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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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강연은 근래에 보기 드문 명강의였습니다.
강사는 서동진씨였고, 제목은 "전지구적지본주의시대의 동성애자 운동"이었지만,
서동진씨 특유의 전방위 해설로, 결국 신자유주의적 인권운동에 대한 비판으로 마감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인권운동이라니...도대체 그런 말이 어딨죠?
신자유주의라고 한다면, 대량해고, 민영화, 복지삭감, 레이거노믹스, 대처리즘 등등과 동일어로 쓰이는 패덕한 말일진데,
그것과 신성한 인권운동을 결부시키다니요.
그런데, 서동진씨는 지금까지 한국동성애자 인권운동 진영이 해온 일들이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인권운동이었다고 "문제제기" 하더군요.

근거는 이러했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철학은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입니다.
서구의 철학자들이 지난 몇십년동안 주구장창 해온 일이 기존의 거대담론을 해체하는 것이었고,
포스트모너니스트들이 90년대 해 온 일들도 단단하게 뭉쳐있던 각종 집합적 이데올로기를
전체주의라고 공격하면서, 보다 섬세하고 현미경적 시각으로 사회현상을 분석하자는 것이었죠.

뭉쳐있는 것들 다 흩어져!

신자유주의랑 상당히 닮았습니다.
공기업 해체 분할해서 민영화 시키고, 개인보단 집단을 우선시 하는 맑스주의 비판하고,
서구에서 몇십년동안 탄탄하게 유지되던 노동조합, 복지정책들 공격하는거죠.
이를테면 이런 이유로요.

"일도 안하는 게이름뱅이들(실업자수당을 타먹는 사람들을 일컷음)을 위해 왜 혈세를 낭비해야 돼?"

그렇게 복지정책들이 하나씩 사라져 갔습니다.
그렇다면 갑자기 따귀맞은 "하층계급"들에겐 무슨 얘기를 해줘야 할까요?
이를테면, 씨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십대 흑인 소녀에게요.

"문제는 네가 미혼모를 위한 복지정책에 기대선 안 돼. 그런 정책 때문에 대책없는 임신을 하게 되는거야.
너 자신을 들여다봐. 지금 네 꼴을 보라고. 인간은 평등해. 너라고 이렇게 살 이유는 없어. 자, 이 프로그램에 참여해봐. <독립적인 여성들을 위한 워크샵>에 가봐. 너 자신을 소중히 여겨. 함부로 몸을 굴리지 마! 왜냐면....넌 소중하니까!"

할렘이라는 공간, 노동자계급의 아버지 어머니를 둔 아이라는 그녀의 열악한 조건...은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그녀는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몰라서, 임신 같은 걸 해버린거죠.
때문에 수 많은 사회프로그램들과 브리짓존스가 읽었던 <강건한 여성되기> 같은 정신수양서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소중함을 일깨운다면...그녀는 두 번 다시 나쁜 남자에게 속아서 멍청한 짓을 하지 않을 겁니다.

...라는 것이 바로 신자유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이 "당당하게 잘 사는 비법"이라는 겁니다.

개인적인 것이 바로 정치적인 것이고,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정치적 해결의 출발인 것이죠.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
동성애자인권운동 진영의 오랜 구호입니다.

동성애자인권운동가들은 벽장 속에 있는 게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긍심을 가져! 넌 게이야! 네가 벽장에서 나와야 세상이 바껴!"

움추린 불쌍한 어린양에게 자긍심을 불어넣고, 커밍아웃을 독려하고,
스스로의 삶을 당당하게 여기도록 자극을 주며,
자신감=당당한 삶임을 가르칩니다.

흑인소녀에게 각종 사회프로그램들이 하는 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흑인소녀가 임신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가난하기 때문이란 것을.
(워크샵에 참여할 수 있을만큼의 시간도 낼 수 없을만큼 그녀는 먹고살기 바쁘죠.)
그 흑인소녀가 임신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를 둘러싼 환경이 썩었기 때문이란 것을.
(정신수양서를 읽지 않아서가 아니라)

또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게이 노동자가 자신을 당당하게 여길 수 없는 이유는,
그래봐야 그의 삶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게이인 것이 자랑스러워봐야, 돈이 나옵니까 떡이 나옵니까!)

자긍심이란 것이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지 않을 때,
그 자긍심은 '우리 조상 양반이었어!'라고 술먹을 때만 큰소리치는 김씨 아무개의 허풍밖에 안됩니다.
(노동자가 자신을 노동자라고 당당하게 말할 땐, 보통 노조에서 단체활동할 때 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뭐라구요?
자긍심이 삶의 질을 향상시켜준다구요?
이를테면, 더 이상 어둠 속에서 헤매이지 않게 해주고,
같은 게이들을 만나게 해주고,
정신적인 안정감을 준자구요?
네, 물론입니다.
정신적 안정감, 삶의 질을 핵심이죠.
그러나....

그런 정신적 안정감을 위해 스스로를 당당하게 게이라고 칭할 사람은,
중산층 이상 ,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아직 젊은 것들, 좌파들
밖에 없을 겁니다.
유치하지만 퍼센트로 따지면...
(킨제이의 역학조사 룰로 전 인구의 4% 동성애자로 쳤을때) 한국에서 160만명의 동성애자 중에서
주말 게이바에 나오거나, 각종 게이모임에 참여하는 2-3만명(좋다! 10만명!) 만이,
그 눈꼽만큼의 숫자만이 그나마 스스로 호모임이 그닥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게이인권운동의 출발이 "스스로 자긍심 갖기" 라고 한다면,
지난 10년간의 한국동성애자인권운동은 이 10만명을 끌어들였다는 것,
그것만의 가치를 가질 뿐입니다.(글 흐름상 쓴 말이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그 10만의 또 얼마의 수가 자긍심 2번째 단계인 커밍아웃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머지 150만명에 대해선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요?
당당해 지세요! 연세대 대학모임에서 발간한 <커밍아웃>이란 책을 보세요!
게이모임에 나오세요! ...라고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목청껏 소리치면
알아서 기어나올까요?

아니면...
어쩌면 우리가 해왔던 인권운동은 어차피
들을 귀가 있는, 정신수양서를 읽으며 자기계발을 할 능력이 되는 사람들을 위한
신자유주의적 인권운동일 뿐일까요?

그렇다면 앞으로 우린 어떤 형태의 인권운동을 해나가야 할까요.

그것이 이번 강의의 도발적인 문제제기였습니다.
답은...
여러가지가 제출되었습니만,
전 문제제기 자체로도 꽤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고민해왔었거든요.
이런 것들요.

1. 에이즈는 게이들의 질병이 아니다..라고 선전해왔지만,
낯선 남자와 섹스를 하고 나면 왜 자꾸 에이즈 생각이 날까.
(에이즈는 게이들의 질병이 아니다..라는 사실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꿔야 하나.)

2. 당당하게 살려면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라고 선전해왔지만,
왜 난 그렇게 못할까? 난 당당하게 살고 싶은데 말이야~
(난 그냥 용기가 없는 놈일까? 용기를 얻으려면 어떤 수행을 쌓아야 하지?)

3. 애인하고 영원히 함께 살고 싶어. 동성결혼 절대 찬성이야...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에서 정작 동성결혼이 합법화 하면 난 구청가서 등록신청을 할까?

그래서,
앞으로 어떤 방식의 동성애자 운동이 제기되어야 할까, 하는 고민에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길 바랍니다.
저 역시, 정말 궁금하거든요.



PS1 :  전 현재 성소수자위원회의 위원직을 맡고 있지만, 이 글은 성소수자위원회의 공식입장이 아닌, 한중렬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이런 건 미리 미리 밝혀둬야 탈이 없죠^^;
또한, 서동진씨의 강의는 이보다 훨씬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제가 서동진씨의 문제제기라고 나름대로 해석한 것도 강의자의 의도와는 다를 수도 있음을 역시 밝힙니다.(사용하시는 언어들이 어려워서 오해했을 수도 있어요^^ 감안해주시압!)



PS2 :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의 동성애 특강은 이제 한 가지 주제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동성애와 문화(또는 예술)
글쟁이의 한 사람으로서, 이보다 당기는 주제는 없는 듯 하네요.
앞으로 올라올 광고에 많은 관심 바랍니다^^

모던보이 2004-12-04 오후 15:15

대자 계급도 못 되는데 혁명까지야... ^^
개인적으론 이론의 여지가 많은 글이긴 하지만, 이런 문제제기가 더 자주, 많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수고가 많으시네요. 마지막 강의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시길. 시간 되면 송년회 때 꼭 놀러 오세요. ^^

행인 2004-12-05 오후 12:42

쌩뚱맞은 글을 하나 남기자면, 서동진 씨의 말과 글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려는 노력조차 안 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그 점이 무척 불만입니다.

한중렬 2004-12-06 오전 02:29

사회이론을 쉽게 얘기하는 것은 분명, 대단한 능력입니다.
스타강사들 대부분이 이야기를 대중적으로, 쉽게 하는 분들이죠.
그렇지만 쉽게 풀어서 이야기 할 수 없다고
그 사람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덮어놓고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
굉장히 슬픈 일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에게만 노력을 촉구할 것이 아니라.
배우려는 사람들도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행인 2004-12-06 오전 03:58

물론 덮어놓고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서동진 씨의 글과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런 지적(?)은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싶고, 서동진 씨의 글과 말의 난해함은 최근 그분의 기운없는(혹은 씨니컬한) 태도와 함께 맞물려 또다른 부정적 측면을 낳고 있음을 조심스럽게 꺼내는 겁니다. "가르치는 사람에게만 노력을 촉구할 것이 아니라 배우려는 사람들도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한다고 하시지만, 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노력'하는데도 그 시간이 끝난 뒤 "내가 잘못된 건가"라는 말을 하며 주눅들어 집으로 갑니다. 거듭 말하지만, 냉소적 태도와 함께 빠른 속도로 어려운 단어를 발성하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좀 더 많은 공감대를 끌어내기 위한 노력의 부재는 저와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전문지식이 부족한 이들에게 많은 상념에 빠지게 만듭니다. 다른 많은 스타강사들처럼 꼭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저의 이러한 지적 역시 분명 중요한 정치적 의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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