의 일방적인 애정 퍼부음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제임스 1세가 로버트 카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절망과 그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담겨 있다. 이미 로버트 카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한 상태였다.

"나는 몇 백 번을 너에게 떠나지 말라고 간청하면서도, 내 방에서 몸을 일으켜 나가려고 하는 너를, 그 꾸물거리며 나가는 너의 등을, 아주 매정한 척하면서 못 본 체하고 있었다. 요즘 네가 예전의 그 아름답고 좋은 점들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변해 있는지는 아마 더 잘 알 것이다.

만일 내가 왕이 아니고 일개 시민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신이 주신 너의 영혼과 생명을 제외하고는 네가 가진 모든 것은 모두 내가 준 것임을 명심해라. 나는 너에게 마음으로 나를 따라야지, 네 마음대로 나를 조종하려 하지 말라고 누차 이야기했었다. 내가 너에게 마음 편하게 대할 수가 없다면 진심으로 대하기도 힘을 것이다. 네가 단지 두려움 때문에 내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내 사랑에서 나오는 횡포는 갑자기 증오의 횡포가 되어 버린다. 내가 얼마나 관대하게 끝없이 너를 사랑하는지 신만이 아실 것이다."


제임스 1세의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로버트 카를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권력을 가진 자의 제의적 사랑의 비운의 결말이었다.

하지만 제임스 1세는 그를 잊지 않았다. 1616년 로버트 카와 그의 아내가 탑에 있는 죄수를 독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기소당해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제임스 왕은 특별 사면을 내려 선고를 감해주고 나중에 그들을 석방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제임스 1세는 전 유럽을 강타했던 30년 전쟁의 와중에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제도 개혁을 펴다가, 이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제임스 1세의 편지는 사실 이 시대 최상류층 귀족들의 섹슈얼리티와 그것에 대한 표현을 드러내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제임스 1세에게는 로버트 카 말고도 다른 연인이 있었다. 그는 로버트 카와의 관계를 정리하자마자 곧바로 조지 빌러스라는 젊은이와 사랑에 빠졌다. 왕비와는 사실상 먼 옛날부터 별거 상태에 들어간 제임스 1세는 자신 주위에 있는 미남 신하와 미소년 시종들과 거리낌없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지 빌러스는 유럽의 명사였다. 이 매력적으로 잘 생긴 데다가 똑똑했던 조지 빌러스는 실질적으로 로버트 카를 밀어내고 국왕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제임스 1세는 나중에 버킹엄 공작이라는 직위를 그에게 수여하기에 이른다. 제임스 국왕은 그에게 로버트 카에게 보낸 연서 못지 않은 사랑의 편지를 날려보냈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도 기탄없이 그를 껴안거나 애무했다. 심지어 그를 지탄하는 소문에 대고 그는 발칙하게 이런 비유로 대응했다.

<우리의 사랑은 성 요한에 대한 예수의 애정이다>

하지만 이 같은 노골적인 동성애 표현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최상류 귀족층이나 왕족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제임스 1세 이전에 벌써 프랑스 국왕 앙리 3세는 이미 '미소년 궁전'으로 유명한 존재였고, 지금도 세익스피어와 혼동되고 있는 연극 연극의 창시자 말로의 '에드워드 2세'는 실화를 바탕으로 에드워드 2세와 그 왕이 총애하는 가베스턴 사이의 열렬한 사랑의 정경을 그려냈다.

16세기에 남성 귀족들이 가장 애호했던 옷은 위에 있는 그림에 나오는 코드니스(성기 덮개)다. 르네상스의 파격적 영향을 입은 유럽은 이 코드니스 열풍에 휩싸였었다. 에로틱한 육체 각선미를 강조했던 르네상스 열풍은 귀족 남성들의 바지 앞에 달린, 코드니스를 통해 자신의 남성성을 적극적으로 강조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코드니스가 상류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성애적 감정들에 적극적으로 힘을 불어넣어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독자 여러분이 만일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를 보실 때 로미오가 저 코드니스를 입고 나오지 않았다면 그 영화는 고증에 실패한 것이 된다.

그러나 유럽의 민중들은 상류층의 이와 같은 '타락'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향수를 온몸에 뿌린 코드피스 차림의 젊은 신하들이 왕이나 최고위층 귀족에게 알랑거리며 귀여움을 떠는 꼬락서니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게다가 젊은 귀족 여성들에게 선풍적으로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 '천천히 모자를 쓰고 짧은 머리에 옆구리에 단도를 찬 말괄량이 귀족 여성상'을 국민들은 비난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이제 막 마녀사냥이 시작된 데다가 남색과 같은 이형의 성 행위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 적용을 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제임스 1세가 누렸던 동성애의 향연은 서민들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남색을 저지른 마부, 구두수선공 등은 그 사실이 알려지기 무섭게 처형당했다. 그들이 남색을 하고도 살아남는 경우는 귀족에게 강간당한 신하이거나 늙은 수도원장의 유혹에 넘어간 가난한 청년 수도사일 경우 뿐이었다.

어쨌거나 우리의 제임스 1세는 이처럼 이중적인 도덕률이 적용되는 사회에서, '법이 먼저가 아니라 왕이 있고 법이 있다'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자신의 사랑 놀이에 맘껏 심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신흥 부르조아 계급이 등장하면서 '타락의 온상'으로 치부했던 이 귀족 상류층의 동성애가 지금껏 온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부르주아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진 귀족상이 지금껏 우리들에게 일반적 통념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여성의 옷을 입고 싶어 밤마다 여성 옷을 입고 화장을 한 채 밤 거리를 몰래 헤매고 다녔다는 유럽의 한 귀족의 실화는, 그가 귀족이기 때문에 처벌받지 않았다는 지겨운 계급이론의 떠벌림을 조금만 옆으로 치운다면 우리에게 조금은 슬픈 역사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해서 제임스 1세가 로버트 카에게 보낸 마지막 연서는 그가 왕이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사랑을 불신할 수밖에 없던 한 인간의 실존의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다. 그걸 깨닫는 것 만큼 불행한 일도 없다. 물론 시간이 지나 다시 사랑 사냥에 나선다고 해도 말이다.


2002년 어느 날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수
» 연애편지 모던보이 2005-06-20 620
2943 "여사제는 불법인데…" "그건 바티칸의 법일 뿐" queernews 2005-06-20 1057
2942 동성애에 대한 약간의 질문...(진지모드) +3 민남이 2005-06-20 554
2941 롯데월드...본전을 뽑았습니다! ^^ +5 민남이 2005-06-20 593
2940 KSCRC 초청강연회 "동성애 연구 이렇게 한다" KSCRC 2005-06-20 585
2939 독일, 남자에게 키스하는 남자 +2 안티무더미 2005-06-19 1238
2938 릴리슈슈의 모든 것 +5 모던보이 2005-06-19 763
2937 오늘 오티 어땠나요?? +12 민남이 2005-06-19 885
2936 6월 신입회원 OT +19 차돌바우 2005-06-14 1155
2935 레즈비언들의 고민을 듣습니다 : ) 한국레즈비언상담소 2005-06-19 1176
2934 동성커플? 연상녀&연하남 커플? 이해 안가! +3 queernews 2005-06-19 3196
2933 '분홍신', 가장 보고싶은 한국공포영화 1위 +6 피터팬 2005-06-19 1866
2932 오페라 "리골레토" 공연 임박! +3 원장 2005-06-18 932
2931 집에 왔는데.. +10 지식in 知識人 지식人 2005-06-18 1276
2930 택시를 탔는데 돈이 모자라면 +1 나, 이쁜 애 2005-06-18 646
2929 (오타와) 동성애 커플 결혼 합법화 논란 +2 queernews 2005-06-17 2053
2928 3백원의 유혹 +3 미소년보호위원회 2005-06-17 762
2927 6월18일,토요모임 - 박기영 & 상상밴드(무료공연) +2 박철민 2005-06-17 741
2926 동성애 소설, <레인보우 아이즈> 파헤치기! 한중렬 2005-06-17 948
2925 아류님의 인터뷰... +6 라기..^^ 2005-06-17 552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